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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수현 Sep 09. 2024

북방 이야기 : 절망 5

[소설]북방 이야기

뭐… 뭐라고? 지금 저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나, 그녀는 말이 없었고 그 자는 말을 이어갔다.


“그날 우리가 처음만났을 때… 그대가 나서주지 않았다면 나는 틀림없이 그들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그 정도로 나에게 해를 입히려고 작정을 하고 나왔으니깐. 하지만… 그대가 나를 구해주었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 나무에 묶여 매달리는 것은 늑대들에게 수치가 아니다. 예전 한족의 박해를 받으며 가족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결박된 상태로 밤새 늑대 울음소리를 내고 죽은 어느 칸의 이야기… 그가 겪은 고통은 늑대에게 수치가 아닌 인내와 불굴의 상징으로, 그의 기념일에 그 행동을 따라 버티는 시합까지 하곤 하지.


한족들은 그저 그것이 수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늑대에게 명예로운 박해다. 그대는… 그날 나를 응징하는 듯 말하면서 사실은 한족인 태자와 나를 괴롭히던 귀족가의 얼간이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내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의 부친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했다. 거기서 죽었다면… 나는 그냥 나뒹구는 시체에 불과했겠지. 그대가 칸의 서자의 시신을 가지고 가라 하였기에… 나는 살수 있었다. 자식의 시신을 수습해 온 자는 설령 자식을 살해한 범인이라도 해할 수 없다는 것이 늑대의 관습이지.


칸은… 분노하면서도 나를 끝내 죽이지 못하고 후하게 대접해야만 했다. 그대는 그런 늑대의 관습을 알고선 나를 구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호의를 보내준 그대에게 연모의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 같은 늑대가 연모하는 것이 그대에게는 도리어 정치적으로 큰 위기가 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위기에 빠진 그대를 그냥 두고 볼수는 없었지. 그래서 구하였는데,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 어설픈 연극을 하게 되었지. 이제… 설명이 되었나?”


그 자의 어처구니 없는 말에… 나도 그녀도 할말을 잃었다. 뭐라고? 연모? 이 개자식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네까짓 북방의 잡종개가 감히 나의 황후를… 그리고 설령 천만보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자. 어째서… 어째서 네놈은 그녀에게 그런 잔혹한 짓을 저지른 것이냐? 어째서 그녀를 아껴주지 않고 그토록 그녀를 잔혹하게 대한 것이더냐!!! 설명해봐!!! 그러나 나의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않았고, 그는 망연자실해 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니… 어서 가라. 해가 뜨면 나도 입장이 난처하고 그대도 도망치기에 어색해진다.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고 하기에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나와서 의심하는 자들이 생길 것이다. 특히나… 황후가 될 그대가 지금 이 시간에 뭔가 나에게 당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야 곤란하지 않은가? 그러니… 시간을 끌면 끌수록 곤란하다. 어서… 돌아가라. 그대의 가족과 고향으로. 오늘 일은 비밀로 묻고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말에 그녀는 어이없어 하더니 잠시 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수는 없다.”


“응? 이미 이유를 말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진심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대에게 호의를 가지고 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 대체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믿을 건가?”


“아니… 나는 그대의 말을 믿는다. 그것이 진심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더 갈수가 없다.”


“어째서? 어째서 갈수없다는 것인가?”


“그건… 나 역시도 그대를 연모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 자와 내가 어처구니 없어져 버렸다. 나는 이제 더 경악스러운 마음으로 뭐라 할말조차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나의 아내여…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그대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소? 그렇게 정해졌고…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데… 일생을 나는 그녀만을 바라보며 살았는데… 지금 그녀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늑대의 개자식을? 그렇게 내가 경악하는 사이… 그 자식도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말을… 나는 늑대다. 잊었는가? 한족인 그대와 다르다. 나는 늑대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의 부친을 죽인 늑대의 일원이고, 한족의 계집을 범하고, 물건을 노략질하며, 함부로 백성들을 죽이는 자다. 그런 나를 연모한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그러나 그의 말에 그녀가 소리치듯이 반박했다.


“오직 그대만이… 나에게 진실을 들려주었다. 내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나는 기억한다. 늑대는 귀인의 피를 땅에 흘리지 않는다고 하였지? 사람들은… 그것이 그대가 지껄이는 내 아버지가 귀인이라 칭할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폄하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대는 의혹을 던진 것이다. 늑대들에게도 존경을 받던 우리 아버지. 그가 귀인의 방식조차 취하지 않고 살해당할리가 없다. 그 풍습은, 귀인의 피가 땅에 흐르면 그 귀신이 돌아와 복수한다는 풍습으로 기인한 것이니.


