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수현 Sep 13. 2024

북방 이야기 : 백마 3

[소설]북방 이야기

“네… 넷? 지금 뭐라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태우라니요? 무슨… 설마? 저 경작지들을 모두 말입니까?”


“그래. 그렇다. 다 태워라. 작은 불씨면 곧 잘 마른 곡식들이 타올라 큰 불이 될 것이다. 약탈할 것이 사라지고, 도리어 위험해지는 상황이 되면 늑대들은 말머리를 돌릴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하… 하지만, 그래서는 지금까지 이룬 둔전의 성과가 모두 사라집니다. 비축된 물자들이 다 타버린단 말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상당수의 병사들이 아직 저 둔전지에 남아 있을텐데…”


병사들의 절망에 나는 차갑게 대답했다.


“둔전으로 흥했으니 둔전으로 망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가질 수 없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직도 저곳에 남아 있는 병사들이라면, 틀림없이 주머니에 더 챙겨넣지 못해 버둥거리는 바보들이겠지. 어차피… 늑대들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니… 태워라. 저 막대한 물자가 늑대들의 손에 들어가고, 저곳이 늑대들의 거점이 되어버리면… 다 죽는다. 시행하라.”


병사들은 이제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밤, 장성의 이남에 거대한 둔전지는 불길속에 사라졌다. 수많은 아군의 희생자와 늑대들의 퇴각을 대가로… 그리고 나는 체포되었다. 뒤늦게 도성에서 달려온 구원군이 그 참상을 발견하고 나서 경악하고 아군까지 학살한 주범을 찾았고, 병사들은 다들 나를 가리켰다. 나는 변명하지 않고 그들에게 체포되어 호송되고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왕소 총관을 만났다.


“네놈이 감히 내가 만든 북방의 업적을!!!”


그는 나에게 침을 뱉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저지른 일로 인해 그의 사문회는 흐지부지 되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나에 대한 군법재판이 열렸고, 왕소는 가장 격렬하게 나를 비난하는 증인이 되었다. 나는, 딱히 나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서 나를 비난하는 그 자가 정말로 백마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에 묘하게 안도했을 뿐이다. 재판이 끝나고 나에게 내려진 형은 6개월 징역이었다. 북방의 대 늑대 전선의 기반을 날려버렸다는 죄목을 생각하면 놀랄만큼 적은 형기였다.


그건, 평소에 왕소와 사이가 나쁜 황실의 외척들이 그를 견제하기 위해 나를 적극 변호한 탓이 컸다는 것 같다. 평소에는 그렇게 나라의 고질병이라 여겼던 황후의 일가에 도움을 받다니, 정말 어이가 없군. 그렇게, 나는 도성에서 압송되어 형을 살고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아 형기를 마치고 다시 영원 태수로 복귀했다. 영원성은 정말이지 다른 후임을 찾을 수가 없는 부임지인 모양이다. 그렇게 반년만에 다시 돌아온 영원성에서 나를 맞아 준 것은 당연히 초희였다. 그 아이는 오열하며 나를 부둥켜 안았다.


“왜, 오라버니… 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나요. 엉엉엉…”


그 아이는 어린아이처럼 울며 고초를 겪고 돌아온 나를 맞이했고, 나는 애써 그 아이를 달래주었다.


“괜찮다. 그만 울거라. 다 큰 처녀가 이게 무슨 꼴이더냐.”


“오라버니 얼굴리나 신경쓰세요. 얼굴이 반쪽이 되서… 제발 부탁이니…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다시는 초희를 두고 떠나지 마세요. 제발요… 약속해 주세요.”


나는 내 품에 안겨서 오열하는 초희를 보며, 마음 한 편에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이 녀석… 지금 설마 나를? 그런 생각을 하려던 차에 그 아이의 뒤를 이어 종사관과 영원성의 백성들이 달려나와서 돌아온 나를 맞이하여 주었고, 나는 잠시 그 생각을 뒤로 미루고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영원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일상이 이어졌다. 왕소가 백마 영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백성들에게 까맣게 잊혀졌다. 그는 계속 나의 행동을 비난하며 다시 기회를 청했으나, 그런 것과 무관하게 황실 외척들과의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실각했고 실의에 빠져 은퇴했다는 소식만 귀에 들어왔다.


