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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수현 Sep 12. 2024

북방 이야기 : 백마 2

[소설]북방 이야기

“그가 북방으로 온다면 아마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를 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어가던 희망도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구요. 뭐… 후방에 여인들은 좀 슬퍼하겠지만요.”


“응? 다른 건 뭐 그렇다 쳐도… 여인들이 슬퍼하다니 왜?”


“아, 그는 미혼이라고 합니다. 근데, 최근에 무공을 세우고 자신의 무가를 열면서 혼인할 상대를 구한다고 하더라구요. 인물도 워낙에 훤칠한 사람에 무공이 높아 많은 처자들이 그와 혼례하기를 꿈꾼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그가 북방으로 오면 그네들이 눈물지을 수 밖에요.”


‘덜컹…’


순간, 접시를 놓친 것은 도시락통을 가지러 온 초희였다. 그런 그녀의 인기척을 듣고 종사관이 말했다.


“아, 초희구나. 목연 도련님 점심을 챙기느라 네가 늘 수고가 많네.”


“아, 네… 괜찮습니다. 오라버니… 다 드셨으면 통을…”


“어… 그, 그래.”


나는 초희에게 통을 건내주었고, 그 아이는 평소답지 않게 당황하며 통을 받아 나갔다. 종사관은 평소와는 다른 그 아이의 모습에 좀 의아해 했지만… 나는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사람은 초희의 운명의 상대일지도 모른다. 초희는 아직 그 이야기를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 사람이 정말로 백마 영웅이라면, 나는 그 아이의 오라비로서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 걸까? 당연히 운명의 연인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축하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와 함께 다가올 내 운명을 생각하며 애써 그것을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의 바램과는 달리 운명은 마치 하늘의 뜻인 듯 착착 진행되었다. 공손하는 조정의 명을 받아 북방 도독에 임명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추천으로 백성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자신이 자랑하는 백마군을 데리고 영원성으로 오는 그의 존재에 이곳의 사람들도 상당히 흥분한 듯 보였다. 그것은 기대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전란으로 가족을 잃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그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 중에는 나와 내 숙부도 있었다.


“아마도… 직접적인 교전이 벌어지겠지? 이제는… 영원성도 모호한 현 체제의 중립을 유지하기 힘들것이야. 결국, 그는 지원을 요구할 것이고 우리는 더는 도외시 할 수 없겠지. 그것으로 인해 늑대들과 맺은 암묵적인 부전 약정도 휴지조각이 되겠구나. 허망하구나.”


“그래도…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조정도 우리의 방침을 좌시하지 않을테니깐요. 차라리 잘됐습니다. 그가 정말 백마 영웅이라면… 그의 눈에 들어두는 것이 영원성을 위해서 좋은 일일 것입니다.”


“백마 영웅이라… 언젠가부터 그 이름을 네가 입에 올리지 않길래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기대를 품고 었었던거냐? 뭐… 무리는 아니지. 지금 그의 전공에 영원성의 지원이 있다면 정말로 동란의 소강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어쩌면 그 친구가 백마 영웅일지도 모르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북방으로 오고 있으니 마중을 나가도록 해야겠구나.”


“네, 응당 그러셔야죠. 아, 그리고… 가실 때 초희를 데려가십시오.”


“초희를?”


숙부는 나를 보며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상당히 많은 의미를 담은 침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고, 숙부는 잠시 고민하다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래… 무슨 뜻인지 알겠다. 일단은… 네 말대로 하마.”


그렇게 숙부는 초희와 다른 관원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향했다. 이것으로 됐다. 나는 해야 할 소임을 다 했다. 더는 큰 미련이 없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 막연히 기다리던 영웅의 도래에 대해… 예전이었다면 뛸듯이 기뻐하며 그를 보기 위해 달려갔겠지. 하지만, 나는 조금 담담한 기분으로 여동생을 보내고 관사에서 내게 주어진 일에만 몰두했다. 영원성이 기존에 모호한 입장을 포기하고 늑대와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아질 것이다. 나는 주변을 정리하듯 그것에만 몰두했다.


