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수현 Sep 11. 2024

북방 이야기 : 백마 1

[소설]북방 이야기

전란의 시대는 고아에게 가혹하다.


특히나 이곳 북방에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아도 수시로 늑대의 약탈에 시달리는 곳에서, 고아가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초원에 내버려져서, 굶다 죽어버리지도 않고, 늑대의 포로가 되어 그들의 약탈에 초병으로 화살받이로 동원되지도 않고 무사히 살아남았으니깐. 사실, 내 출생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그건 정말로 행운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어머니는 어느 집성촌을 이룬 대가족의 귀여움 받는 여식이셨다고 했다. 그러나, 북방에서 밀려오는 늑대를 막기는 커녕 외척과 환관들의 권력다툼에만 정신이 팔린 제국은 북방의 백성을 방치했다. 그래서, 늑대들은 활개치며 마음껏 한족을 수탈했고, 그 피해자에 나의 어머니도 있었다. 아름다웠던 나의 어머니는 늑대들에게 끌려가 윤간당하고 버려졌고, 나를 낳으셨다. 그것도 정상적인 몸도 아닌, 태어날 때부터 한쪽 다리가 불편하게 나는 태어났다. 그런 경우… 태어난 아이는 생을 연명하기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더러운 핏줄인 나도 보듬어 주셨고, 어머니의 일가가 있는 집성촌에서 나는 눈치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족의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름다운 어머니는 눈독들이는 사람이 많았고, 결국 집안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어머니는 집안의 강요도 거부하기 힘드셨다. 재가하신 어머니는 나를 데려가지 못하셨고, 나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이별해야 했다. 그리고 그나마도, 재가하고 2년후에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나는 살길이 막막해졌다.


한동안은 집성촌에서 나를 돌보기는 했지만, 이내 그 시선이 조금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나 집안에 어른들이나 마찬가지로 불편해하던 차에 의외의 제안이 들어왔다. 한동안 집성촌을 떠나 상단에서 일하다가, 최근에는 관직에 오른 어머니의 막냇동생이 우연히 집성촌에 들렸다가 나의 존재를 알게 되고, 같이 가지 않겠냐고 한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좀 두려웠다. 나의 외숙부가 부임한 곳은 장성 이북의 늑대와의 최전방인 영원성이었고, 수시로 교전이 벌어지는 곳이었으니깐.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곳 집성촌에서 먹는 눈치밥보다는 그곳이 낫겠다고 생각했고, 숙부를 따라 그곳으로 떠났다. 나의 외숙부에 대해서 좀 말해보자면… 조금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다소 보수적인 우리 집안의 분위기에서 어떻게 저렇게 자유분방한 인물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의문일 정도로… 머리와 엉덩이가 둘다 가벼운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인성이 글러먹었다는 것은 아니다. 사고방식이 뭐랄까…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좋은게 좋다는 식이어서 어린 나조차도 좀 난감할 정도지만, 그래도 인망을 얻을 만큼 유능하고 좋은 분이셨다.


그는 모든 일에 선입견과 고정관념없이 대하며 이득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때 상단에 있던 시절에는 큰 돈을 벌어들였는데, 그 과정에서 아주 깨끗하게만 장사를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한족이라면 학을 떼는 늑대들도, 그는 가격만 잘쳐준다면 납품을 하는 그런 식으로 장사를 한 모양이다. 그것도… 가죽이나 식량이 아닌 무기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데,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라 욕을 먹을 그의 방식은 의외로 시류에는 적절한 모양이었다.


유연한 처세의 덕인지, 한족과 늑대들 모두가 섭섭치 않게 받아먹은 뇌물 덕분인지, 그는 전란의 시기에도 흔치 않게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자신의 기반을 유지한 사람이었고, 결국 그런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관직까지 제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제국에서 실질 지배를 포기한 장성 이북의 영원성이었고, 사실상 명목상에 가까운 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꽤나 희희낙낙하며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는 그곳을 자신의 방식에 어울리는 곳으로 만들었다.