결국, 이번에도 구원자는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이어진다. 여전히 전란은 끊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갔다. 그런 시간속에서 나는 초희에 대한 걱정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이제, 과년하다 할만한 나이다. 하지만, 초희는 좀처럼 시집을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집에서 가사를 돌보며 살고 있다. 나름 그 아이가 들었던 백마 영웅의 이야기와 무관하게 혼처도 여기저기 찾아 봤었다. 특히나, 종사관은 내가 눈독을 들이고 매제가 되길 바랬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런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작년에 종사관도 야속하게 집안에서 정해준 집안의 여자와 결혼하여 허사가 되었다.


나는, 그런 그 아이의 거절이 처음에는 정말로 그 아이가 축제 때 새터니에게 들었던 언젠가 그 아이가 백마 영웅과 결혼한다는 예언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가 정말로 거절하는 이유는 아마도… 나인 모양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촌수로 사촌이니 혈연이어도 결혼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고, 실제로 혈연도 아니다. 그 아이는 우리 집안에 입양되어 들어온 숙모가 전남편과 사이에서 데려온 아이니깐. 그러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는 없었다. 내게 남겨진 숙부의 당부… 그리고, 내 마음속에 여전히 남은 그 날의 점괘… 그것이 나의 마음에 족쇄가 되었다. 나는 그런 마음을 담아 아이에게 물었다.


“또, 맞선을 거절하였더구나. 혼인을… 하지 않을 생각이더냐?”


“제 혼담은 제가 결정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것이 혹시…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기 때문이더냐?”


내 질문에 초희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였다. 아아… 역시 그렇구나. 하지만 나는 사실에 대해 그 어떤 희망적인 답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런 나의 긴 침묵에 그 아이는 먼저 말했다. 진심을 숨기고…


“새터니님이 백마 영웅이 제 혼례 상대라고 하였지 않나요? 언젠가 그분이 오시면 저도 혼례를 하겠지요. 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딱히 다른 곳에 눈을 팔지 않고 그저 오라버니를 돌봐드리는 일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그러면 안되나요?”


“너는… 백마 영웅이 정말 오리라 생각하느냐?”


“저도, 미숙하지만 수련족의 새터니입니다. 세상을 보는 감은 다른 쟁쟁하신 새터니분들과 비교해 하찮지만, 그래도 세상의 소리를 듣는 존재입니다. 믿습니다. 그분이 언젠가 오시리라 믿어요. 그리고, 어쩌면 이미 우리도 모르는 사이 오셨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니… 오라버니는 제 혼담에 대해 더 말하지 말아주세요. 다만, 언젠가 오실 그분과 저의 혼례에 참석하셔서 저를 축복해주시면 됩니다. 더는, 언급하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그 아이는 자리를 피했다. 나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깨닭았다. 아아… 그래,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픈 것은 나 역시도 저 아이를 누이가 아니라 여자로서 좋아하고 있었던 것 때문이구나. 몇번의 동란과 거짓 영웅을 겪으며 나는 겨우 내 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가 절대 맺어지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나의 친절에 감사하며 새터니님이 특별하게 나에게만 봐주신 점괘… 그것을 떠올렸다.


‘네가 네 눈으로 직접 백마 영웅을 보는 일은 네 생에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다.’


그날 나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리고 이어진 그 아이의 예언에 나는 더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 아이가 없는 공간에 대고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초희야… 백마 영웅은 올꺼란다. 나이가 먹어 어린 시절의 꿈을 잃은 듯 굴었지만… 나는 그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 분은 네 신랑으로 반드시 올꺼야. 새터니님의 점괘는 틀리지 않을꺼야. 하지만… 아마도 나는 그것을 볼 수 없을꺼야. 그분의 예언에 따르면 너는 백마 영웅의 신부가 되지만 나는 백마 영웅을 볼 수 없지. 이 두개의 상충되는 점괘가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나는 아마도, 백마 영웅이 이 땅에 오기 전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야. 나는 그 사람이 와서 이 전란의 시대를 종식시키는 것을 바라면서도, 그가 오고 나서 홀로 남겨질 너를 생각하니 슬픔을 숨기기 어렵구나.”