숙부는 돌아와서 담담히 결과를 말해주었다. 예상대로, 공손하는 승천하는 기세를 몰아 늑대들의 소요를 진압하고자 병력을 몰아 북으로 갈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영원성의 지원을 명했고, 숙부는 그것을 수용했다. 전쟁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공손하는 숙부가 소개한 초희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나이는 많아도 직급은 하급자인 숙부에게 절을 하며 초희를 신부로 달라고 청했고, 숙부는 그것을 조금 망설이며 수락했다고 했다. 초희는 자신의 운명일지 모르는 상대를 만난 것에 대해 별다른 말이 없었다.


공손하는 곧바로 출진했다. 그는 영원성으로 입성하지 않고 그대로 군사를 몰아 영원성 이북으로 향했다. 그는, 대승을 거두고 돌아와 영원성에 개선하여 초희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숙부에게 호언장담하고 그대로 기습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북으로 향했다. 그의 그런 발빠른 북상에 사람들은 환호했고, 영원성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백성들이 그의 진로에 나아가 환호하며 그의 출진에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도 동요하지 않고 주변을 정리하듯 내 일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결과가 도착하였다.


참패였다. 공손하의 백마군은 중원에서의 위명을 발휘하지 못했다. 조금은… 예상은 했다. 백마라는 것은 자연계에서는 나오기 힘든 희귀한 종류다. 어둠속에서도 눈에 훤히 들어오는 그런 백마는 중원의 한족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을지 몰라도, 늑대들에게는 야간 기동에 좋은 표적에 불과했다. 그리고, 위풍당당한 외견과는 달리 기동력이나 체력도 좋지 못하고 추위에도 약했던 백마군은 순식간에 늑대들의 공세에 무너졌고, 공손하는 화살세례에 벌집이 되어 시신 조차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고 했다.


결국 그는… 백마 영웅이 아니었다. 그 사실에 사람들은 절망했다. 하지만, 나는 미미한 안도의 마음과 함께 이제부터 벌어질 일에 대해 준비를 해야 했다. 늑대들은… 이번 공손하의 북침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우리 영원성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제국의 조정에서 지원을 기대하긴 무리였다. 외척들의 손에 휘둘리는 황제가 그런 의욕을 발휘할리가 없다. 결국, 우리는 잘못된 선택과 거짓 영웅 덕분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남쪽으로… 피신해야 합니다.”


“하지만… 영원성은...”


“이곳은, 공성에 취약합니다. 그러기에 늑대들도 여태껏 방치한 겁니다. 이제 늑대들이 단단히 벼르는 상황에서 성벽은 여러분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피신해야 합니다. 서둘러 짐을 가볍게 꾸리고 움직이십시오. 영원성을 버리고 장성으로 도망쳐야 합니다. 서두르세요.”


사람들은, 주저하면서도 내 말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다행히도… 나는 혹시나 모를 이런 일을 대비하여 수레와 식량을 준비하고 도로를 정비해 두었기에, 신속한 피신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래도 수많은 난민들과 늑대 궁기병의 속도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였다. 늑대들은 산개해서 도주하는 피난민들을 덥쳐서 북침에 지원한 영원성의 백성들을 도륙했다. 일부이기는 했지만, 그 기습에 다한 사람 중에서 나의 숙부와 숙모도 있었다. 숙부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영원성에 위기를 몰고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열의 가장 마지막에서 사람들을 지휘했고, 숙모는 그런 숙부와 함께 했다. 초희도 동행하려 하였지만 호되게 혼이 나고 대열의 앞으로 보내졌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숙부와 숙모는 늑대들의 기습에 큰 부상을 당했고, 종사관의 분투로 겨우 빠져나올 수가 있었지만, 장성에 인근에 도달하여 나를 만났을때는 이미 가망이 없었다. 나는, 숙부의 손을 잡고 오열하며 말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숙부님… 여기서 쓰러지시면 안됩니다. 일어나십시오. 모든 영원성의 백성들이 숙부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틀렸다. 목연아… 여기 관인과 부절을 받거라. 너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부디… 치우치지 말고, 숙부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도 말거라. 영원성의 백성들을 부탁한다. 그리고… 초희도… 부탁한다. 이제 믿을 건 너밖에 없구나. 부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숙부는 숨을 거뒀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통곡하였다. 불완전한 것이라도 영원성을 다스리며 잠시나마 평화를 가져왔고 백성들에게 좋은 지도자였던 숙부의 죽음은 사람들의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나… 초희는 통곡을 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에게나 그 아이에게나 그분은 친부 이상의 존재셨다. 거기다 모친까지 잃은 초희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시신을 외면하고 나아가야만 했다. 장성으로 향해서…


결국 일부 기습을 받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는 그들을 이끌고 장성에 도달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성의 책임자는 우리의 입성을 거부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한족이 아닌 백성들의 수용을 거부했다.


