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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수현 Sep 17. 2024

북방 이야기 : 백마 4

[소설]북방 이야기

“안돼!!! 말을 돌려!!!”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피난민들이 도망친 남쪽에서 한마리 말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탄 것은… 다름 아닌 초희였다. 이 녀석이 정말… 나는 당황하여 소리쳤다.


“안돼, 초희야. 어서 돌아가!!!”


그리고 말머리를 돌려 나는 적진에 쇄도하는 대신 초희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어처구니 없게도 각오를 하고 있던 나와 동행한 병사들은 당황하여 나를 따랐고, 늑대들은 순식간에 우리가 받쳐진 처녀들이 아니라, 매복한 병사들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분노가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필사적으로 초희를 향해 달렸고, 초희도 나를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그 아이와 만나기 전에 말을 모는 것에 서툰 나는 결국 말에서 나뒹굴어 떨어졌고, 초희는 그런 나를 향해 달려와, 나보다 더 익숙한 승마 솜씨로 내 팔을 잡아 자신이 타고 온 말에 잡아 당겨 올렸다. 나는 그 아이의 손에 끌어올려지면서도 소리쳤다.


“젠장할!!! 지금 여기 왜 온거야!!!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면서 너를 구하려고…”


“입닥쳐!!! 오라버니. 이 한심한 남자야!!! 다 집어 치우라고!!! 그까짓 예언이 뭐라고… 그까짓 점괘가 뭐라고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건데? 그렇게 나를 위하면 내가 얼씨구나 좋다고 도망가서 왕자비가 되서 행복하게 잘살줄 알았어요? 그랬어요? 나는 그럴 수 없어요. 죽어도… 그럴수는 없다고요. 빌어먹을, 점괘 조까!!! 난 살꺼야. 오라버니랑 같이 운명이든 뭐든 살아 남을꺼라고!!! 병사들, 다들 나를 따라와!!!”


그리고 초희는 말을 몰아 달려갔다. 낭떠러지로… 그리고 그 미친 행군에 병사들은 뭐에 씌인 듯이 우리를 따라 달렸고, 그것을 보고 분노한 늑대의 대군도 말을 달려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그 아이의 허리를 잡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소리쳤다.


“지금 어쩔려고 그래!!! 눈앞에는 낭떠러지잖아! 말을 돌려! 남쪽으로 돌리라고!!!”


“아오, 시끄러워서 정신 집중이 안되니 좀 닥쳐요!!! 남쪽으로 돌리면? 우리를 밀어버린 늑대들이 한시간도 안되서 피난민들의 뒤를 따라 잡을꺼라고요.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어요.”


“방법이란 게 뭔데? 집단 자살해서 얼이라도 빼놓겠다는 거냐?”


나의 말에 그 아이는 침착하게 앞으로 보며 말했다.


“아뇨… 능력을 사용할꺼예요. 수련족의 새터니가 일생에 단 한번 허락받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힘… 그걸 사용할 꺼예요. 나는 점괘에는 한참 모자란 반푼이지만… 그래도 수련족의 새터니이고,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해서 살아남을 꺼예요. 그러니… 꼭잡기나 하라고요!!! 이 나만큼 반푼이 오빠야!!!”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낭떠러지로 쇄도했고, 말은 허공을 향해 날았으니깐… 그런데 그때였다. 그 아이가 행한 손짓에서 뭔가 빛이 보였다. 그리고… 믿을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말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허공중에서… 마치 그 위에 무엇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말은 발을 내딛었다. 그것은, 우리가 탄 말뿐이 아니라 다른 우리 병사들의 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물론 병사들과 늑대들마저도 그 모습을 어처구니 없이 바라보았다.


허공 중에서 하얀 혼례복을 입은 백명의 기병들… 그 모습을 보며 늑대들은 경악했고, 일부 용감한 늑대들이 우리가 달려간 길을 뒤따라 낭떠러지에 몸을 던졌지만, 그 기적은 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허공중에 보이지 않는 다리를 통해서 무사히 낭떠러지를 너머 건너편으로 도달했고, 그곳은… 기가 막히게도 늑대들의 진의 뒷편이었다. 우리를 닭쫓던 개처럼 바라보던 그들은 배후가 우리에게 노출되었다는 사실에 경악하여 부대를 움직이려 하였지만, 어처구니 없는 우리의 기동을 쫓다가 흐트러진 진형이 그렇게 간단히 수습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원군이 나타났다. 만세!!! 2왕자의 정예다!!!”