그렇게 나는 홀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홀로 흐느꼈다.


왕소의 북방 전략은 의외로 장기적인 큰 폭풍의 불씨를 만들었다. 이전에는 단순히 흩어진 수십개의 부족으로 각자 산발적으로 제국과 항쟁하던 늑대들이 왕소의 전략 이후 미미하지만 뭉치기 시작했다. 일시적이나마 교전에서 패전하고, 둔전의 물자를 기반으로 한 고립 정책으로 식량의 위기에 처하자, 그들은 오랜 부족들간의 원한을 해소하고 일제히 연대하여 장성을 뚫었고, 그 성과는 내가 지시한 초토작전으로 상당히 무색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자신감을 높여주는 것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이전과는 달리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로 뭉쳐 한족과 대항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나로 뭉쳐진 집단은 국가가 되고 국가는 지도자가 생긴다. 그들은 칸이라 불리는 그들의 대표자를 만들어서 그들 나름의 조직적인 체계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직, 한족의 관점에서 보면 조악하기 그지 없지만 그것은 그들이 이전에 유목을 하며 유랑하던 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역을 가지는 영토 국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영원성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다. 장성의 이북에 위치하여 한족의 방어선 외부에 있는 우리 영원성은 지금까지는 모호한 중립적인 태도와 이민족을 차별하지 않는 방침, 그리고 늑대들 스스로가 영토에 강렬한 욕망이 없다는 점을 통해 유지되었다. 하지만, 늑대들이 뭉치고 서로의 영역을 구분하며 침범하지 않게 되자, 필연적으로 영토는 부족해졌고, 그들은 영원성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눈독들이기 시작하였다. 곧, 그들은 이전과는 달리 이것저것 많은 요구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들어주어라.”


“하지만, 태수님… 늑대들에게 비단이라뇨? 필요도 없는 물건에 대해서 생떼를 쓰는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다… 일단 비단 자체가 영원성에 나지도 않잖습니까?”


“동여의 대상들에게 운송 중 폐기해야 할 것들을 조금 높은 가격을 주면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필수품이 아니라 정치적 우위를 과시하고 싶은 것이라면 물건보다는 우리의 비굴한 태도에 더 만족할 테니 괜찮을꺼다. 시행하게 종사관.”


“태수님… 하지만 이제 더는 버티기 어렵습니다. 이러다가… 설마하니 우리가 내어줄 수 없는 것까지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나는 종사관의 말에 뭐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숙부가 내게 맡기고 떠난 영원성을 돌보는 소임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하루하루 요구의 수위를 높여오는 늑대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마음 고생을 해야했고, 한편으로는 늑대들과 한통속으로 의심하는 조정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런 늑대의 준동은 결국 다시 백성들에게만 고초를 겪게 만들었고, 그들은 다시 한번 도래할 영웅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갈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말에 호응하듯 또다시 백마 영웅으로 여겨지는 인물이 나타났다. 어지간하면 실망할 법도 한데… 이번에는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제국의 군신이라… 그 정도인가? 너무 과장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무공을 보면 그리 녹록한 분이 아님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오랫동안 제국을 괴롭혀온 서강의 만족들을 평정하다니… 공손하나 왕소와 비교할 분은 아니시죠. 그리고 인품도 이전에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래, 들어보긴 했어. 2왕자라고 하셨지? 병약한 태자와 외척들이 들러붙은 3왕자 사이에서 별볼일 없다 여겼는데 신묘한 계책과 지휘력으로 제국에 승리를 가져온 인물이라고 했던가? 대단하긴 하구만. 외가가 역적의 누명을 쓰고 본인의 입지도 흐지부지한 마당에 그런 전공을 발휘하다니…”


“그렇죠? 그분께서 이번에 북방의 형세를 보고 몸소 출정을 하시겠다고 하셨다는군요. 조정에서는 그 일에 대해서 논의가 복잡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건데 그것은 수용될 수 밖에 없는 흐름이고 백성들은 이미 그가 백마 영웅으로 확신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좀더 그가 백마 영웅이지 싶은 확실한 증거도 있습니다.”