정상적인 늑대라면, 존경심에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절대로 귀인을 그런 무례한 방식으로 죽이지 않는다. 만약 내 아버지의 목이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것은 내 아버지를 죽인 것이 늑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대는 나에게 알려준 것이다. 내 아버지를 죽인 것은 늑대가 아니라 바로 한족, 석가군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아닌가? 부정할 생각인가?”


그는 말이 없었다. 그것은… 긍정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스스로를 폄하하는 말도 삼가라. 그대는, 그 여자를 범하지 않았다. 그날 그렇게 말했지? 신내림 받은 처녀를 안은 늑대라고?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신내림 받은 처녀를 안는 것은 그대들 늑대의 문화에서는 신령들의 분노를 사는 일. 그렇기에, 늑대의 고위층들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신내림 처녀를 속여서 환처를 하여 안게 하고, 그 저주를 받게 하는 오랜 정적 제거 방식이 있었지? 그대는 나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정적 제거의 함정처럼… 그대도 그대를 괴롭히는 한족 귀족들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그대는… 그 여자를 범하지 않았다. 본국에서 버린 인질이 적국에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말이 되지 않는 것 아닌가?”


그게… 그런 의미였던 거라고? 나는 어처구니 없는 그들만의 이야기에 어이가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자는 왠지 감탄했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사과해야겠군. 내가… 그대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우리는, 서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아는, 서로 닮은 꼴인지도 모르겠군. 혹시나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예상이 맞아버렸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그것이 또 다른 그대가 나를 연모한다는 이유인건가?”


“그래… 그렇다. 그대가 짐작한 그대로다. 역시 우리는 서로 생각이 통하는 모양이군. 내가 그대를 연모하는 것은, 그대가 나에게 진실을 가지고 대하여 진상을 알려준 것에 감사한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대만이… 나의 능력을 이해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한족이다. 우리 한족에게 여자의 지위는 그대들 늑대의 환처들만도 못하다. 남자에게 종속되어 그들의 아이를 낳는 것이 고작인 인생이 유일하게 허락된 삶이지. 한족에서는 여자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정치와 군사에 여자가 발디딜 수 없다.


그래서… 내가 가진 능력도 한족의 세상에서는 의미가 없다. 아니,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직 나의 아버지와 그대만이 내가 가진 능력을 제대로 인지하였고, 내 아버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겪을 여자로서 불필요한 능력에 안타까워한 것과는 달리… 그대는 진심으로 내 능력을 인지하고 제대로 파악하며 감탄을 보내고 있다. 우리가 조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미 나는 그대와 주화파와 제국을 사이에 두고 책략의 대결을 펼치며 그대가 나를 인정하고 대국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내 맞은편에 제국과 주화파의 그림자에 숨어 나를 진지하게 상대하는 존재가 누군지 궁금했지. 왜냐하면, 그쪽은 나를 여자라고 폄하하지 않고 진지하게 같은 상대로 책략을 임하였으니. 나는 그대의 존재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점차 그것이 즐거웠다. 그대와 한수한수 두는 북방의 대국에 그대가 보여준 진지한 태도에 나 역시 진지하게 임했다. 그러면서… 점점 그대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 실체를 깨닭아 갔다. 그러면서… 보고 싶어졌다. 이토록 나를 진지하게 대등한 입장에서 바라봐 주는 존재를…


꼭 만나고 싶었다. 갈망이 들 만큼…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대등하게 인정해주는 그대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서로 놓인 입장이 있어 표현하기에는 무리지만, 그래도 전하고 싶었다. 고맙다고… 그런 마음이 어느샌가 내 안에서 연모가 되었다.”


“그런가… 그래서, 내가 전장에 난입한 상황에서 그리 간단히 떨어져 버린거였군. 그대답지 않게…”


“그래. 석가군을 구하러 간 나를 역습한 자들도 사실은 석가군이 고용한 그들의 병사임을 알고 최후의 순간이라 생각하며 절망하던 차에, 나를 구하러 온 그대를 보고 안심하고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대라면 포로가 되어도 그리 큰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처럼 나를 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역시… 나의 생각이 맞았군. 그대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이렇게라도 확인하게 되어… 진심으로 다행이다.”


그녀가 왠지 눈에 눈물까지 맺혀가며 도저히 믿을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그 자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손떼… 손떼라고!!! 나의 절규와 무관하게 그는 손을 내리지 않았고, 그녀도 손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맞췄다.