그곳은 제국도 늑대의 영역도 아닌 애매모호한 중간 지점이 되어 교역과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을 모아들였다. 어이없게도 그곳에는 서로 원수인 한족과 늑대는 물론, 사술을 버린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유랑민족인 수련족과 동여의 상인들도 모여드는 기이한 풍경을 만들었다. 그것도, 영원성 바깥에서는 여전히 늑대와 한족의 소규모 접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말이다. 어쩌면 그런 공간을 만든 분이기에 나 같은 늑대의 피를 이은 존재도 용납이 되시는 건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세상에는 다소 충성이나 지조보다는 실리와 이득만을 생각하여 속물이라 평가받는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그곳의 백성들에게는 좋은 지도자였고, 나에게도 좋은 숙부였다. 나는 숙부를 따라 집성촌을 떠나 영원성으로 왔고, 그곳에서 나의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 그것은 숙모와 사촌 여동생이었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이제 네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거라.”


“아… 당신이 목연 오라버니? 아버님에게 말씀들었습니다. 만나뵈서 반가워요. 초희입니다.”


나는 두 모녀의 복식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여러 개의 겹치마와 주렴 장식이 많은 명백히 기이한 복식의 두 사람은 수련족이었다. 한때, 숙부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과하게 사업에 매달리던 시기가 있었는데,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해 원한을 사서 가족과 자산을 모두 잃고 자신도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절망에 빠진 숙부를 구한 것이 우연히 지나가던 숙모였던 모양이다. 그는 숙모의 도움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일을 무사히 해결하였다고 한다.


마침, 그 일을 발생시킨 과한 욕심을 부린 숙부의 전처도 숙부의 적들에게 살해당한지라, 숙부는 그 일을 마치고 나서 자신을 구해준 숙모에게 청혼하였다고 한다. 확실히… 숙부는 이미 그때부터 수련족이라는 선입견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숙모는 그런 제안을 거절하였고, 그 이유로 자신이 이미 아이가 딸린 과부이고, 딸을 낳으며 난산을 겪어 더는 아이를 낳을 수 없기에 거절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숙부는 그런 숙모에게 상관없다고 말하고, 숙모에게 딸린 딸, 초희도 자신의 딸로 두 모녀를 거둬들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숙부 덕분에 나는 생각치도 못한 가족들도 생겼고, 그 속에서 나는 삶의 평화를 찾았다. 숙모와 초희는 나에게 어머니와 친 여동생처럼 살갑게 대하였고, 숙부도 나를 아들처럼 대해주셨기에, 나는 어머니와 살던 시기보다도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고, 그런 생활을 보장해준 숙부를 친아버지처럼 따랐다. 뭐, 생각해보면 숙부도 나름 계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 연배가 있으시고 후사를 보기 힘든 숙부의 입장에서, 나란 존재는 본인이 가지지 못한 아들의 대신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계산이 깔려서 나를 거두기는 하셨다고 해도, 폄하하기는 힘든 것이 늑대의 혼혈에 다리까지 불편하여 군에 종사하기도 어려운 의지할 곳 없는 아이를 거두는 것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속물스러운 이유가 있어도 그 행동에는 깊이가 있는 숙부의 방식을 싫어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모습을 닮아가며 아들의 역할을 하고자 노력했다. 다행히도, 이렇게 몸이 불편해 경작을 하거나 말을 타고 군에 종사할 수는 없는 몸이지만, 숙부의 비서로서 영원성의 행정을 돕는 일에는 나름 도움이 되었고, 나는 그곳에서 내 일을 찾으며 세상에 기여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나의 평온과는 달리 세상은 여전히 흉흉했다. 늑대들의 남진은 항상 제국과의 마찰을 만들었고, 여기저기서 제국과 벌어지는 국지전에 사람들은 힘겨워 했다. 그리고 그 분쟁은 왠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경작이 어려워 약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늑대는 필연적으로 남진할 수 밖에 없고, 제국은 생활 방식이 다른 그들을 수용할 수 없다. 그런 전제하에서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아수라의 유희처럼 보였고, 사람들은 고통스러워 했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영웅을 기다렸다.


