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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수현 Sep 10. 2024

북방 이야기 : 절망 6

[소설]북방 이야기

나는 머리카락이 쭈볏 솓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뭐라고? 나를? 그리고… 그런 경악과 무관하게… 그날의 기억이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 만삭의 몸으로 가축처럼 바닥에 놓인 그릇에 음식을 먹으며 결박된 그녀… 그건 모두… 나를 속이기 위함이었던가? 그제서야, 나를 비웃으며 내 눈앞에서 그녀를 농락하는 그 자에게… 그녀가 중심을 잃은 척 목에 매달리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좀더 오만한 표정을 지으세요. 그게 더 그를 자극할 것입니다.”


미쳤어… 이건 아니야. 그녀가 그런 말을… 어떻게… 그리고 다시 장면이 이어졌다. 나를 구하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소리치며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 미리 내가 도망치도록 경계를 풀어둔 상태에서 멀리서 나의 도주를 주시하는 그 자의 모습. 내가 멀리 사라지자… 그는 소리치던 그녀에게 말을 달려 다가왔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 어둠속에서 그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다가가, 짐승가죽으로 그녀를 감싸듯이 안아들었다. 내가 보았던 거칠고 무례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신사적이고 상냥한 태도로…


“정말로… 황제가 군을 집결해서 북상할까? 그렇게 간단히?”


“네, 그럴겁니다. 그리고… 석가군은 그 무리한 진군을 적극 지지하겠죠. 이기면 그걸 자신들의 영광으로 돌리고, 지면 약화된 황실에서 자신들에게 손을 내밀수 밖에 없을 테니… 그들은 올겁니다. 필패의 조건이 다 갖추어 졌습니다. 불분명한 전략 목표를 가지고 어디로 언제 오는지 알려진 상대… 이 정도면, 1/10의 병력으로도 승리가 무리는 아닐겁니다. 다만, 서두르지 마시고 전력의 손실을 최소로 하시며 상대하시옵소서. 이 승리를 통해서, 앞으로 10년은 이 땅에 평화가 자리 잡을 것입니다.”


“그래. 그대와 나, 두 사람이 절실히 바라던 일이지. 그대의 뱃속에 우리 아이에게… 너무나 절실한 선물이 될 것이야. 반드시… 이루고 말겠어. 영원하진 않겠지만, 잠시만의 평화라도…”


“모든 영광은 나의 주인에게… 저는 영원성 인근에 먼저 가서 개선을 기다리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그리고… 나는 이어지는 나의 참패의 장면에 눈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영원성의 유가군에 대한 투항 권유. 성문 앞에서 영원성을 포위하고 그녀를 희롱하며 협박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유가군이 항복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가씨!!! 어떻게 이곳에 갑자기… 그리고 동행한 자는… 허억!!! 쿠타이칸?”


“오랜만이다. 나의 제장들이여. 지금, 그대들을 이끌었던 나 유화가 그대들에게 고할 것이 있어 이곳에 왔다. 이곳 영원성에는 나와 나의 주인 두 사람만 들어왔고, 너희가 우리를 어찌하건 그건 너희 자유다. 다만… 나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어다오. 아주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내어 다오. 그것은 이 좁은 전장의 일이 아닌 천하의 일이다.”


그들은 감히 호위도 없이 홀로 잠입한 제국의 철천지 원수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되려 두려움에 찬 표정을 지었고, 그녀의 설득을 경청했다. 그리고 다음날… 성문이 열렸다. 늑대의 병사들은 영원성에 입성하지 않았고, 되려 그 자만이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승리를 선언하고, 그것에 늑대의 병사들과… 영원성의 유가군까지 환호하며 종전을 맞이했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그녀는 아이를 건강히 낳았다. 그리고, 여전히 밖에서 알려지기로는 그의 복수의 희생양으로 알려진 그녀는, 그의 게르 안에서는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아이를 돌보고, 그와 사랑을 나눴다… 나는 그것을, 이제는 더 믿을 수 없다는… 이 모든 것은 다 그 새터니 노파의 거짓이라 믿으며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은 흘러 내게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동여와의 회담을 앞둔 그 시간이 된 것이다. 이번에도… 그녀는 마찬가지였다.