“이런 무도한 일이 어딨습니까? 다 같은 영원성의 사람들입니다. 제국의 백성들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공손하 장군의 공세를 지원했다가 늑대들의 손에 위기에 처한 이들입니다. 다같이 제국을 위해 싸웠는데 어찌, 한족만을 수용하신단 말이십니까?”


“돌아가라. 진북장군이 늑대들의 손에 죽었는데 그들의 동족을 어찌 장성을 넘게 한단 말이더냐? 한족들이라도 수용해주는 것을 감사히 여기라.”


아무리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영원성의 백성들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족들이라도 우선 피난시키려 하였지만, 그들도 소수를 제외하고는 오랫동안 이웃으로 지낸 이들을 버리고 갈 생각을 못했다. 결국… 모두다 장성에 이르러 노출된 상태로 멀지 않은 곳에 몰려온 늑대들의 손에 도륙될 지경이었다. 나는… 초희를 바라보았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도 않은 내 누이… 숙부는 그 아이를 내게 맡기셨다. 그러니…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아이를 지켜야 했다.


수련족인 그 아이는 장성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장성 밖에서 어떻게든 수를 써야 했다… 그리고, 그 아이 말고도 내게 맡겨진 수많은 영원성의 백성들도… 나는 결국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결심을 해야만 했다.


“종사관… 사람들을 통제하게.”


“대행 태수님.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늑대들에게… 가서, 어떻게든 하는 수 밖에…”


종사관과 초희는 경악하며 나를 말렸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는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발걸음을 돌려 늑대들이 오는 곳으로 홀로 나아갔다.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늑대들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전의를 불태우는 그들의 앞에서 일부러 과장되게 불편한 내 다리를 보이며 절뚝거리며 걸어가, 그들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나에게 물었다.


“지금 무슨 짓거리냐?”


“영원성을 대표하여… 자비를 구합니다. 부디, 초원의 왕자들이시여… 가여운 백성들에게 일말의 자비를 베푸소서…”


“나는 네놈들이 공손하의 북진을 응원한 것을 기억한다. 그런 주제에 감히 살기를 바라더냐?”


그렇게 말한 그는 말에서 내려 조아린 나를 걷어찼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앞에 다시 조아리려 하였으나, 이어진 늑대 병사들의 발길질에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 맞았다. 결국 너덜너덜 해질 무렵… 나는 다시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기어가서 조아리고 말했다.


“부디… 자비를…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는 병신입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공손하의 병력이 위압적이어서 어쩔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학살하신다고 해도, 얻으실 수 있는건 없고 도리어 장성에서 동태를 노리는 제국의 방위군에 역습당하실 겁니다. 차라리, 그보다는 더 먹음직한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비루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나는… 비굴하게 그에게 매달렸다. 수치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영원성의 책임자다.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 어떤 짓도 할 수 있다. 그것이… 숙부가 나에게 관인과 부절을 맡기신 의미일 것이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호소는 그들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 내 한심한 처지에 질렸는지, 아니면 내가 말한 장성의 우회로에 있는 방비가 약한 식량 저장고의 정보가 더 매력적이었는지, 어느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나를 외면하고 떠나갔다. 그리고… 영원성의 백성들은 무사했다.


나는 겨우 나중에 나를 발견하고 오열하는 초희와 종사관의 도움을 받아 수습되었고, 공손하가 일으킨 전쟁은 장성의 일부가 점거되고 후방 보급기지가 거하게 털리는 것으로 제국의 패전으로 종결되었다. 나는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다시 영원성으로 백성들과 돌아왔다. 다행히도 내가 한 짓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나는 기밀을 누설하고도 문책을 당하지 않았고, 별다른 이견없이 숙부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뭐, 따지고 보면 그 누구도 오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북방의 오지이기에 후보가 없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잠시나마 백성들을 설레게 하였던 북방의 백마 영웅의 전설은… 그렇게 허망하게 과거 여러 번 나왔던 가짜 영웅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잊혀져 갔고, 영원성은 다시 불안정한 평화속에서 사람들은 일상을 이어갔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는 숙부와 숙모가 돌아가시고 집에 오로지 초희와 나만 남겨졌다.