백마 영웅.


오래 전 어느 예언력이 신통한 수련족의 새터니가 고난받는 백성들의 시름을 견디지 못한, 황제의 부탁으로 보았던 전쟁을 종식시킬 영웅의 존재.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땅에 나타나 모든 한족과 늑대들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북방에 항구한 평화를 가져온다는 영웅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은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그 영웅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스스로 자신을 백마 영웅이라 칭한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그 자격에 맞지 않고 몰락해 사라져갔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 영웅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나로 인해 힘겨워하는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그 이야기에 나오는 세상에 혼란을 종식시키는 백마 영웅의 존재는 내 가슴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예언이 아닌 신통한 능력을 가진 수련족의 새터니가 실제로 미래에서 본 사실이라는 것에 가슴이 뛰었다. 항상 모든 소년들이 그렇듯이 나는 세상에 이름을 떨칠 영웅의 존재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자제하기 힘들었다.


그런 나의 위대한 영웅의 동경은 언젠가 반드시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소망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내 생애 반드시 그가 나타나 세상을 구원하기를 고대하고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고, 그런 나의 동경에 대해서 숙부는 조금 핀잔을 주듯이 웃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냐?”


“네,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곳 영원성에서 그가 가져올 항구한 평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흠… 다 좋은데, 그렇게 되면 무기 거래에 대한 관세 수입은 팍 줄겠구나. 오실때 전년도에 미리 알려주면 좋으련만. 연간 예산 잡을 때 반영도 안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부가세 거두는 상황만들면 안되는데.”


“숙부님… 농담이 과하십니다.”


“흠. 확실히 백성들이 들으면 탄핵먹을지도 모르겠구나. 입조심 좀 해야지. 그래도… 생각은 변치않는구나. 항구적인 평화라… 그것이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일까나? 한번도 겪어 본적이 없기에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그것이 걱정스럽구나. 그것을 위해 어쩌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야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지금처럼 찔끔찔끔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말이야.”


“그래도 평화는 이뤄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고 있습니다. 제가 관사의 행정을 도우며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뭔지 아십니까?바로 조문입니다.”


“조문은 이곳이 아니더라도 많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으니깐. 되려 평화의 시기에 죽음은 더 많을 수도 있고… 그리고 나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백마 영웅이 정말 그런 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영웅일까? 그런 범상치 않은 일을 해내는 존재라면… 의외로 사람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보다는 조금 뒤틀려지고 예상치 못한 모습일수도 있지 않을까? 너무 낙관만 가지면 나중에 낭패를 볼수도 있다. 젊은 친구들의 소망을 흐리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매사 과한 기대는 경계하도록 하거라.”


숙부의 말은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그의 성향으로 폄하할 것만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 어느 새터니가 지껄인 망언이라고 치부하며 오랜 시간의 기다림을 보상받지 못하고 분노한 어른들은 많았으니깐.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런 소망을 버리기 힘들었다. 그가 설령 내가 생각하지 못한 괴상한 모습일지라도… 나는 꼭 그를 만나기를 고대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영원성에 어울리지 않는 축제 분위기에 나는 생소함을 느꼈다. 그것은 수련족의 아이들이 16살이 되면 축하하는 그들의 전통적인 축제였다. 그들의 풍습에 따라 진행되는 그 축제 기간에는 여기저기 집집마다 화려한 장식으로 아이들이 무사히 성장한 것을 축하하고, 음식과 선물을 나눠줘서 모두다 즐거워 한다. 그리고, 그 축제는 마지막에 중요한 의례가 있는데, 그것은 수련족의 새터니가 방문하여 아이들을 축복하고 아이들을 통해서 보는 미래를 점춰주는 행사였다.