병사들이 소리쳤다. 방금전 피난민들이 도망친 남쪽에서 군대가 나타났다. 깃발에서 보여주듯이 그건 우리가 그리 애타게 기다리던 2왕자의 군대였다. 그들은 방금전 우리를 뒤쫓느라 측면을 드러낸 늑대들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안착했다. 2왕자는 제국의 군신답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진격하라!!! 병사들이여 공격하라!!!”


그 명령에 그가 데려온 병사들, 그리고 영원성에서 피난민을 호송하다가 2왕자와 합류하여 되돌아온 병사들이 진격했다. 그리고… 내 곁에 있던 나와 같이 협곡을 건넜던 병사들도 나에게 와서 말했다.


“태수님… 저희도 가겠습니다. 소수지만 배후를 잡은 우리가 더 유리합니다. 태수님은 아가씨와 같이 여기 계십시오. 멀리서 무운을 빌어주십시오. 병사들, 진격하라!!! 중앙군에 부끄럽지 않게 영원성의 의기를 보여주자. 목연 태수님이 보고 계신다.”


“와아아아아!!!”


그렇게… 내 의지와 무관하게 격정적인 교전이 벌어졌다. 나는 멀리서, 여전히 초희의 허리를 붙들고 말 뒤에 타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시야에 그가 들어왔다. 2왕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멀리서 나를 알아보고 군례를 표했고, 나는 그에게 군례로 답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예언은 무산되었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 그를 결국 만났다. 그렇다면… 그 역시도 백마 영웅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어처구니 없는 압승이 확정된 형국을 보며 그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


초원의 밤에 흥겨운 분위기가 흘렀다. 전쟁은 예상 밖의 대승을 거뒀다. 교전을 마치고 나는 2왕자를 정식으로 만났다. 나는 그를 보며 살아서 만난 그가 내가 바라던 사람이 아니란 사실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고귀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나의 표정이 고초의 결과로 보였는지, 이번 사태를 막지 못한 자신의 과실을 사과했고, 나는 그제서야 표정관리를 하며 그를 만류하고 이렇게라도 도와주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점에 감사했다.


예상치 못한 대승은 죽음을 피해 도망치던 영원성의 백성들이나 사지를 향해 출격했다가 의외의 결과를 만난 원정군 둘 모두에게 격한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성으로 돌아와 큰 잔치를 열고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고, 살아난 병사들은 자신의 연인과 가족들과 격한 해후를 하며 춤을 추었다. 나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안타까움을 느꼈다. 작게는 이 영원성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늑대들에게 노골적인 배신을 표명한 영원성은 더 이상 모호한 중립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은 타격을 입혔지만 전열을 정비한 늑대들이 다시 남진하기 전에 영원성의 백성들은 이제 장성 이남으로 이주해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고향처럼 살아온 곳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착찹함을 느꼈다. 숙부가 그토록 일생을 다해 지키려 하셨던 곳인데… 결국 나는 지켜내지 못한 건가? 그리고 크게는 다시 한번 백마 영웅을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2왕자는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내게 깊은 호의를 보내주고 있었고 내가 본 중에는 가장 영웅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와 만났다면 그는 아마도 백마 영웅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알고보니, 그의 부관 중에 몰락한 무가의 여식으로 그의 진중에 있던 여자 장교와 아마도 말은 안하지만 깊은 사이인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또 헛다리를 짚은 모양이었다. 대체… 언제쯤에야 이 땅에는 항구한 평화를 가져올 백마 영웅이 도래하는 걸까? 나는 멀리서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그런데 그때였다.


“오라버니 뭐해요?”


초희가 나타나 내 곁에 앉았다. 솔직히… 나는 조금 그 아이를 보기가 껄끄러웠다. 수련족의 새터니가 정인을 위해 쓴다는 능력을 사용해버린 것은… 세상에서 가장 노골적인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엄청난 걸 받아 놓은 내가 그 아이를 보는 것은 역시 좀 민망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런 나와는 달리 오히려 개운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아이는 나를 보며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아직도, 그 궁상을 떨며 백마 영웅을 기다리고 있어요? 자기 눈으로 일생 볼수 없다는 점괘를 듣고도 말이에요?”


“왜? 그러면 안되니? 나는 일생을 바래왔단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그 영웅의 도래를 말이야.”