“크아아아아악!!! 말도 안돼!!! 이건 꿈이야! 어서 깨어나야… 그 수련족 노파의 악랄한 날조야!!!”


그러나… 꿈은 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서로 오랜시간 서로 연모하던 연인처럼 입맞추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허상의 공간에서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얼굴을 떼며 말했다.


“안타깝군. 그대가 한족이 아니거나, 내가 늑대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을… 어렵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데, 이렇게 헤어져야 하다니.”


그 자의 말에 그녀는 퍼득 정신이 드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망설이고 있었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곳을 떠난다는 사실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서 섬뜩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망설이더니… 그녀는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만약에 헤어지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그런 방법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에 대해 협조해줄 용의가 있는가?”


그녀의 말에 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잠시간의 희망, 그리고 다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그런 방법이 있을리가… 나나 그대나 서로 속한 곳이 다르고 짊어진 것의 무게가 무겁다. 그러니… 그런 방법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잘 납득이 가질 않는데? 서로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대가 나보다 한수 위인 것인가? 나는 도무지 떠올릴수 없는 방법을 생각해내다니. 그런 것이 있다면… 협력하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나 역시… 그대를 이리 보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방식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데?”


“한가지 있다. 그것을 그대가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내가 뛰어나고 그대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처한 입장이 비슷한듯 하지만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대의 말처럼… 우리는 속한 곳이 다르고 서로 짊어진 것이 많다. 그러니, 그것을 간단히 자신의 의지로 외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라면, 적어도 알려지기로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라면, 그것은 의외로 간단히 해결된다. 현재… 대외적으로 알려진 우리의 입장… 그것을 역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망설이다가 결심을 하고 말했다.


“나를 안아라.”


“쿨럭… 그… 그게 무슨…”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결받되어 저항하지 못하는 나를 학대하고 모욕해라.”


“이… 이봐, 유화. 무슨 말을…”


“복수를 천명하며, 그대들의 동족들마저 어처구니 없을 만큼, 나를 짖밟아라. 그러면… 사람들은 납득한다.”


“……”


그녀의 어이없는 말에, 그자는 물론 나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화… 지금 그대 무슨 말을…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늑대의 무리를 이끄는 책임과 의무를 포기할 수 없는 그대와는 달리… 나는 입장이 다르다. 지금 내가 돌아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런 책임과 의무와 나에게 허락된 자유가 아니라…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질식할 것 같은 황가의 법도를 지키며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감금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런 나에게 정해진 운명이 끔찍하게 두렵다. 어쩌면, 그대를 동경한 것도, 그런 궁색한 처지에서도 마음만은 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대의 기상에 반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런 운명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아직 유가군의 사령관이자 북방을 책임지는 책임을 맡고 있다. 그래서, 그 운명은 바라지 않지만, 나는 나에게 연루된 가족과 부하들을 외면하고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 없다. 내가 그 운명에서 달아나면, 그것은 남겨진 자들의 죄가 되어 그들이 고통을 받겠지. 그래서… 나는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달라졌다. 오늘, 그대가 나의 입장을 배려하여 일부러 보는 앞에서 나에게 행한 모진 행동… 그것을 수많은 나의 부하들이 목격하였다.


그것은 절호의 기회이다. 우리가 실제로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세상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저 알려진 그대로 그 모습만을 보란듯이 보여주면 그들은 그것을 납득하고 세상에 널리 말을 전할 것이다. 그대의 복수의 광기에 희생된 가련한 여인으로 사람들은 알게 되겠지?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나의 부하들은 그 사실을 전하며 죄를 추궁당하지 않을 것이고, 나는 그대의 복수의 희생물이라는 이유로 그대의 곁에 위화감 없이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어설프게 해서는 들통난다. 그러니… 적당하게 해서는 안된다. 가능하면 철저하게… 사람들이 절대 의심하지 않도록, 나를 다루어라. 그것이, 우리가 함께 있을 유일한 방법이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유화…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지금… 자신의 의지로 저 자에게 고통당하기를 종용하는 것이더냐? 그런 것이더냐? 네가… 나를… 배신한 것이냐? 이어지는 나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녀의 단호한 말에 그 자는 조용히 다시 그녀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결심을 확인하듯이 물었다.


“납득했다. 하지만… 괜찮은건가? 정말로 괜찮은건가? 그대는… 그런 대우를 받을 여인이 아니다. 겨우 나 같은 자를 위해 그대가 스스로를 그런 나락으로 떨어뜨려도, 정말 괜찮은건가?”