“황제를 도발해서 평화 중재회담을 무산시키고, 동여를 우리 측으로 끌어들인다는 그대의 생각은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힘의 균형은 우리 측의 우위로 기울어지고 있다. 그대가 조언한 국정에 대한 의견은 이 제국을 단순히 늑대의 것이 아닌 모든 백성을 아우르는 모두의 제국으로 성장시켰다. 유가군이 우리의 주력으로 제국과 대치하는 것도 그런 상황의 증명이지. 그런데 굳이 제 3국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끌어들여 고립시켜야 할까?


게다가… 이제 세월도 많이 흘렀다. 황제에게는 황후 말고도 비빈과 궁녀들이 많아. 아직도 그대에게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그를 얕보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대가 나에게는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는 이 세상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지만… 그에게도 그럴지는 알 수 없지 않을까? 그런 상황에서… 굳이 그대를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도발하게 하는 것은 불필요한 행동이라 생각하는데.”


“아뇨 불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저에게 집착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가 만약 제 예상대로 여전히 저에게 집착하고 있다면… 그건 바라던 대로 회담을 무산시키고 동여가 우리 측으로 붙는 결과를 가져 올 테니 우리의 의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저에게 집착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번 회담을 주선한 동여의 재상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르는 척을 하고 있지만… 이미 주인님과 저와 그에 대한 일을 이미 파악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가 당신의 의지로 춤을 추는 것을 본 그는 틀림없이 알게 될 것입니다. 제국과 늑대의 힘을 쉽게 가늠하기 힘들어 주선한 평화회담이지만, 이미 형세로서는 우리가 우위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로 하여금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런 춤을 추게 만드는 당신의 의도와,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황제를 보면서 확신하게 되겠죠. 동여의 국익을 위해 어떤 행보를 해야 할지와…”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미소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국의 황제가 병신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으아아아아아악!!!”


다시 한번… 무의미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에게 닿지 않는, 그런 무의미한 비명을…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행해졌다. 나는 회담을 무산시켰다. 동여는 늑대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최악의 상황으로 끝났다. 회담장에서 그의 품에 짐승가죽에 감싸여 안겨 나오는 그녀는 내게 보여준 눈물을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너무… 한심해서 눈물이 다 나는군요. 차라리 후자였다면 좀 나았을 것을…’


“그대의 재능에 타인을 비하하는 것은 너무한 일이지. 그냥 범용한 자이지 않은가?”


“범용한 자에게… 장성은 필요가 없겠지요. 병력을 남진시키세요. 한족의 장성을 우리 북방의 제국의 것으로 회수할 시간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항구적인 평화가 올 것입니다. 주인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더 이상 그들은 북으로 오지 못할 것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내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던 북방의 평화를 당신께서 이뤄내셨습니다.”


그녀의 미소에 그는 마치 상이라도 내리듯 그녀의 입술에 입맞추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 그대가 한 것이다. 이 평화… 그리고 북방의 새로운 이상의 나라…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다. 이제야… 비로서 우리는 스스로 제국이라 칭할 수 있겠군. 그리고, 그대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자리도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저는… 당신의 것이면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제발… 깨어나기를 바랬다. 이 거짓 밖에 없는 인정할 수 없는 꿈을… 어서 깨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런 바램이 겨우 통한건지… 드디어 마지막 장면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병에 걸려 몸져 누운 쿠타이였다. 게르의 안에서… 그는 홀로 누워서, 곁에는 그녀 만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힘겨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여기까지인 모양이군. 아쉬움은 없다. 그대를 만나서… 너무나 행복한 인생이었다. 그리고 이 광할한 제국에 사람들이 전화에 휘말리지 않고 굶주리지도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내 삶에 보람이 느껴지는 군. 그러니… 이대로 잠들어도 후회는 없다. 다만, 그대와 잠시 떨어지는 것이 안타깝군.”