내 눈앞에 네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그런 세상이 와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깐. 그런데 그 아이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오라버니… 전에도 얘기했지만, 예언은 그렇게 있는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점괘나 예언이란 사람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들려주는 이야기지, 운명의 족쇄를 채우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요. 자신의 마음에 드는 가장 낙관적인 이야기로 해석하고 그걸로 믿어버리면… 그것으로 가치는 충분해요. 오라버니는, 그걸 너무 직설적으로 이뤄지기를 바라니 그토록 고민하는 거라고요. 그리고… 한번쯤은 발상의 전환을 해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해요. 말에는 함정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에 걸려들면 진의를 깨닭지 못하는 법이죠.


오라버니는, 오라버니가 들은 일생에 오라버니의 눈으로 백마 영웅을 볼일이 없다는 예언과 내가 들은 백마 영웅과 혼례를 올린다는 예언을 조합해서 내 혼례 전에 오라버니의 생이 다하리라 생각했다고 했죠? 나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아요. 나라면 그보다는 더 긍정적인 해석을 할꺼라고요.”


“그래? 그 말에 어디에 긍정적인 해석을 할 여지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물어보자꾸나. 너라면 그걸 어떻게 해석할거냐?”


내 말에… 초희는 어처구니 없는 대답을 했다.


“백마 영웅에 대한 단서는 지금 세가지가 있죠. 항구한 평화, 오라버니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람. 그리고… 나의 신랑. 간단하네요.


보세요. 다들 즐거워 하고 평화롭지 않아요? 오라버니는 난세를 우려하셨지만, 영원성의 백성들은 큰 피해없이 오랫동안 영원성에서 평화롭게 살았어요. 물론 늑대들에게 피해입는 사람들도 좀 있었지만… 그 정도는 평화시기에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그 평화는 누가 만들었죠? 누가… 늑대들의 앞에 가서 홀로 담판을 짓고 그들의 발걸음을 돌리게 하고, 장성의 물자를 태워 비난을 감수하고 전쟁을 종식시켰고, 소수의 병력으로 그들에게 기습을 걸어 전력을 와해시켰죠? 그게 누구죠?”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이 녀석 무슨 말을 하는거야? 설마… 나?


“초희야… 그건 무리한 말이다. 새터니님은 내가 살면서 내 눈으로 백마 영웅을 볼 일은 없다고 하셨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자기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자기 눈으로 봐요?”


“나는 백마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말도 잘 못타는 문관이라고.”


“아뇨, 상관있어요. 네, 오라버니는 말을 못타시죠. 그래서… 오늘 백마리 말에서 오라버니가 탄 말을 제외한 99마리의 말이 늑대들을 향해서 달려갔죠.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을 빼면 흴 백(白)이 되죠. 오늘… 백마가 오라버니의 명을 따라 늑대들을 향해 달렸어요. 설령 그것이 억지라고 해도, 전원이 다 하얀 혼례복을 입고 면사포를 뒤집어 쓰고 달린 그들의 모습은… 틀림없는 백마의 무리로 보였어요. 이걸로도 증거가 부족하신가요?”


나는 그 아이의 말에 점점 더 납득하기 힘들었다. 내가… 다리 병신에 불과한 내가? 내가 백마 영웅이라니… 그건 말도 안된다. 나는 그 마음을 담아 초희의 망상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말했다.


“아니야. 그럴수는 없어. 내가 무슨… 일생을 기다린 그 존재가 나라고? 아니야 그건… 응? 초희야? 읍!!! 으읍!!!”


하지만 말을 더 이어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초희가 내 입을 틀어막듯이 자신의 입술로 내 입술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한참을 떨어지지 않던 그 아이는 숨을 가쁘게 쉬며 입을 떼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가장 명확한 증거. 내가 오라버니를 사랑한다는 것이 당신이 백마 영웅이라는 증거예요. 나, 오라버니를 위해 일생에 한번 허락된 그 능력까지 썼어요. 더 말도 안된다는 식으로 굴면 가만두지 않을꺼예요. 나 점괘를 보는 건 약해도 저주 같은 건 끝내주게 잘거는 편이니깐 더 도망치면 오라버니 가만두지 않을꺼예요.”


“초… 초희야. 대체 너 언제부터…”


질문의 의미는 복잡했다. 하지만 답변은 한가지였다.