“미안하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다.”


나는 그 아이를 공손하에게 보냈던 것을 사과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말에 초희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를 시집 보내려고 아버지와 동행시키신 것이었어요? 오라버니… 대체 왜 그런 짓을… 설마? 예전에 제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점괘 때문에 그러신 건가요? 제가 백마 영웅이랑 혼인한다고 들었던 그 점괘 때문에요? 오라버니… 그걸 그렇게 깊이 생각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리고… 설령 그것이 맞다고 해도 혼인은 당사자의 뜻으로 결정하는 것이지 어찌 하늘이 맘대로 정한다고 따라갑니까? 그건 도리가 아니에요.”


나는 숙부와 숙모의 위패 앞에서 어이없어 하는 그 아이에게 변명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애써 그 아이에게 말했다.


“그래… 나도 이제 더는 백마 영웅을 믿지는 않는다. 그런 편리한 존재가 있다면 세상에 무슨 고민이 있겠느냐? 하지만… 그런 것과 무관하게 너에게 좋은 혼처를 찾아주는 것은 오라비로서 내 의무란다. 그 사람은… 그리 나쁘지 않은 혼처라 생각했다. 결과가 이리 나올 줄 알았다면, 미리 설레발치지 말것을… 지금은 그저 너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더는… 그러지 마세요.”


그 아이는 그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숙부와 숙모의 위패를 보며 잠시 더 서있었다. 그 아이는…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이제 그분들이 돌아가신 이후 내가 저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 숙부는… 그것을 당부하고 돌아가셨다. 백마 영웅… 씁쓸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런 존재가 이 땅에 오고 저 아이의 신랑이 된다면,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다. 지금 눈앞에 위패로 놓인 두분에게 볼낯이 없는 삶을 살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의 말을 씁쓸하게 흘렸다.


하지만 계속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숙부가 나에게 당부한 것은 초희만이 아니었으니깐. 나는 숙부의 유지를 이어 상당히 피해를 입은 영원성을 안정시키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다행히도 다리도 불편하고 아직 어린 내가 태수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반발이 있을 법도 한데, 전란에 익숙한 백성들은 나에 대해 크게 반발하지 않았고 나는 나의 절친인 종사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영원성의 안정을 만들어 갈수 있었다. 그리고 세월은 또 흘렀다.


늑대들의 전쟁은 질리지도 않게 이어졌다. 그들의 본격적인 장성에 대한 파상 공세로 제국은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하지만, 그건 어처구니 없게도 도리어 장성 이북에 늑대들의 영향권 하에 있는 영원성에는 교전의 중심에서 벗어나 큰 피해가 없는 현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영원성의 고요와는 무관하게 북방의 땅에는 백성들의 절규가 넘쳐났고, 조정에서는 지난번 진북장군의 일을 교훈삼아 그를 대신할 다른 북방의 책임자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질리지도 않는가? 공손하로는 부족한건가? 다시 또 새로운 책임자를 백마 영웅으로 기대하다니… 기가 막히는 군.”


나의 푸념에 종사관은 난처해하며 말했다.


“백성들은 항상 구세주의 도래를 기대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의 믿음이라 하기에는 이번에는 그렇게 한심한 사람은 아닌 모양입니다. 장성총관 왕소, 문관이면서도 남방에서 부임하면서 만족들의 준동을 여러 차례 진정시킨 인물입니다. 군인들이 힘으로 새외의 민족들을 억압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유화적인 정책으로 그들을 포용하고 방비를 튼튼하게 하여 진압하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난번 공손하와는 달리 조정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파견한 모양입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좀 다행이겠군. 근데, 그런 존재라면 그렇게 백성들이 열광할만큼 강한 인상을 주진 않을 것 같은데? 그를 전설속에 백마 영웅으로 여기는 이유라도 있는가?”