“그게 뭔가?”


“그의 호입니다. 호가 백마라고 하더군요.”


이제까지 많이 가짜를 보았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것은 그 존재가 내 죽음과 결부된 것이 도래한 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당히 강성으로 나오고 있는 늑대들의 공세에 지금 어설픈 공격을 가하는 것은 도리어 큰 반발을 발생 시킬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그런 연유로 무시하기에는 그렇게 녹록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의 예고된 미래와는 무관하게, 그 존재가 어쩌면… 초희를 부탁하기에는 가장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는 이유도 한몫 했다.


그런 나의 바램을 들어주는 듯, 시작전에 상당히 미심쩍은 부분을 보였던 다른 백마 영웅의 후보들과는 달리, 그는 진중했다. 적극적인 북방 개진을 주장하면서도 함부로 몸을 움직이려고 하진 않았다. 당장은 그의 그런 행동이 늑대들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그런 자제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능력에 있어서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는 어찌되었건 그런 미묘한 흐름을 주도하면서도 물밑에서는 우리 영원성에 물자와 보급을 알음알음 해주면서 최근에 이따른 실패로 신뢰를 잃은 영원성의 백성들에게 조정과 제국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을 우선시 했다.


적어도… 그런 관점에서 그가 이전의 사람들처럼 현지의 사정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존재는 아니라고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백마 영웅이란 존재와 무관하게 초희를 보내기에는 나쁘지 않은 그림이었다. 나름 알아본 그의 성향을 들어보니 무인이라는 인상과는 달리 온화하고 심지가 굳건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수련족에 대해서도 그리 큰 반감이 없는 사람인 듯 하였다. 한편으로는 태자와 3왕자의 사이에서 외척의 도움이 없는지라 결혼에 대해 적극적으로 떠밀리지도 않고, 그렇게 강한 집안보다는 외척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미미한 사람이 아니면 용납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금씩 그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 그에게서 온 별도의 나에 대한 친서도 그것에 한몫 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제국의 입장에서 늑대와 붙어먹는 사기꾼 취급당하는 나를 제국의 북방에 기여해준 공신이라 말하며 자신과 제국을 위해 그 마음을 변치 말라고 달래고 있었다. 조정에 이 정도로 나를 높게 평해주는 사람이 있던가? 나는 냉소적으로 보려고 했지만 그래도 그런 노고를 다했다는 말에 조금 감격했다는 사실을 숨기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영원성을 대표하여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언질을 보내었다. 그러면서 나는 초희의 눈치를 보았다.


더는 혼례에 대해서 논하지 말라고 만류하며 알게 모르게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그 아이… 그 마음은, 그리 간단히 받아 줄 수 없다. 새터니님의 점괘가 맞다면, 나는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 그런 찰라에 나타난 그 사람에 대해서, 나는 그 아이가 조금 관심을 가져주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지나가듯 말했는데… 의외의 말이 나왔다.


“제가 그리 신통력이 뛰어나지 않은 미숙한 새터니인데… 왠지 문득문득 찰라의 잔상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근데…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분은, 어쩌면… 제 인생에 가장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느낌이요…”