“처음 오라버니를 만났던 그 날부터…”


모닥불의 불티가 튀는 소리가 사람들의 흥겨워하는 소리와 섞여 소란스러운 밤에… 나는 왠지 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몇 달후 나는 남쪽으로 향하는 가장 마지막 대열에 합류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오랫동안 정든 영원성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하지만, 명백하게 늑대들과 등을 저버린 우리가 영원성에 남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제국의 군신이라 불리는 2왕자는 한눈에 영원성의 방어 시설을 보고선 무리라는 것을 알고 우리를 되려 설득하였고, 나도 그것에 동의하여 버티는 주민들을 설득하느라 제법 시간이 걸려 버렸다. 하지만, 의외로 내가 내 생각 이상으로 주민들에게 신뢰가 있었는지 주민들은 결국 대부분 성을 버리고 남하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 이주에 대해서 2왕자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조정에 관료들이 저지른 정치 모략으로 영원성이 도륙될뻔 한 것에 깊이 사과하며 우리에게 안전한 거처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였고, 덕분에 우리는 장성 이남으로 이주하여 사라갈 터전을 불하받게 되었다. 조금 어처구니 없게도… 그곳은 나의 외가이자 친가인 어머니의 집성촌의 인근이었다. 내쳐진 고아가 이제는 그들의 수장이 되어 돌아가게 된 것이다. 나는 반발이 심하리라 여겼는데, 의외로 집안에 어른들은 오래전 꼬죄죄한 고아를 기억하고 무시하기 보다는, 제국의 2왕자와 동행하여 남하하는 신임 태수에게 비위를 맞추고 싶어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2왕자의 배려로 그곳에서 새로운 영원성에 준하는 거점을 구축할 소임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뿐이 아니라 장성 일부의 지역을 총괄하는 군사 도독의 임무도 같이 맡게 되었다. 이전에 공손하와 왕소가 실패한 일에 대해서, 2왕자는 내가 임무를 성공해주기를 바랬고, 나는 막중한 책임을 느꼈다. 2왕자는 왠지 모르게 나에 대한 호감을 표하며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농담처럼 언젠가 딸을 낳으면 자기 며느리로 달라는 말까지 하는 정도였다. 소탈하기는 하지만 너무 가벼운 거 아닌가 모르겠다. 제위 서열에서는 멀다고는 해도 우리 집안에서 왕실에 종친이 된다니… 감당하기 힘든 제안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뒤에 남은 것은 없다. 내가 제일 마지막 대열이니. 내 유년기를 보낸 영원성… 언젠가 저 곳을 다시 한족의 손으로 되찾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당분간 그리 쉽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전반부를 보냈던 그곳에 작별 인사를 보냈다. 오래 전 새터니의 예언에 따르면 백마 영웅이 온다는 곳이 바로 영원성이었지? 어쩌면, 그 예언 덕분에 나는 그토록 그곳을 떠날 수 없다가, 이제서야 겨우 발걸음을 뗄 수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초희가 내 곁에 오는 것을 보았다.


“아들이래.”


“아… 다행이네.”


초희는 미소지었다. 오늘 아침 초희는 먼저 출발했다가 갑자기 태기가 온 산모를 돌보고 뒤돌아 합류하는 길이다. 아이의 엄마는 바로 종사관의 부인이었다. 초희는 웃으며 말했다.


“난리도 아니었지 뭐야.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해서 숲속으로 들어가서 천을 두르고 몇시간을 고생해서야 겨우 태어났어. 종사관님도 우시더라구. 대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 되려고 그리 난산으로 태어나는 건지 원…”


“고생이 많았네. 이름은 뭐래?”


“아, 그거? 종사관님 성격 답더라.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숲에서 낳았으니깐, 수풀 림(林)이래.”


“흠… 그러면 유림인가? 유종사관 다운 방식이네. 잘 자라서 나라의 대들보가 되야 할텐데.”


“그보다는… 우리 아이부터 걱정해야 하는거 아니야? 오라버니… 아니, 여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일단은 그렇게 됐다. 나는 초희와 혼인했다. 오랫동안 오누이로 지낸 아이와 결혼을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 다들 손가락질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반응은 정반대였다.


“당연히 태수님 초희 아가씨랑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요? 안그래도 영원성 처자들 중에서 태수님 흠모했던 처녀들도 제법 있었는데, 초희 아가씨가 전부 훼방놔서 말도 못붙이고 마음 접은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네? 몰랐다고요? 우와 짜증나. 우리 마누라도 전에 태수님 좋아했던 거 알고나 계세요.”