“저는… 주인님을 홀로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안된다. 그대는 살아야지… 이제 그대의 가르침으로 영특하게 자란 우리 아들이 이 제국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 아이에게… 남아서 가르치고 도와줘야지. 나를 따른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


“당신이… 저 없는 삶이 의미없다고 하셨듯이, 저도 당신이 없는 삶에 의미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아시다시피 저 역시도 병이 회복하기에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고통스럽게 연명하느니… 그대의 곁을 따르겠습니다. 더는, 당신이 없는 이 세상에 여한은 없습니다. 우리 아이에게는… 제가 더 줄 것은 없습니다. 딱 한가지 선물만이 남았는데… 그것이면 그 아이는 충분할 것입니다. 당신처럼, 당당히 이 땅에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는 좋은 지도자로 오랫동안 남을 것 입니다. 그러니… 저는 이만하면 됐습니다. 주인님과 동행하겠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대가 살아주기를 바라오.”


“저는… 그대없이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예전에 제 고집을 들어주셨듯이… 이번에도 곁에서 모시는 걸 허락하소서.”


“사랑하는… 나의… 그대여… 제발…”


그는… 그녀의 얼굴에 마지막 힘을 내서 손으로 스쳤고, 그녀는 그 손을 붙들었다. 그리고… 그의 숨결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통곡하지 않았다.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그의 손을 붙들고 그의 손등에 입맞추고선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곧… 따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제… 끝이다. 그래, 이 지긋지긋한 거짓 꿈도 이제 끝이다. 나는, 이제서야 이 더럽게 말도 안되는 악몽이 끝나리란 사실에 안도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거기… 계시는 분은 폐하십니까?”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이게 무슨… 무슨 일이야? 나는 그녀의 예상치 못한 나를 향한 시선에 놀라 말했다.


“내… 내가 보이는가?”


“아뇨… 보이지 않습니다. 희미한 흐름 같은 것이 있군요.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저… 생각이 전해져 오는 듯이 머리속에 들어올 뿐입니다. 아마도… 수련족의 새터니의 힘을 빌리신 모양이시군요. 언제부터인가, 저를 보는 시선 같은 것을 느꼈죠. 아마도 그건, 제 모계에 과거 수련족의 피가 섞여, 저도 그런 힘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실체를 몰랐는데, 요새들어 왠지 느낌이 강해지더군요. 아마도…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을 훔쳐보시면서, 원래의 시간에 가까워지면서 실체가 분명해지는 모양이군요.”


그녀는… 너무나 담담하게 나에게 말했다.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어이가 없었다. 이것은 거짓 꿈인가? 아니면 진실인가? 나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 먼저 떠오른 건… 분노였다. 나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어째서… 어째서 나를 배신하였느냐? 왜!!!!!! 왜 그랬어!!!!!! 나는 일생을 너를 포기하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어떻게 그대가 감히 나에게 이럴수가 있어!!!”


나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제 일생을 멀리서 훔쳐보기로 하신 겁니까? 너무 한심해서 어처구니가 없군요.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십니까? 왜 제가 이곳에 있는지를? 저는 애초부터, 폐하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오로지 폐하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질로 도성에 끌려와 허울좋은 황후의 후보라는 등의 감투를 씌워주면… 제가 기뻐 날뛰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지엄하신 황상에게 존경과 경의와 애정을 스스로 바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폐하는 제게 금으로 장식된 궁전을 보여주셨지만, 제 눈에는 그것을 위해 고혈이 짜인 백성들이 분노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폐하는 제게 영광된 자리를 주겠다 하셨지만, 제게는 그것은 창살없는 감옥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폐하는 저를 사랑하셨다 말하고 싶으시겠지만, 저는 그래봤자 당신의 수천명의 여자들 중에 하나에 불과했겠죠? 대체, 어느 구석에서 제가 당신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대답해 보시죠.”


“그래서… 그래서 배신한거냐? 동족과 백성과 나라를 배신하고 저 자식에게 붙은거냐?”