딱, 그 정도의 말이었다. 더는 뭐라 논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면 족하다고 여겼다. 그래…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라고 믿어보자. 다소 시일이 걸리더라도 조급해하지 말고 차분하게 그를 믿고 기다려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그는 나의 서찰을 받고 마음에 들었는지 몇번의 서찰이 더 오고갔고, 그러면서 나는 의지할 곳 없는 그 2왕자에 신뢰 같은 것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였을까? 조정의 기밀 회의에서 그의 북방 출진이 결정되고 그 사실을 나에게 은밀히 알리며 그가 제안한 의견에 대해서 나는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늑대들의 수장을 영원성에 불러들여서 잔치를 열고 환대하고, 그 사이에 2왕자가 자랑하는 그의 빠른 정예 기병을 동원하여 영원성을 포위하여 세력을 일망타진한다고? 과감성이 과한 계책이었다. 그리고… 실패할 가능성도 높고, 무엇보다도 그런 일이 벌어진 다음 실패한다면 영원성은 늑대들의 분노에 살아남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작전은 상당히 무모한 것이고 2왕자 본인도 난색을 표하면서도 조정의 군사 회의에서 최종 결정되었고, 2왕자는 난감해하며 그것을 나에게 협의하며 의견을 구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이것은 거절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한가지 그가 남긴 언질 때문에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일이 잘되면, 내 그대를 높이 사서 무엇이든 바라는 바를 들어주겠네. 원한다면 그대를 우리 황족의 반열에 올린다고 해도 들어주지 못할 것이 없을 만큼 큰 공이니 무리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네. 그러니… 부디 그대가 심사숙고하고 긍정적인 답을 주길 바라네.’


내가 영광의 자리에 오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잘되면 초희를… 초희를 2왕자의 정실로 맞아달라고 할 수 있다. 그 정도의 요구는 2왕자의 정치적 입지를 생각해보면 그리 무리하지 않은 요구가 될 것이다. 나는… 그 사실에 결국 그의 제안을 동의하는 답서를 보내고 말았다. 내 답서를 받은 그는 뛸듯이 기뻐하며 작전을 착착 준비시켰고, 나는 이제서야 오랜 숙원을 해결했다는 기분을 느끼며 마음을 내려놓았다. 내 눈에는… 이미 보였다. 아마도, 그분의 점괘가 맞다면 작전은 성공할 것이다. 늑대들은 영원성에 유인되어 참살될 것이고, 초희는 북상한 2왕자와 혼인을 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 혼례를 보지 못할 것이다.


늑대들을 유인하고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내가 맡아야 한다. 나는 아마도, 진상을 알게 된 늑대들의 손에 무참히 희생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예언은 완성된다. 빌어먹을… 이번에는 정말일지도 모르겠군. 초희도 심상치 않은 말을 했고… 왜일까? 나는 내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게 되었지만 왠지 모르게 담담한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그날 내 운명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부정해왔지만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기다려 왔던건지도 모르겠다. 그 존재가 세상에 나타나는 날을… 설령 내가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바래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야만… 내가 떠난 이후 남겨진 사람들과,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좋은 선물이 될테니깐. 그런 마음을 먹으며 나는 마음의 일각에 남은 미련을 버리고 내 생에 마지막이 될 일을 준비했다. 진행은 착착 준비되었다. 물론, 내가 겪을 운명을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종사관을 비롯한 영원성의 관료들과 군인들은 내 뜻을 따라 북상할 2왕자의 계책에 따라 늑대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준비를 했고, 결국 여러가지 공작을 행한 끝에 늑대들의 수장들에게 영원성이 제국을 떠나 늑대들의 산하에 편입되겠다는 거짓 의사를 전하고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에 발맞추어 우리는 2왕자에게 통보를 보냈고, 2왕자도 은밀히 예하 병력을 이끌고 행군을 시작했다. 거대한 출정식을 하지 않고 기밀리에 이동하는 그의 행보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 가능성이 보인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나는 이번 거사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하늘은 나의 그런 기대를 또 무시해버렸다.


“사절들이… 중도에 돌아가버렸다고? 어째서?”


“내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태수님… 이번에 군사회의에서 늑대들의 수장을 영원성에 유인해서 제거하고 진공하라는 지시 자체가… 2왕자와 사이가 안좋은 3왕자를 지지하는 태후 일파의 음모였던 모양입니다. 작전에 대해서 태후 일파의 밀정이 늑대들에게 낱낱히 고한 모양입니다. 소수의 정예들만 데리고 영원성으로 오던 사절들이 대노하여, 이것을 제국의 선전포고로 여기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마도, 지금 즉시 늑대들은 전 병력을 이끌고 영원성으로 달려올 것입니다. 어서 피해야 합니다.”