“내 얼굴을 스치는 그대의 손에 온기를… 나는 믿는다. 그대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전해져 오니깐. 나에게는, 금으로 장식된 백성들의 고혈의 탑보다는… 허름한 게르에서 나만을 바라봐주는 그대와 함께 하는 것이 더 행복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 그대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겠다. 이제… 말도 높여야 하겠군요. 저를… 가지십시오. 나의 주인이시여. 유화는 이제부터 당신의 것입니다. 그것은 제 의지로 결정한 제 뜻이오니… 부디 받아주시옵소서. 저를, 당신의 여자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감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고, 그녀는 그것에 저항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 의지로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게르의 안에 촛불이 꺼졌다.


“으아아아아아악!!!!!!”


나는 어둠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이건 말도 안돼. 이럴수는 없어. 어떻게… 어떻게 그녀가… 나를 배신하고 어떻게 그럴수가.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가? 다… 나를 속인 것이었던가? 아니야… 이래서는 안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생을 그대만 보고 살아온 나에게… 그대가 어찌 이럴수가… 그러나, 나는 그 끔찍한 악몽에서 내 의지로 깰수 없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었다. 그것은… 그녀가 단상 위에 묶여 채찍을 맞는 장면이었다.


“으하하하!!! 마흔셋! 마흔넷!!! 아직 멀었어. 정신 차려!!!”


사정없이 그녀를 채찍으로 내리친 그는 의식을 잃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가져갔다. 포로들의 증언에서는 알수 없었던, 그자가 그녀에게 다그치는 듯 하면서 둘만 알아듣게 자그마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만하자. 더는 그대가 위험하다. 이미 과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며 속삭였다.


“안돼… 아직은… 오십대를… 채워주십시오. 주인님… 의식을 잃을… 정도가 아니면…”


“크흑…”


그리고 그는 다시 채찍을 들었고, 요란한 소리와는 달리 주변을 의식하며 되도록 그녀가 아닌 곁에 기둥과 바닥을 치려고 노력하였다. 얼굴은 마치 복수의 환희에 찬듯이 연기하며 웃고 있지만, 그는 초조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장면이 다시 바뀌었을 때, 그녀는 그의 게르에 그의 침상에 엎드려 있었다. 자괴감을 느껴하는 그와는 달리…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도리어 때린 그 자를 위로하고 있었다.


“잘하셨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제가 당신의 손에 떨어졌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좀더… 쎄게 하셨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 정도면 우리의 목적은 달성한 듯 합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눈물을 거두십시오. 나의 주인님… 저를 때리시는 그 마음이 맞은 저보다 더 아픈 것을 제가 압니다. 당신을 가슴아프게 한 저를 용서하세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건가? 내가 그대를 어떤 마음으로 멀리서 바라보았는데… 고대하던 마음으로 지내다, 겨우 다시 만나서 내가 하는 것이 이런 짓이라니… 내 가슴이 아파 견디기 어렵다.”


“네… 하지만 좋게 생각하십시오. 이제는… 서로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맞은 아픔보다는, 이제 원치 않던 운명을 피하고, 나에게 엮인 사람들을 안전하게 면죄부를 주고, 그리고 오래도록 저를 인정해주고 바라봐준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 기쁨만이 가득합니다.”


“그대는 정말… 내가 감히 예단할 존재가 아니군. 등이 찢어질 것처럼 아플텐데… 그런 것이 더 기쁘다니…”


“그러게요. 저도 저 자신에게 놀랐습니다. 확실히… 저는 한족보다는 늑대에 가까운 존재일지도 모르겠군요. 몸은 아팠지만, 마음은 기쁘기 한량없고, 오히려 쾌감 같은 것마저 느껴지더군요. 단순히 언급한 운명을 피하고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이 저를 그토록 다루시는 상황에… 수치심보다는 기쁨이 컸습니다. 제가 그 누구도 감히 논할 수 없는 당신의 소유이고 당신의 감정을 한몸에 받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들뜨게 하더군요. 확실히 저는… 한족의 황후가 되기에는 글러먹은, 늑대에 더 어울리는 계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는… 소리칠 기운 조차 없었다. 그저… 그 현실을 보면서도 부정하는 것만이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일이었다. 야속하게도 그녀의 어처구니 없는 저런 말에도… 장면은 바뀌지 않았다. 내 가슴을 도려내듯이… 그 자가 그녀의 그런 말에 도리어 얼굴을 붉히며 말을 하였다.