“아, 네… 있습니다. 그의 경력입니다. 바로 직전 부임지가 남방의 최전방인데 거기서 그는 백마군의 태수로 부임했다고 하더군요. 우연치고는 공교로울 정도죠? 그리고 평도 괜찮은 모양입니다. 돌림병으로 부인을 잃고 3년상을 치르는 모습에 사람들이 많이 감동했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의 관료라면 뒤도 안돌아보고 장례를 마치면 재가하기 마련일텐데…”


나는, 종사관의 말에 조금 가슴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건 결국… 이번에 부임하는 그 사람도 현재 미혼이라는 것인가? 거기에, 요새 관료들 답지 않은 부인의 3년상이라… 적어도 아내에 대한 사랑은 지극한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한 듯 했다. 나는 초희를 떠올렸다. 말은 내 맘대로 혼처를 정하지 말라고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는 하지만, 백마 영웅을 기다리는지 그 아이는 딱히 혼처를 찾지 않고 집에서 기거하며 오라비인 내 살림을 돌봐주고 있다.


언제까지 다리가 불편해 결혼을 기대하기 어려운 오라비에 매여둘 수는 없다. 그 사람이 백성들의 말처럼 백마 영웅이든 아니든…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초희를 보내는 것은 나의 의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전에 공손하의 일이 있었기에 그것을 밖으로 꺼내지는 않고 나는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그러던 차에 왕소 총관은 장성에 부임했고, 그는 부임하자 마자 적극적으로 늑대들의 준동에 방비를 갖추었다. 그런데… 방법이 좀 기이했다.


“둔전이라… 나쁜 방법은 아니지만.”


나는 장성 이남에 그가 만든 거대한 둔전지들의 보고를 들었다. 수많은 백성들과 병사들이 그것에 매달려 경작을 독려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확실히… 나쁜 방법은 아니다. 후방 기지를 북상시켜서 안정적인 보급을 유지시키고 백성들에게 낮은 조세와 경작물에 대한 권리를 대가로 북방 이주를 독려한다. 북방에 백성들이 늘어나면 장성은 긴 보급선을 두지 않고 후방의 지원을 안정적으로 받으며 늑대들과 싸울 수 있게 된다. 확실히, 그것은 초기에 상당히 늑대들의 공세를 격퇴하는 승전보를 올렸다.


장성은 오랜만에 맛본 승리에 환호했고, 둔전의 성과가 나와 물자가 풍부해지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영원성에서도 그런 장성 이남의 경작 성과에 관심을 보이며 영원성을 떠나 장성으로 갈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런 치세를 만든 왕소 총관을 칭송했고, 다들 입을 모아 그가 진짜 평화를 가져온 백마 영웅이라 믿기 시작했다. 그 경과를 보며 나는 딱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을 초희였다.


“백마 영웅이라고 다들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요즘, 제 눈치를 보시며 말수가 없어지신 건…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것 때문인가요?”


초희가 차려준 저녁상을 들다가 물어오는 질문에 좀 당황했다. 나는 그 아이의 눈빛을 보았다. 진지하게 나를 보며 묻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물쩍 넘기거나 둘러대는 대신에… 진심을 말해주었다.


“사실,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니다. 전에 큰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런 점괘와 무관하게 너도 이제 혼기가 꽉찼지 않니? 그래서… 시집을 보낼 사람으로 생각은 했다.


“오라버니…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초희는 당연히 반발하는 투로 말을 꺼내려 하였으나 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이어갔다.


“근데,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은… 조금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구나.”


“네? 어째서요? 저는 당연히 오라버니가 저를 당장이라도 그 분에게 보내시려고 하실 줄 알았는데요. 백마 영웅이라는 평을 듣는 분이잖아요. 근데 왜?”


“조금… 불안한 것이 있다. 예언의 영웅이나, 너의 혼례와는 무관하게… 내가 보는 행정적인 관점에서 우려되는 것이 있어서 그런다. 둔전은… 만능이 아니야. 지금의 성과에 대해서 좀더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집의 대문을 두들겼다. 나는 웃옷을 걸쳐 입고 나가보니 종사관이 다급한 얼굴로 서있었다.


“태수님… 큰일입니다. 장성이 뚫렸습니다. 늑대의 주력들이 남방으로 파고들었다고 합니다.”