“피하라고는 해도… 어디로 피한단 말이냐? 장성의 방어력이 약화된 상태야. 그리고 이번에도 영원성의 주민을 전부 받아들일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고. 그리고… 지난번보다도 늑대들의 공세는 훨씬 빠를꺼야. 이 모든 백성들을 다 어떻게 피신시킨단 말이냐?”


나의 반문에 종사관은 할말을 잃고 말았다. 결국… 또 이번에도 이렇게 되는 건가? 역시 이번에도 나의 바램은 하늘은 들어주지 않을 모양이다. 아니, 이번에는 내 경솔한 행동 덕분에 모든 영원성의 주민들이 도륙을 당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이렇게 하늘은 나와 영원성을 버리는 것인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지키려 노력했는데… 그런데, 그때 종사관이 도착한 전령의 말을 듣고 나에게 급하게 전하였다.


“태수님… 예상 밖의 일입니다. 2왕자께서… 2왕자께서 장성을 넘어 이곳으로 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뭐… 뭐라고? 이미 계략이 간파된 것이 알려지지 않은건가?”


“아닙니다. 이미 그 사실은 2왕자님에게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 틀렸으니 장성을 넘어서는 안된다고 만류하는 보좌관들을 내치고 2왕자께서는 영원성을 구하기 위해 부족한 병력이지만 달려오고 있다고 하십니다. 희망이 생겼습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연히 작전이 실패한 것을 알고 북진을 멈췄으리라 생각한 2왕자가 이곳으로 우리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다고? 내가, 사람을 이번에는 잘못보지 않은 것인가?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한 인물이라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가치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를 구하기 위해 사지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그 사람에게 나는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 불리한 병력이지만, 그가 온다면… 조금은 영원성의 백성들을 피신시킬 수 있다. 중간까지만… 어떻게든 중간까지만 간다면 살수 있다. 나는 서둘러 백성들에게 피난을 명령했다.


전란과 피난에 익숙한 백성들이기에 준비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종사관과 같이 마지막에 남아 백성들을 독려하며 늑대들의 추격을 피해 남쪽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예전에 숙부가 돌아가신 그 도주와 마찬가지로 숨이 찰만큼 정신없이 도망쳐야 했다. 나는 남쪽으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망쳐서 자신들을 해하려 한 우리들에게 분노해 달려오는 늑대들의 공세에서 백성들을 피하게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늑대들의 추격은 너무 빨랐고, 장성보다는 가까울지라도 2왕자의 군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늑대들에게 뒤를 따라잡히고 말았다.


“이제… 어쩌죠?”


종사관은 부들부들 떨며 어마어마한 기세로 우리 뒤에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로 버티고 있는 늑대들을 보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숙부가 돌아가셨던 그 날도… 나는 그들을 막아설 책임을 지고 홀로 늑대들에게 가야 했었지. 그리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나는 홀로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은… 이번에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잡아봤자 의미 없다는 것을 이미 그들도 알고 있겠지. 지난번과는 조금 상황은 다르다. 지척에 이른 늑대의 군대들… 그리고, 저 너머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2왕자의 군대… 조금만… 아주 조금만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렇다면 모두 살릴 수 있다.


나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그들에게 향했고, 그들은 다가오는 나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예전과 다름없이 최대한 비굴하게… 죽일 가치도 없는 하찮은 존재라는 듯한 모습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가서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비를 청했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말했다.


“또… 네놈이냐? 지긋지긋하게도 오래 살아 있구나. 그런 짓을 하고도 목숨은 아까운 모양이지?”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이 천한 목숨 가져가십시오.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르고 감히 살기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다만… 백성들은… 백성들만은 보내주십시오. 백성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 제가 영달을 노리고 저지른 만행입니다. 그러니… 저를 벌하시고 죄없는 백성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래… 그거면 된다. 그러면… 내 소임은 다한다. 백성들은 구원받고, 나는 백마 영웅을 보지 않으리란 예언은 실현된 것이다. 내 목을 들고 간 늑대들을 뒤로 하고, 초희는 2왕자와 혼례를 올리면… 그분의 말은 현실이 될 것이다. 나는, 체념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살기를 바라지 않고 자비를 구했다. 그런데…


“네까짓 놈의 비루한 목숨으로 사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놈이 지금 시간을 끌려고 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어차피 그 제국의 군신이라 불리는 자와의 교전은 우리도 지금 당장은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네놈들에게 그보다는 더 쓸모있는 것을 받아가겠다. 지금, 네놈들은 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대신에 네놈들의 여자 들을 남겨두고 가라.”