“동족? 내 아버지를 죽인 석씨 일당도 저는 구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들은 매복공격으로 화답하더군요. 백성? 이미 제가 부임하던 시절부터 수많은 백성들이 과도한 과세를 견디지 못하고 북방으로 탈주하고 있었습니다. 나라? 저는 제국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위기에 처하자 황위에 눈이 멀어 군을 돌려 구원을 보내지도 않은 나라에 제가 더 뭘해야 합니까? 그리고, 제 나라는 이제 그곳이 아니라 이곳입니다. 저는 제 나라에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을 나의 주인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그를… 매도하지 마십시오. 당신과 비교도 할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불우한 환경에 태어나, 어린 시절 적진에 보내져 고초를 겪고, 장성하여 위기에 처한 동족들을 그 누구의 도움없이 스스로 구원하였으며, 적대하던 자들도 관대히 받아들여 백성으로 삼아, 모든 이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위대한 나라를 건국한 영웅입니다. 그가 세운 나라에서 백성들은 전쟁의 공포와 굶주림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병역은 강제로 부과되지 않았고, 세금은 제국의 1/4도 되지 않았는데, 가난한 이들은 생계보조까지 받았습니다. 왜, 한족의 탈주자들이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폐하는 그와 비교할 가치도 없는 사람입니다. 영광된 자리에 태어나서, 아래를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거짓을 말하는 자를 의심하고 진실을 묻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만으로 국정을 어지럽히고, 연이은 실패에도 권신들을 동원하여 부당함을 지적하는 이들을 압박하며 권좌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니… 남자들은 모두 군대에 끌려가 교전 중 전사자보다 더 많은 부대 내 폭행 사망이 발생하여 죄다 탈영하기 일수였고, 이어진 참패를 수습하기 위해 터무니 없는 세금으로 백성들을 압박하고 목을 조였죠. 영원성이 왜 진상을 알게되자 반 제국의 기치를 세우고 더 격렬히 저항하며 싸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녀가… 나를 매도하고 있다. 그리고… 별 신경쓸 가치도 없는 것들을 가지고 나를 비난하고 있다. 그 까짓 것이 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는 폐하와 비교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의 재능을 알아봐 주고 그것을 경청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입장이나 위치와 무관하게, 순수한 의미로 대등하게 저를 사랑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옷고름을 풀고, 재능을 사용하며, 사랑하는 것… 그 바램을 들어준 사람이었습니다.


일생동안… 그는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오로지 나만을 정인으로 아껴주었고, 제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세상에 이뤄주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기에… 이제 한족의 제국보다 더 강해진 늑대의 제국의 칸이면서도, 이런 낡은 게르에서 넉넉하지 못한 소박한 삶일지라도… 저는 행복했습니다. 그가 저를 위해 들려주는 현악기에 음률에 미소지었고, 그가 저를 위해 직접 서툴지만 한족의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을 먹으며 행복하게 보내었습니다.


폐하는 어떻습니까? 제가 만약 황후가 되었다면… 저를 그리 행복하게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마도… 저는 제 재능을 발휘하는 대신 황실의 규범이라는 명목으로 멍청하기 그지 없는 황실 여자들에게 훈계를 들으며 살았겠죠. 금으로 만들어진 감옥에 갇혀 수를 놓는 것만을 강요받으며… 몇 달에 한번 정도 침소로 찾아오는 폐하를 기다리는 것을 삶의 이유로 삼았을 겁니다. 그리고, 자식을 낳기 위한 씨암닭 취급을 당하면서도 정작 아이들을 안아볼 시간조차 가지지 못했겠죠.


그리고 수천명도 넘는 황궁의 계집들과 무의미한 신경전을 벌이며 고통스러워 했을겁니다. 그것에 분통을 터트려 봤자, 제게 돌아올 것은 투기를 벌였다는 이유로 처벌당하는 것이 고작이었겠죠. 계속해서 계집을 갈아치우는 일에만 열중하는 폐하를 보며, 오로지 자식에게 황위를 물려주기 위해 여자들과 암투를 벌이는 한심하고도 무익한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아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은 멀리서 재밌다는 듯이 지켜봤겠죠? 부정하실 생각입니까?”


“그래서… 그래서 선택한 것이 고작… 늑대의 가축이 되겠다는 것이더냐? 그런거냐?”