“정말이지… 남자들까지 얼굴이 뜨겁게 만드는 그런 말을… 아무래도 왠지 당한 것이 나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야. 그런 은밀한 말은 잠시 그만두지. 앞으로의 일을 잠깐 이야기 해볼까? 이제, 그들의 의심은 사라졌을거야. 그대는… 이곳에 나의 복수의 희생양으로 남게 되겠지. 곧, 유가군 포로는 대부분 석방될 예정이야. 그대에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결국 황제는 군을 돌리지 않았어. 그대로 도성으로 돌아가 버렸지. 결국, 이 전쟁도 이제 종전을 앞두고 있어. 전쟁이 끝나면… 이제 그대와 나의 혼례를 논해야 할 것 같은데.”


“아, 그렇군요. 그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잊었네요. 나의 주인이시여…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부디… 꼭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뭔가? 내 황제가 준비한 것 만큼의 혼례를 해주기에는 워낙 가진 것이 없고 가난하여 어렵지만, 그래도 최대한…”


“아뇨. 제가 바라는 것은 화려한 혼례가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에… 제 몸에 노예의 낙인을 찍어주십시오. 혼례는 필요없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낙인을 찍는 낙형을 집행하는 것으로 혼례를 대신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그와 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어처구니가 없어하며 말했다.


“지금… 대체 나에게 뭘 바라는 것인가? 내가 어떻게 그대에게 그런 짓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가? 우리 늑대는 어지간한 죄를 짓지 않는 한 노예도 낙형은 금지다. 낙형을 처한다는 것은… 그대를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 왜 그런 짓을 스스로…”


“진정하십시오.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환처를 원치 않습니다.”


그녀의 말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늑대의 여자라면 당연히 그대의 일족의 용사들의 씨를 받아 강인한 혈족을 낳을 환처의 의무가 있죠. 제가, 당신의 여자라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의무이고 다른 사람도 아닌 칸인 당신은 그것에 대한 요구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대의 여자가 되어 늑대의 일원이 될지라도… 다른 남자에게 안기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니… 환처를 피할 이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혼례를 치른 주인님의 아내라면 환처를 피할 수 없지만… 낙형을 받은 노예라면 거부할 이유가 됩니다.


늑대들에게 상대의 말과 양을 범하는 것은 죽여도 상관없는 큰 죄였죠? 그러니… 제가 당신의 노예가 된다면, 사람도 아닌 것을 안겠다고 나서는 머저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로지 주인님에게만 안길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한족과는 달리 모친의 신분이 자식의 신분에 영향을 주지 않고 부친의 신분을 따르는 늑대들이라면, 제가 낳을 아이들은 저와 무관하게 주인님의 후계자가 되는 것에 큰 무리가 없을 것이고, 저는 오로지 그대만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바랍니다. 안되나요?”


그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허락이었다. 그의 허락에 기뻐하는 그녀에게 그는 말했다.


“하지만… 대신에 조건이 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그대의 각오…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니, 나도 가만히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겠지. 그대가 다른 이에게 안기지 않기 위해 낙형을 받겠다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행동으로 그대와 함께하겠다. 나는… 풍신의 신랑이 되겠다. 바람의 여신을 섬기며 일생 혼인하지 않고, 방랑하는 사제의 길을 걷겠다. 원래, 나의 생부도 풍신의 신랑이었으니 자격은 충분하다. 여자들과 혼인을 하지 않기에 혈족의 추대로 칸이 되기에는 늑대 내부에서 정치적 입지가 불안하여 세상에 두각이 드러나지 않는 자들이지만… 지금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명분이지.


이미 절반어치의 주전파의 수장이긴 하지만 내 스스로의 힘으로 칸이 된 나는 그것을 선언하여, 내 곁에 여자를 두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그대만을 제외하고는… 그대가 나에게 진심을 보인 것처럼… 나도 그대에게 진심을 보이겠다. 다른 여자를 두지 않겠다. 오직, 그대만이 일생동안 유일한 나의 여자다. 물론, 늑대들의 입장에서 보면 낙형을 받은 그대는 이제 사람조차 아니니, 나는 칸 치고는 괴팍한 독신으로 여겨지고, 그대가 낳을 아이들의 모친은 바람의 여신으로 여겨지겠지만. 어떤가? 나의 생각이…”


“하아… 조금 부담스럽군요. 제가 아들을 반드시 낳아드려야 한다는 거군요.”