원래, 신통한 힘을 가졌다는 말을 드는 수련족은 다들 점을 치는 것에 익숙하다. 특히나 수련족의 새터니가 치는 점은 정확한 걸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다들 자신의 미래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하게 되고, 그 결과에 따라 아이들은 희비가 엇갈리는 모양이다. 이렇게 말하면 얼핏 듣기로는 자신의 미래를 미리 알게 된다는 사실이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의외로 또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점이 그렇게 명확하진 않은 모양이다.


수련족이 아닌 나는 경험할 일은 없겠지만, 들어보니 아이들과 하나하나 어두운 공간에서 독대한 새터니는 뭔가 무아지경에 빠진 듯이 아이의 미래를 말해주고, 그것은 조금 불명확한 시와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그리고, 해석은 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 모호한 점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건 자신의 마음이라고 했다. 뭐… 어쩌면 적당히 아이들에게 그들의 연장자가 주는 덕담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름 그들에게는 소중한 의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곳 영원성에서는 그런 그들의 관습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그런 그들의 축제를 관의 입장에서 지원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역시… 미래의 내 낭군님의 이야기를 알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완연히 처녀티가 나서 눈부시게 아름답게 자란 내 여동생은 여느 소녀들과 다름없이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화려한 축제 의상을 입고 들떠하는 초희를 보며 핀잔을 주었다.


“그런 거라면 여쭤보지 말고 네가 직접 보면 되지 않느냐. 너도 수련족의 새터니가 될 후보잖느냐.”


“에이, 그건 또 아니죠. 새터니라고 해도 다 같은 새터니가 아니잖아요. 특히나 저는 왠지 모르게 점을 치는 감은 좀 떨어져서 정말로 새터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요. 그러니 저를 무슨 편리한 미래 예측기 정도로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제 아무리 새터니라고 해도 자기 죽을 날은 알 수 없는 그냥 사람이라고요.”


“하긴… 네 덜렁대는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렇긴 하구나. 어쩌면 오늘 점을 쳐준 새터니님의 눈에 네가 우물에 빠져서 바둥거리는 모습이 나와서 그걸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감해하실지도 모르겠다.”


“아이씨… 오라버니! 그 날의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나는 그렇게 미소지으며 나에게 투닥거리는 초희를 바래다 주었다. 숙부의 집에 기거하면서 찾은 가장 큰 행복이 있다면 바로 이 아이일 것이다. 항상 구김살없이 명랑하게 뛰어다니며 조금 음울한 나와 어울려주는 내 여동생… 이제는 아름답게 자란 이 아이를 오빠로서 보살피는 것은 숙부가 당부하지 않아도 내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말로는 핀잔을 주면서도 나는 오늘 새터니님의 점에서 초희가 들을 미래가 행복한 것이길 바라고, 그것이 정말로 그녀의 낭군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 상대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초희를 바래다 주고 나는 관아의 관원으로서 축제를 감독했다. 특히나 연로하신 새터니 한분이 하루종일 봐야 하는 아이들이 많기에 점을 치는 곳에 사람들을 통제하고 사고가 나지 않게 하는 것은 큰 일이었다. 나는 조금 기력이 쇠하였는지 불편하신 걸음걸이로 아이들을 축복해주기 위해 영원성에 방문하신 새터니님을 곁에서 부축하며 지정된 곳으로 모셨다.


“조심하십시오. 인파가 많아 주위를 살피셔야 합니다. 제 팔을 잡으십시오.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음… 그러지. 고맙네, 젊은이… 자네도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데 이리 늙은이를 신경써주다니.”


새터니님은 나에게 감사를 전하셨고, 나는 그분의 말에 보람을 느끼며 그분을 지정된 장소로 안내했다. 그리고, 하나둘 아이들이 줄을 서서 그분에게 점을 듣기 위해 들어갔고, 나는 멀리서 줄의 가장 뒷편에서 아직도 아침의 일로 조금 뾰루퉁해하는 초희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 아이는 고개를 획하니 돌려버렸지만. 그렇게 축제의 하루가 흘러갔다. 다행히도 무사히 축제는 마무리 되었고, 나는 다른 관원들에게 마지막 행사인 모닥불 앞의 춤추는 백성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하루의 일과가 잘 마무리 되었음을 기뻐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라? 자네는 오늘 나를 도와준 그 관원이군.”