“네… 그겁니다. 전혀 후회하지 않는 선택… 제 허벅지에 남은 그가 찍은 낙인이 제가 그의 소유라는 영광스러운 상흔이죠. 폐하는 저를 늑대의 가축이라 매도하지만… 저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저는, 가축이라는 이름이었지만 그의 연인으로 존중받았지만, 그곳에 있었다면 저는, 황후라는 이름으로 가축이 되어 이딴 낙인따위는 웃기지도 않을 고통을 겪으며 살아갔을 겁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저를 매도하십시오. 늑대의 가축이라 비아냥 대십시오. 저는, 그의 소유였던 사실이 당신의 황후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게 생각하니깐요.”


“네가… 네가 어떻게… 그럼 말을… 지고의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가축은, 주인에게만 충실하면 그만입니다. 제가 폐하에게 이제와서 예를 차릴 이유가 더 있나요? 그 모습을 보아하니, 아마도… 일생을 저를 그리워하신 모양이군요. 동여의 회담 이후 폐하의 마음 같은 건 제 안중에 없었기에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다 끝났군요. 저의 주인은 이제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제 건강도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회복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삶에 집착하는 대신, 저를 아껴주신 그분의 곁에 동행하고자 합니다.


이미… 그것을 위한 분묘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늑대의 관습대로라면, 조장이나 풍장으로 하늘로 모심이 마땅하지만… 그래서는 동행하기가 어려우니 분묘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관은 두 사람이 누울 공간을 만들었구요. 아마도… 미래에서 과거를 보고 계실 테니, 지금쯤이면 폐하의 시간에서는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군요.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살아서도 늘 함께였기에, 죽어서도 함께 하고, 저 세상에서도 저는 그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추잡하게 남의 인생을 훔쳐보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겠군요. 부디… 저희들의 영면을 방해하지 마시고, 늘 하시던 대로 남은 여생을 마치시길 바랍니다. 항상 그랬듯이 암군으로서의 삶을 구차하겠지만 부디 남은 시간 잘 연명하시길 바랍니다. 아마도… 그리 오래가진 않겠지만…”


그녀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런 나를 외면하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너를 포기할 것 같더냐!!! 살아서 너를 가질 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너를 가질 것이다. 적어도… 네가 그 늑대 새끼와 같이 평안히 영면하게 내버려두진 않을 것이다. 절대로!!!”


하지만, 그녀는 그런 일갈을 하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내가 머물던 공간이 부숴지기 시작했다.


“나를 돌아봐. 어서 돌아봐!!! 유화!!! 너는 나를 돌아봐야 해!!! 황명이다! 돌아봐!!!”


그것은… 어쩌면 사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나를 돌아보지 않았고, 공간의 균열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멀어져가는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빛이 눈에 들어왔다.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조금전… 향을 태운 길이가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금위군의 병사들은 내가 잠에서 깨자 안도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나의 창백한 얼굴과 덜덜 떠는 손끝을 보며 그들은 당황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련족 새터니 노파… 그녀는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우리 동족들의 목숨에 대한 대가로 턱없이 부족하지만… 폐하께서 본 것이…”


아니야. 말하지마. 안돼… 인정할 수 없어. 그러나… 그녀는 잔혹하게 내뱉었다.


“바로 진실입니다.”


“아니야!!!!!!”


나는, 격노하여 곁에 있는 금위군의 칼을 빼앗아 그녀를 베었다. 그녀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마치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두동강이 나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 망할 목소리를 여전히 귀에 남았다. 나는 그것에 저항하듯 소리쳤다.


“아니야.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그럴수는 없어. 절대로… 그럴수는 없어.”


그러면서 퍼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죽어서도… 죽어서도 함께라고? 내가 그것을 용납할 것 같으냐? 망할!!! 금위군에게 명령한다. 지금 당장, 저 분묘를 파헤쳐라.”


“네? 아니… 갑자기 왜… 크헉!!!”


나는 이견을 표하는 병사를 베어버렸다. 그러자 병사들은 당황하여 물러섰고 나는 피비린내 나는 칼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시행하라. 당장… 저 분묘에서 그 년놈들을 끌어내라. 그래서 서로 천하의 양 끝에 갈갈이 찢어 흩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하리라.”


병사들이 당황하며 서둘러 분묘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독려를 받으며 미친듯이 무덤을 파헤쳤다. 그것을 보며 나는 이를 갈았다. 어서… 어서… 나타나라. 기다릴수가 없다. 잠시라도 그녀가 그 자의 곁에 누워 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다. 나는 병사들을 다그치며 발굴을 독려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지휘관들이 나에게 몰려왔다.