“낳지 않아도 상관없다. 현명한 이를 선발해 내 뒤를 잇게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딸이어도 상관없다. 그대를 닮은 딸이라면 분명 그대처럼 사랑스러운 아이가 태어날 것이니.”


그런 그자의 말에 그녀는 아픈 몸을 일으켜 그에게 입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등이 회복되고 난 얼마 후… 그녀는 늑대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손에 목줄이 잡혀 개처럼 끌려가, 다른 짐승들과 같이 몸에 낙인이 찍혔다. 달궈진 낙인이 그녀의 허벅지를 지지며 그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그것은 고통의 비명이 아니었다. 내 눈에는 그것이… 환희의 비명으로 보였다. 그렇게… 그녀는 그의 가축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뭐라 할말 조차 잃은 상태로… 그것을 보며, 그것이 내가 포로로 잡혔던 시기에 있었던 시기임을 알아차렸다. 아, 그래… 바로 그때… 그녀는 포로로 잡힌 나를 구해줬어. 설령… 어떤 이유에서였든, 그녀가 나를 구한 것은 틀림없었어.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나타난 장면에 나는 다시 망연자실해졌다.


“황제가… 그대를 구할 생각이더군. 깊이 파고 들고 있어.”


“네에… 참, 귀찮은 집착이네요. 이미 저 대신에 황후를 맞아들이고 자식까지 본 사람이 이제와서 무슨… 정작 제가 잡혔을때는 황위에 눈이 멀어 군사를 회군할 생각도 하지 않고 남쪽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간 사람이…”


“이대로 있으면 곧 이곳까지 당도할 것이야. 지연전을 펼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아. 그대가 조언한대로 군비를 축소하고 백성들의 부역을 줄인 덕분에 주력으로 활용할 병력이 소수야. 상당히 정예한 내 직속이긴 하지만, 그것을 몇배가 넘는 황제의 군대와 교전시켜 소진시킬 수는 없어. 지금은… 아쉽지만 확보된 영역을 잠시 포기하고 북으로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그대의 뱃속에 우리 아이도 있으니… 어서 그대부터 내 영지로 돌아가 있도록 하면 어떤가?”


그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주인님과 생과 사를 같이 할 것입니다. 아내라면 환처의 대부들과 동행하여 보내도 그만이지만, 저는 당신의 노예입니다. 제가 있을 곳은 안전한 피신처가 아니라 당신의 곁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영역의 포기가 옳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 당신은 제 조언을 받아들여 한족들에게 그들의 생활과 관습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망명을 대거 받아들이셨죠. 그런 이들이 장성 북쪽에 척박한 땅을 개척하여 상당한 세수입을 올리고 있습니다.


늑대들은 도망쳐도 되지만, 그들은 도망칠 수 없습니다. 남겨진 그들은 석가군과 군기빠진 남쪽의 징집병에게 그 동안 이룬 기반을 모두 잃을 것입니다. 주인님이 단지 늑대의 칸이라면 그러셔도 됩니다. 하지만… 주인님은 단순히 늑대의 우두머리가 아닌, 세상의 주인이 되겠다 제게 약속하셨습니다. 제게, 원래 제가 가졌어야 할 위치에 준하는 것을 주시리라 약속하셨죠. 저야, 그저 당신과 함께 있는 것만이 유일한 바람이지만… 남자의 약속은 함부로 깨어져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북방의 제국에 몸을 의탁한 한족의 백성들을 위해… 물러나서는 안됩니다. 아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계속 약화된 유가군을 대신해 북방 배치가 되어, 국경 수비는 뒤로 하고 약탈만 일삼는 석가군의 행태를 보면… 단순히 물러나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가능하다면… 영원성 이남에서 장성 북쪽의 영역을 우리 손에 확보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면… 안정적인 치세가 가능할 겁니다.”


“하아… 그대가 떠나지 않을 것은 짐작했다. 하지만, 무리한 요구를 하는군. 이미 말했듯이 막아내기도 부족한 전력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려 우리가 남진을 해서 영원성의 영역을 확보한단 말인가?”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그에게 안기며 말했다.


“주인님… 제가 한가지 계책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그 계책을 검토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하아… 그대가 그런 사악한 표정을 짓는다는 건… 또 고육계인가? 그만 좀 하지. 나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대를 학대하는 것이 정말로 싫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시기도 아니고 만삭의 상황에서…”


“이번에는… 사람들의 앞에서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단, 한명. 한 사람의 눈앞에서만 하시면 됩니다.”


“그게… 누군가?”


그녀는 조금 요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바로… 황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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