수련족 새터니님이 돌아가시는 길이셨는지 조금 피로한 얼굴로 걸어가시다, 잠시 강변에 앉아 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거셨다.


“아, 다 마치셨습니까?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물을 기거하시는 유랑 막사에 보내두었습니다. 부디 약소하나마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오늘 아이들에게 좋은 말씀을 들려주셔서 영원성을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인데 감사는 무슨… 하지만 자네가 그리 말해주니 마음이 즐겁군. 나 역시도 오늘 자네가 도와준 덕분에 아이들의 미래를 점춰주는 일을 무사히 마쳤어. 항상, 돌이켜 보면 중요한 의례지만 하고 나면 마음이 무거운 일이 많았거든. 그래서 개운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길이 많았는데, 자네 같은 예의바른 젊은이를 보니 올해는 한결 마음이 편하군.”


미래를 본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마도, 의례라고는 해도 그 모호한 결과에 대해 화를 내는 사람들이나 납득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말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한족들에게 다소 배척당하는 수련족의 새터니라는 점에서 사람들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수련족의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모든 한족과 늑대의 아이들도 미래를 다 점춰주셨는데, 하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되려 새터니들을 해꼬지하려는 자들도 있어서, 그 대상이 수련족의 아이들로 제한되었다고 들었다. 어쩌면 미래를 본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는 그분의 상심을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를 보십시오. 아이들이 다들 즐거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도 얼마 차이나지 않는 나이니 아이들이라 하긴 뭐하지만, 전란으로 항상 위급한 이곳 영원성에서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을 다들 만끽하고 있습니다. 새터니님의 점이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리 불길한 것이었다면 다들 저렇게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저 평화로운 모습을 보며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가지십시오.”


나의 그런 말에 새터니님은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하셨다.


“그야… 과거 그런 예언을 하며 해꼬지를 당하고 나서, 그 이후로는 새터니들이 점을 되도록 모호하게 들려준 덕분이겠지. 결국, 점이라는 것도 미래라는 바다에 펼쳐진 일각의 수면 위 풍경과도 같은 것을… 그것이 뭐라고 저리 사람은 흔들리는 걸까?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결정된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전부조차도 아닌 것인데 말이야… 그저 우리가 하는 것은 세상이 들려주는 자그마한 속삭임을 귀띔해주어 다소 삶에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희망을 주고자 할 뿐이야. 결국, 모든 것은 다 그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자신의 삶이자 운명이지. 그래도… 오늘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나를 격려해준 자네 같은 영준한 젊은이를 보니 내 보답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군. 어떤가? 혹시 바라는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새터니가 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해주고 싶네만. 혹시나 보고 싶은 미래가 있나?”


“네? 저를 위해서요? 저는 한족입니다만… 그리고, 딱히 바라는 것은 없는데요. 지금의 삶에 저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보는 것에 부족을 차별하지는 않아. 물론, 들려줄 수 있는 것은 오늘 그들에게 들려준 것과 같은 모호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래도 바란다면 다소간에 의례와는 무관하게 들려줄 수는 있다네. 하지만… 자네가 미래에 대해 더 절실한 소망이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지도 모르겠지.”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문득… 나는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저 너머에 평화로운 축제 장면, 그리고 항상 내가 바라던 삶의 이상… 그것은 이루어 질 수 있는 바람인걸까? 나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혹시… 저는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살아 생전에… 백마 영웅을 볼 수 있을까요?”


나의 질문에, 새터니님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마치시고 그분이 떠나고 나서도 나는 한참동안 그곳에서 머물러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떠들썩한 소리가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나는 그냥 그곳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운명이란… 참 얄궂은 것이다. 그런 것들을 보고 사는 새터니가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사는 것인지… 나는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앉아 있을 수는 없기에 나는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그날따라 평소에도 불편하던 다리가 더 힘겨웠다. 그래서 주춤하려는데 누군가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오라버니…”


초희였다. 나는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하는 그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를 찾아 헤매느라 땀을 뺐는지 상기되어 있었다. 그런 그 아이에게 나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말했다.