유종사관은 투덜거리며 나에게 핀잔을 줬다. 뭐… 나는 몰랐지만 대부분의 영원성 주민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심지어는 일부 사람은 벌써 혼인하고 살고 있는 줄 알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나 뭐라나… 그래서, 나는 어처구니 없는 승리의 영광과 혼례의 축복을 받으며 2왕자를 비롯한 수많은 병사들까지 참여한 혼례를 올리고 그 아이를 아내로 맞이했다. 정말이지 그 아이를 못당하겠다. 수련족 여자들은 다들 저렇게 극성인걸까? 사랑스럽기 그지 없으면서도, 못말리겠다는 것이 내 솔직한 소감이다. 나는 그런 마음에 다가 더불어 결혼 후 영원성 철수로 정신없는 와중에 몸이 못버틸 정도로 밤마다 달려드는 원망을 담아 핀잔을 주었다.


“정말이지… 수련족 여자들은 마성의 여인들이구나. 좀 적당히 해라. 아이가 뭐가 그리 급한거냐? 서로 마음을 확인한 걸로 부족한거니?”


“그래도… 이제 오라버니… 아니 당신도 세상에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몸이잖아요. 자각을 좀 하라구요. 오라버니는 영웅이에요. 오라버니만 모르고 있었지 이미 영원성의 백성들은 세번이나 늑대들의 공세를 막아내고 백성들을 이끈 오라버니가 그 분이길 바래왔다고요. 이제 저와 혼인까지 한 오라버니는 백마 영웅이라고요. 백마 영웅에게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든든한 후사가 필요하다고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2왕자님이 눈독들이고 있는 딸도 있으면 좋구요.”


“그래, 그러고 보니 말난 김에 한번 좀 까놓고 말해보자. 나 이제 다시는 수련족 예언 안믿을꺼다. 특히나 너는 더! 그런 막가파식 해석이 어딨냐? 내 눈으로 나를 볼 수 없다고? 원래 다 예언 해석이 그런 식인거냐? 아니면 너만 그런거냐?”


“에이…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죠. 내가 늘 말했잖아요. 예언이나 점괘는 희망을 주고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지, 사람을 절망시키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애초에 그 말에 우울하게 살았던 오라버니가 성격이 꽁한 거라구요.”


“하이고… 그런 식이면, 야! 백마 영웅도 공손하나 왕소였다고 우겨도 되겠다. 그냥 끼워맞추면 그만이잖아.”


나의 말에 초희는 조금 정색하고 말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백마 영웅의 예언은 틀림없이 오라버니는 가리키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한번 볼까요? 예언의 정확한 원문을?”


그리고 초희는 먼 옛날 그 새터니가 말했던 예언을 다시 말했다.


“전란의 시대에 저 멀리 북방에 영원의 땅에서, 한 영웅이 나타나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세상에 항구한 평화를 가져오리라. 그는 꽃의 이름을 가지고 치욕스런 다리의 상처에 다리를 절며 오로지 백마에 의지하여 세상에 나오지만, 그 누구도 그가 세상에 만든 업적을 그의 것임을 알지 못하리니, 장성의 남북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 영역만이 그의 영광의 증거가 되리라.


보세요. 예언에서도 나오잖아요. 치욕스러운 상처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 백마 영웅이라고요. 오라버니의 이름, 목연… 그건 바로 목련꽃을 의미하잖아요.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불편했던 다리를 장애로 가지고 살았고 수많은 가짜 백마 영웅들이 세상을 판치는 와중에 아무도 모르게 묵묵히 사람들을 지켜서 그 명성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 바로 오라버니가 백마 영웅일 수 밖에 없다고요. 그러니깐, 2왕자로 저렇게 앞으로 오라버니가 만들 장성의 남북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의 영역 확대에 관심을 가지고 오라버니에게 큰 회의를 베푸는 거지요. 딱 들어 맞잖아요.”


나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설레발 치지 말거라. 그냥 다 억지로 나한테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잖느냐? 더구나… 들어보니 원래 백마 영웅은 한족이 아니라 늑대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다면서? 늑대들이 가장 흔하게 이름에 쓰는 단어인 백마, 늑대들의 언어로 쿠타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백마 영웅일지 모른다는 설이 있었다면서.”


“그러고 보니… 그것도 맞아들어가네요. 오라버니, 늑대와의 혼혈이잖아요. 점점 더 맞아떨어지네요. 거기다가, 가장 확실한… 제가 이렇게 오라버니와 결혼했잖아요. 백마 영웅과 결혼하리란 점괘를 들은 제가 말이죠.”