뭐라고? 나의 경악과 무관하게 그는 말을 이어갔다.


“정확하게 영원성의 백명의 처녀를 말에 태워 혼례의 차림을 올리고 이곳에 남기고 가라. 그러면… 너희들을 보내주겠다. 일생 자기 여자를 남에게 넘기고 살아남은 치욕속에서 생을 부지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


“그… 그건… 안됩니다. 차라리 저를 죽이시면…”


“필요없다.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 시야에서 백명의 처녀가 남겨져 있지 않은 상태로 한발자국이라도 이동하면, 오늘 영원성의 백성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실행하라.”


그리고 그들은 말머리를 돌려 돌아갔다. 나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나를 기다리는 백성들에게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백성들에게 모두 그 소식을 전하는 대신에, 종사관을 은밀히 불렀다.


“혼례복 1백벌을 준비해라. 아마도… 면사포를 뒤집어 쓰면 얼굴은 잘보이지 않겠지? 특별히… 몸집이 작으면서 말을 잘모는 병사들도 모아라.”


“태… 태수님? 지금 뭘 하시려는? 서… 설마? 기습하실 생각이십니까?”


“다른 도리가 있나? 그럼… 정말로 여자들을 내어주어야 할까? 나는 그럴 수 없네. 그러니… 늑대들을 속여야 하는 수 밖에… 아주 조금만… 아주 조금의 시간만 더 벌면 지척의 거리에 2왕자의 군대가 있을꺼야. 그러니깐… 그러니깐 시간을 끌도록 하지.”


“하… 하지만, 누가 그런 죽음이 확실한 기습을 한단 말입니까? 틀림없이… 다 죽습니다. 그리고 누가 그들을 지휘한단 말입니까?”


“그야 소중한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지. 자기 여인들을 보낼 수 없는 병사들만, 그들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만… 선발해 주게. 그리고… 그들의 지휘는 내가 하네.”


“크흑… 태수님… 그럼 저도 남겠습니다.”


“자네는… 남은 사람들을 이끌어야지. 그리고, 부인의 뱃속에 아이도 이제 얼마 안있으면 태어날 것 아닌가? 아이를 아비없이 크게 할 것인가? 그럴수는 없잖은가.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도 자네에게 부탁을 하지. 초희를 무사히 2왕자에게 데려가주게. 오직 자네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부탁하네… 태수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부탁하네. 제발…”


“태수니임…. 흑흑흑…”


그는 끝내 오열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가져온 혼례복의 면사포를 늑대들의 시야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쓰고 말에 올랐다. 하얀 혼례복을 입은 나와 같은 병사들이 다들 죽음을 각오하고 우울한 눈빛으로… 하지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위해 남았다. 우리가 피난민의 대열에 조금 벗어나 뒤로 나오고, 피난민들은 늑대들의 눈치를 보며 남쪽으로 움직였다. 다행히도, 늑대들은 우리의 행동이 거짓이라 간파하진 못했는지 이동하는 피난민들에게 손을 쓰지 않았다. 나는 떠나는 피난민들을 보며 조금 전 초희와의 마지막 만남을 기억했다.


“안돼요, 오라버니…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말도 제대로 못타시잖아요. 근데 왜 말에 여인들의 혼례복을 입고선… 설마… 남으실 생각인거예요? 안돼요. 안돼요 오라버니. 그러시면 안돼요. 저를 두고 그렇게 마음대로 가시면 안돼요.”