“아, 새터니님이 가시는 것을 배웅하고 잠시 앉아 있었다. 이제 막 들어가려던 참이다.”


“아… 그러고 보니 잔치에 상석으로 모셔도 거절하고 돌아가셨지요. 지금 당대 새터니들 중에서 가장 영험하시다는 분인데 좀처럼 자리에 머물지는 않으시니 원… 저 같은 병아리 새터니 견습은 감히 흉내도 못내겠어요. 아무튼, 기별도 주지 않고 돌아가셨는데, 오라버니가 배웅해드렸다니 다행이네요. 어서 가요. 오늘 하루 고생했으니 이제 좀 놀아도 되잖아요?”


나는 왠지 모르게 들뜬 그 아이를 보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왠지 기분이 좋아보이는 구나. 새터니님의 점괘에 우물에 빠져 버둥거리는 모습이 안나온 모양이지?”


“흥… 아직도 그 소리예요? 그만 좀 하라구요. 하지만… 새터니님의 점괘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건 사실이에요. 생각치도 못했어요. 그런 점괘를 들을 수 있을 줄은… 지금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이에요.”


그 아이의 과한 흥분에 나는 조금 기이함을 느끼고 물었다.


“그분이 뭐라고 하셨는데 그러냐? 정말로 바란대로 네 낭군님이라도 점지해주신 것이더냐?”


그러자… 그 아이는 조금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내게 가까이 대고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해주었다.


“네, 맞아요. 새터니님이 그러셨어요. 제 낭군님이 누굴지 점지해 주셨어요. 근데… 그 사실보다는 그게 누군지가 더 중요해요. 새터니님이 말씀하셨어요. 제 운명의 정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생각치도 못한 말을 들려주었다.


“백마 영웅이래요.”


“뭐? 지금 뭐라고?”


“백마 영웅이요. 그 예언에 전해져 오는 백마 영웅이요. 저는 그분과 혼례를 올리게 된데요. 그분이 오셔서 저를 신부로 데려가시려나 봐요. 어때요? 이래도 아직 우물에 빠져 바둥거리는 얘기나 하고 있을꺼예요?”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나는 애써 미소지으며, 해맑게 기뻐하는 여동생에게 말해주었다.


“아아… 그렇구나. 그것 참 큰일이네. 백마영웅께서 신부를 태우시려면 백마가 좀 튼튼해야 겠는걸? 안그러면 백마가 혼례식장에서 신부를 태우려다 힘에 겨워 주저앉는 상황이 터질지도 모르겠구나.”


“으아!!! 정말이지 끝까지 그런 농담만 하고!!! 내가 남자들만큼 키가 크다고는 해도 그런 식으로 계속 놀려먹기에요? 이제 됐어요. 오라버니는 이제 더 상관하지 않을꺼예요.”


그리고 토라져서 내 손을 놓고 돌아가는 초희를 나는 뒤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쫓아갔다.


“농담이다. 그만 토라지거라. 근데 아예 없는 말은 아니잖느냐. 전에 숙부님 밑에 종사관 댁의 노새가 너를 태우고 넘어졌잖느냐?”


“아이 참! 그건 죽기 직전에 늙은 노새였잖아요!!! 정말 오라버니 못됐어.”


나는 내게 등을 보이고 앞서가는 그 아이를 웃으며 붙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미소짓는 얼굴과는 달리 마음속에서는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백마 영웅과 혼인하게 된다라… 그래, 그렇게 되는 거였구나. 나는 내 눈앞에서 토라져 가는 내게 소중한 아이를 보면서, 내게 주어진 미래를 생각하며 그것을 미신으로 치부해야 할지, 아니면 저 아이에게 주어진 미래를 생각하며 믿어 의심치 않아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져야 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백마 영웅을 기다리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내 유년기의 이상은 끝을 맞았고 세월이 흘러갔다.