“그것도 너무 앞서갔다고 생각한다. 네가 새터니님에게 들은 점괘는, 수련족의 새터니는 백마 영웅의 생의 시작과 끝을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리라. 였었다면서? 그게 어디가 혼인한다는 말이 있냐? 애초에 수련족의 새터니가 너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꼭 너를 가리킨다는 보장도 없잖아?”


“아니, 오라버니는 좀 알면서 억지로 우기지 말아요. 우리 수련족 혼례에서 ‘시작과 끝을 변함없이 지키리라’가 주례사의 처음인거 몰라요? 그리고 제 아무리 수련족이 세상에 많아도, 제 앞에서 하신 말씀이에요. 저 외에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자면 그건 끝이 없다고요. 그만 포기하고 받아들여요. 나의 백마 영웅…”


정말… 말로는 못당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싫지는 않다. 어찌되었건, 이번 일들을 계기로 나는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있다. 이미 내가 사는 동안 세번의 가짜 백마 영웅이 있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네번째이겠지만… 아무튼 사람들은 나를 그들이 바라는 존재로 여겼다. 상황이 어찌되었건, 그것을 외면하는 건 고향을 잃고 남하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잔인한 일일 것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초희에게 말했다.


“아무튼… 좀 자제하도록 하자꾸나. 영웅이라는 이름은 의외로 순식간에 흙탕물을 뒤집어 쓰기 쉬운 것 아니겠느냐? 공손하와 왕소의 실패를 보면서 나는 겸손할 필요를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그런 미신과는 무관하게 앞으로 내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도 나는 자칫 잘못하면 큰 문제가 생겨날 수도 있는 큰 책임과 권한을 받았잖니. 너도 알다시피 2왕자의 협조로, 이제 나는 나의 지휘를 받는 의용병 조직까지 새로운 거점에서 구축하게 되었다. 말이 의용병이지 사실상 사병에 가깝지. 잘못하면… 일종의 군벌이 되어 되려 조정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낙인찍힐 수도 있을것이야. 그러니… 자중하고 또 자중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조금 결심하고 있었다. 2왕자의 호의에 대한 보답을 위해서라도… 언젠가 힘을 길러 세상에 기여해야 한다. 더 이상, 나약한 문관으로 세상에 환란을 피하는 것이 고작인 삶은 살 수 없다. 이제 내 곁에서 나를 위해 능력을 사용한 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강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제국에 발목을 잡는 조정과 황실을 개혁하는 일에도 적극 나서야겠지. 나는 그 막중한 이르이 무게에 어께가 무거워지고 앞으로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지를 자신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한숨을 쉬자 초희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오라버니는 이전에 가짜들처럼 그렇게 타락하지 않아요. 오라버니는 진짜인걸요. 그러니 자신을 가지세요. 제국을 넘어 천하의 판세를 두고 오라버니의 품에 안으세요. 초희가 항상 곁에 있을 꺼예요. 예언 속에 백마 영웅과 새터니처럼…”


나는 그 아이의 근거없는 낙관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러면서, 문득 생각한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2왕자가 새로운 근거지에 도착하기 전에 알려달라고 하더구나. 새롭게 창설할 의용병 부대의 이름을 말이야. 뭐라고 지으면 좋을까나…”


나의 말에 초희가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백마 영웅이니… 백마군은 어때요?”


“이미 공손하가 써먹었잖느냐. 그리고 더는 그 이름은 세상에 많이 드러내지 말자니깐. 네 말대로 내가 백마 영웅이 맞다면, 세상에 그런 위명은 가급적 나돌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뇌리에서 그 예언이 이미 실현되서 더는 언급하지 않도록 잊혀지게 할 생각이다. 그러니, 그 이름은 더 이상 드러내지 말거라. 그냥… 다른 의용병들의 일반적인 방식처럼, 우리 집안의 가성을 따서 만들면 그만이다.”


나의 말에 초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흠… 그러면, 석가군? 뭐… 무난하니 괜찮네요. 석가군의 초대당주 석목연… 어감이 좋은데요. 가요, 오라버니. 내쫓긴 시절은 잊고 이제 당당히 군의 사령관으로 집성촌에 다시 개선하도록 해요. 이미 젊은 일족의 사람들이 몇일안에 마중나올 테니 그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들어가세요. 백마 영웅 답게 당당하게 말이죠.”


나는 초희의 말에 조금 민망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리 싫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목적지가 있는 남쪽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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