“초희야… 이제 그만 됐다. 오라비가 너를 돌봐주는 것은 여기까지 란다. 이미 알고 있었어. 이렇게 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기억하니? 새터니님이 오셔서 점을 쳐주셨던 그 날… 나 역시 그분께서 점을 쳐주셨단다. 그분께서는 그러셨지. 내가 내 생에 내 눈으로 백마 영웅을 보는 일은 없을꺼라고 하셨단다. 하지만… 너는 백마 영웅과 혼례하게 될 운명이라고 하셨다지? 아마도… 그 예언이 오늘 실현될 모양이다.


네가 백마 영웅과 혼례를 하는데 내가 백마 영웅을 볼 일이 없다면… 그건 아마도 내가 네 혼례가 있기 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이겠지.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구나. 지금 저 너머에 너를 기다리는 2왕자는 아마도 틀림없는 백마 영웅일 것이다. 그는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사지를 향해 달려오고 있어. 적어도… 내 생에 살아온 중에 그는 가장 고결한 영웅에 가까운 사람이다. 아마도, 너와 혼례를 한다면 그것이 더 명확해지겠지.


나의 사랑하는 누이야… 가거라. 그분에게… 가서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거라. 오라비는 이곳에 남아 네가 가는 길을 지키겠다.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지만… 후회는 없단다. 그러니… 부디 오라비는 잊고 가서 그분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거라. 그분이라면 틀림없이 영특하고 재기넘치는 너를 사랑하실 것이다. 이제 이별이구나. 종사관… 초희를 데려가게.”


나는 담담하게 그 아이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왠일인지 슬픔보다는 어이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설마 그 예언 때문에 지금 이러시는 거예요? 그런거예요? 안돼요. 그러시면 안돼요. 오라버니, 예언이란 그렇게 간단히 해석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걸로 생을 포기하는 결정을 함부로 해서는 안돼요. 이거 놔요! 유종사관님. 놓으라고요. 안돼요!!! 오라버니. 가지 마세요. 제 얘기를 들어보세요. 예언은… 예언은 그렇게…”


유종사관은 버둥거리는 그 아이를 억지로 끌고 피난민들과 함께 남하했다. 나는 멀리서 면사포 사이로 보이는 그 아이를 보며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했다. 다행히도 늑대들은 남은 우리가 정말로 처녀들이라고 생각했는지, 우리의 시야에서 피난민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을 허락하듯… 한동안 내버려 두었다. 나는 멀리 피난민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주위를 돌아보았다. 우측의 협곡에 낭떠러지 너머에 멀리 영원성의 모습이 보였다. 지형이 험난해 우회해야 했기에 시간이 걸렸지만 직선 거리로는 이곳을 영원성이 먼곳이 아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수만명의 피난민들이 사라진 자취가 쓸쓸히 남았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늑대들은 얼굴이 벌개져서 그들에게 받쳐진 처녀들을 안을 생각에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자신의 가족과 연인들을 위해 이곳에 남은 자들임을 안다. 나 역시 그렇다. 생에 마지막에 그대들을 끌어들인 것에… 깊이 사과한다. 이것은 모두 다 내 무능함의 탓이니… 원망은 나에게 돌려라.”


“아닙니다. 태수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영원성 주민 그 누구도 태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훗… 최선이라. 제국의 사고뭉치로 반쯤은 늑대와 내통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 나에게 그리 말해주니 감당하기가 힘들구나. 다들… 부끄럽지 않게 가자. 다만 1분이라도 시간을 벌면 그만큼 많은 이웃들이 살아남는다. 가자… 영원성 최후의 의기를 보여주자.”


“넷, 알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혼례복을 벗지 않고 천천히 말을 몰아 마치 그들에게 제물로 받쳐지기 위해서 가려는 듯 말을 몰았다. 한걸음 한걸음… 그들에게 우리는 다가갔다. 그리고 혼례복 안에 숨긴 무기들을 살며시 집어 들었다. 나 역시도… 다리가 불편하여 계속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무기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과연 그들에게 도달하기 전까지 낙마하지 않는 것이 고작이려나? 하지만… 각오는 섰다. 이제 슬슬 거리가 가까워지자 우리의 모습의 기이함을 느낀 늑대들에게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그들이 행동하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나는 소리쳤다.


“전원… 돌격!!!”


그런데 그때였다.

이전 19화 북방 이야기 : 백마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