불안정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항상 남쪽으로 향하는 늑대들과, 북으로 향하는 한족들의 대립은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잠시나마 중간지대로서 소강 상태를 가졌던 영원성도 그런 분쟁의 중심에서 난세를 피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북방의 흉년으로 늑대들의 약탈이 심해지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남진을 천명하게 되어 영원성과 장성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국지전이 더 심화되자… 이제 평화는 기대하기 힘들었고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제국은 병력을 북상시켰고, 늑대들도 질세라 사냥 무리들을 남진하여 교전이 끊이지를 않았다. 영원성에는 아직 직접적인 공성이나 야전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것도 곧 시간 문제인듯 보였다. 그런 어려운 시대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다시 영웅을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한때 잊혀졌던 백마 영웅의 전설을 상기하며 사람들은 그의 도래를 기다렸다. 그가 가져올 항구한 평화를 기다렸다. 나는 그런 그들의 바램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숙부의 행정을 돕는 것만을 우선시 삼았다.


이미 잊어버린 유년기의 이상에 매여있기에는… 너무나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현실이었다. 나는 그것을 하루하루 해결하면서 울부짖는 유족들과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생계를 마련해주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며 나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의 근심은 달래지지 않았고, 사람들은 힘겨우면 힘겨울수록 더 영웅의 도래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런 백성들의 바램을 하늘이 들어주신 듯 한 사람이 나타났다.


“진북장군 공손하? 그 사람이 백마 영웅이라고?”


나는 그 소식을 초희가 가져온 점심 도시락을 먹는 사이에 종사관에게 들었다. 숙부의 밑에서 행정을 보좌하며 문관인 나처럼, 군무를 보좌하는 무관인 종사관은 나이도 나와 비슷하고 직급도 비슷해서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어린시절부터 친했던 덕분에 전에 집안의 노새를 주저앉힌 일도 있지만 그는 웃으며 개의치 않았다. 나와는 친우라고 할만한 사람이지만, 숙부의 눈치를 보는 건지 그는 항상 나에게 존댓말을 했고, 오늘도 그렇게 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 백성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그래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곳 북방으로 발령을 내서 늑대들의 준동을 억제하기를 바라는 청원을 하는 모양입니다.”


“흠… 도성의 조정에서 대 북방 강경파 중에서도 강성인 사람이지. 상당히 무공을 많이 세운 이력이 있어서 적어도 자신의 발언에 대해서 책임을 질 줄은 아는 사람이라던가? 그렇기는 해도 갑자기 왜 그 사람이 부각되는 거지? 아직 우리보다 약간 윗 연배에 젊은 사람이 아니던가. 백성들이 바라는 항구한 평화를 가져오기에는 너무 젊은 사람이 아닐까?”


“뭐… 그건 그렇죠. 하지만, 백성들은 자고로 현실적인 상황보다는 눈에 들어오는 것을 먼저 받아들이기 마련이니깐요. 백성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있더군요. 그의 군대입니다.”


“그의 군대?”


“네, 백마군이라고 불리는 그의 군대. 한족치고는 특이하게 전원 기병대로 구성된 군대에 전면에 최정예들에게는 특별히 선발한 백마 수십여마리가 선봉에 선다는 군요. 그리고, 그 역시도 가장 좋은 백마를 타고 다니고요. 그런 모습을 봤으니 사람들이 그를 백마 영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나는 그의 말에 문득 내 불편한 다리를 내려다 보았다. 말조차 탈 수 없는 몸… 그런 나와는 비교되게 백마를 타고 당당히 전장을 누비는 그의 모습은, 아마도 사람들의 눈에는 확실히 전설 속에 영웅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백마 영웅일지도 모르지. 지금까지 한족들이 늑대에게 연패한 것은 그들의 강력한 기동력을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한족들에게 흔치 않게 기병대를 운영하고, 그 전시 효과를 제대로 활용하는 자라면… 어쩌면 이 전란을 종식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사관은 나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전 16화 북방 이야기 : 절망 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