“맙소사… 혹시나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근데… 왜 그 사실을 자네가 나에게 알리는 건가? 설마…”


“네. 그 설마입니다. 지금 왕소 총관은 부재입니다. 조정의 사문회에 불려갔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던 부사령관과 고급장교들은… 현재 행방이 오리무중입니다. 그래서, 장성 방비군이 급하게 영원성에 찾아 왔습니다. 지금, 태수님이 북방에서 최고 서열이십니다. 의사결정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빌어먹을…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나는 종사관과 같이 나섰다. 도착한 곳의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예상치 못하게 방비가 느슨한 틈으로 난입한 늑대들은 흩어진 병력들을 도륙하며 넓게 펼쳐진 둔전지들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약탈을 하고 있었다. 장성에서 너무 넓게 산개되어 있고, 지휘부의 행방도 오리무중인 관계로 어쩔줄 몰라하는 병사들에게 보란듯이 풍요롭게 만들어진 경작지들을 마음껏 휩쓸었다. 종사관이 질린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대체… 어쩌다 이런 참사가?”


“둔전 때문이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둔전은 얼핏 보기에는 합리적인 방식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 큰 문제를 안고 있어. 바로 군 행정이 방만해지고, 군인들이 돈맛을 보게 된다는 점이야. 중앙의 보급에 의존하지 않고 현지에 공여된 토지를 기반으로, 이주민들에게 경작지를 불하하고 생산을 하는 방식은 이상적으로 운영되면 좋은 방식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이상적으로 행동할리가 없지 않은가? 군 행정부가 아니라 최전방의 장교들의 손에 행정의 권한이 주어지면, 좋은 토지의 우선 분배와 지인들에 대한 특혜, 그리고 농기구와 소의 대여에 대한 몰아 주기 등의 알게 모르게 짭짤하게 손에 들어오는 방만한 비리의 맛을 그들은 알게 되지.


그들이 군인이 아니고 관료라면 그래도 괜찮아. 관료는 자신의 뒷돈이 되는 행정 자체가 붕괴하게 두진 않으니깐. 하지만, 군인은 다르지. 돈맛을 보게 된 친구들은 당장 눈앞에 적을 막는 일보다는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에 더 관심을 두기 시작하게 될꺼야. 그런 착복의 구조 때문에 비리가 외부에서도 문제가 되니 왕소 총관은 사문회에 소환된거고 상관이 조정에 소환되는 것을 본 장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몫챙긴 돈을 들고 조정의 소환이 오기 전에 도망쳐버린 거지. 그리고… 그 와중에 다소 배분을 많이 못받은 어떤 장교들은 슬그머니 방비를 열어줘서 적보다 더 미운 한몫챙긴 동료들을 유린하길 바란거지.”


“맙소사… 하, 하지만! 남방에서는 먹혔잖습니까? 남방에서는 왕소 총관은 이런 방식으로 그 일대를 평정했다고 들었는데요? 그때는 어떻게 한겁니까? 그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 아닙니까?”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남방과 장성 이북은 적들의 조건이 근본적으로 달라. 남방의 호족들은 이민족이기는 해도 근본적으로 한족과 마찬가지로 토지 기반의 경작을 하는 무리들이야. 그러니, 이런 둔전을 통해 발생된 이익으로 매수와 혹은 회유가 가능하지. 하지만, 늑대는 경작을 하지 않아. 그러니, 그들에게는 이런 둔전을 기반으로 한 물량 싸움에서 경작지를 미끼로 회유하는 것이 불가능해. 그러니, 거기서 나온 풍요는 오로지 장성 주둔군에게 잉여로 남았고, 과하게 집중된 잉여 물자들은 초반에 전선의 싸움을 우위로 만들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돈맛을 본 아군을 타락시켰겠지.”


“맙소사… 어떻게 그런 일이…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왕소 총관은 부재이고 방어선이 어이없이 뚫려서 늑대들이 장성 이남으로 진입하여 활개를 치고, 지휘관들도 전부 사재를 들고 도망친 상태에서 병사들은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넘실대는 곡식들의 파도 위에서 우리에게 보란듯이 활개를 치며 약탈하는 늑대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빌어먹을… 이번에도, 백마 영웅은 오지 않았다. 왕소도 백마 영웅이 아니었다. 그가 만든 이 거짓 평화는 어처구니 없이 늑대들에게 유린당했다. 새터니가 예언한 그 존재가, 그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눈앞에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나를 보며 명령을 기다리는 종사관과 하급장교들과 병사들에게 말했다.


“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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