“폐하… 지금 동태가 이상합니다. 늑대들의 병력과 유가군이 기이한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리 깊이 들어온 것이 함정이라도 되는 듯이 후방에서 별동대로 치부하기에 규모가 큰 병력들이 속속 확인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우리를 포위하는 형세입니다. 어서 후방으로 이탈하여 재집결을 명하셔야 합니다.”


“시끄럽다. 지금… 지금은 이 일이 더 중요하다. 이것을 마치지 않고는 아무도 돌아갈 수가 없다.”


“하오나 폐하… 지금 위치가 심하게 좋지 않습니다. 이 분묘가 위치한 이곳은 병법에 사지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적들이 이곳을 노리고 일거 포위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대참사가… 어? 저… 저건?”


그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병사들도 놀라 물러섰다. 어느 병사가 판 삽이 뭔가를 건드렸는지… 분묘에서 엄청난 불길이 솓구쳤다. 저… 저게 뭐야? 그 불길에 병사들은 다들 물러났고, 나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불길을 제압하고 발굴을 재개하라. 물러나는 자는 내가 직접 벨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나의 지시에 신료들이 당황하여 말리며 말했다.


“폐하… 이건 뭔가 이상합니다. 대체 왜 분묘의 안에 인화물질과 기름을 잔뜩… 거기다가 발화장치까지… 마치… 누군가에게 신호라도 하듯이 불길이 일도록? 서, 설마?”


그때였다. 그 불길이 신호라도 되듯이 사방에서 함성소리가 울려퍼졌다.


“저곳이다. 저기 신호가 올랐다. 그분이 유언으로 남기신 신호다. 늑대들의 전사들이여!!! 돌격하라! 오늘, 암군의 목을 베어라.”


그리고, 사방에서 병력들이 쇄도해 들어왔다. 지휘관들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맙소사… 역시 함정이었어. 폐하 어서, 퇴각을… 놈들이 노리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폐하의 목입니다.”


나는, 그때 그녀가 지나가듯이 한 말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우리 아이에게는… 제가 더 줄 것은 없습니다. 딱 한가지 선물만이 남았는데… 그것이면 그 아이는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휘관이 격하게 소리쳤다.


“폐하, 어서 물러나소서. 옥체를 보전하셔야 합니다.”


그때… 내 눈에는 보였다. 저 너머 분묘의 불길 속에서… 그들이 보였다. 그들은… 그 새터니 년이 보여준 악몽속의 모습처럼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다른 것은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당장… 저 년놈들을 떨어뜨리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다. 나는 소리쳤다.


“들어가서 저 년놈들을 끌어내라. 어서!!!”


그러나… 그 명령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금위군은 이제 고개를 저으며 열조차 맞추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했고, 신료들도 질렸다는 표정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주변에 칼을 휘둘렀지만… 다들 그것을 피하려고 할 뿐 아무도 베지 못했다. 그래… 어차피 다 쓸모없는 놈들이다. 결국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나는 칼을 들고 눈앞에 불길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 뒤에서 몇몇 사람들을 베어버리고 나는 듯이 달려와 소리쳤다.


“황제인가? 어머니의 말씀이 맞았군. 감사합니다, 어머니… 아버님과 어머님의 시신을 미끼로 삼아 소자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신 은혜… 돌아가신 이후에도 변치 않고 벌여주신 고육계를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이것으로 앞으로 제국을 다스리는 제 정치적 입지는 확고해 지겠군요. 황제, 네 놈은 내가 직접 벨 것이다. 더는 달아날 곳은… 어? 어어어!!! 이봐!!! 거기서!!!”


나는,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건 전혀 의미가 없다. 뭘하고 싶든 네 맘대로 해라.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바로 눈앞에서도 밀어를 속삭이는 저 년놈들을 떨어뜨리는 것만이 중요하다. 나는 칼을 들고 달려갔다. 불길속으로 달려갔다. 이제… 얼마 안남았다. 바로 저기…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그녀가 있다. 나는 그 하얀 어둠속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거기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 영원히… 그대를… 포기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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