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
Kay Kim
“얼래 꼴 래리 ‘새다리' 래요.”
“얼래 꼴 래리 '꺽다리' 래요."
골목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한바탕 나를 놀리던 개구쟁이 녀석들이 다시 골목 안으로 사라질 때 제일 히죽대며 도망가던 녀석이, 바로 내 밑에 남동생이다.
“요놈의 자식 너 나중에 보자."
그날 아침, 늦잠으로 엄마한테 잔소리 들으며 등교 준비하는 나에게 눈치도 없이 하도 이것저것 귀찮게 굴어
“야, 소눈깔”
소리 질렀다. 아마 그 보복으로 제 친구 녀석들을 끌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를 골목에서 기다렸다가 한 방 먹인 셈이다. 커다란 눈에 순하게 껌뻑대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여서 부쳐진 별명이지만 그 녀석은 '소눈깔'이라는 별명을 아주 싫어했다.
어렸을 때 동생한테 놀림을 받던 내 별명이 말하듯 내 다리는 유난히 길고 가늘다. 그 시절부터 내 별명은 '새다리''꺽다리' '황새다리', 그러니까 다리 시리즈이다. 사실 또 하나 있기는 하다. 머리통만 크고 비쩍 마른 데다 자고만 일어나면 키가 큰다고 '콩나물'이란 별명도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해 안 되는 기억도 있다. 가슴이 파릇파릇 피어오르던 시절, 연둣빛 종이에 날 보고 '코스모스' 같다고 편지 보낸 남자애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데 우리 집 앞 전봇대 옆에서 그 애가 친구 몇 명이랑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는 나에게
“야~ '인절미‘~"
부르고는 제 친구들이랑 킥킥 댔는데 그건 또 무슨 심보였을까? 그 뒤로 인절미는 절대로 먹지를 않는다. 요즈음도 가끔 라면을 잔뜩 먹고 잔 이튿날 거울 속에 팅팅 분 얼굴을 보게 되면 ‘인절미’ 부르던 그 남자애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기분이 영 언짢아진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아직도 각인된 별명은 역시 다리 시리즈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려서부터 치마 입는 것이 싫었다. 치마를 입으면 남들이 다 내 다리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주눅이 든다. 요즘 시대야 여성들이 바지 입는 것이 새로운 멋이기도 하니 옳다구나 하고 나는 바지를 즐겨 입는다. 그런데 문제는 골프장에 나갈 때이다. 한여름에 긴 바지를 입고 골프를 치려면 그런 고역이 없다. 할 수 없이 짧은 반바지나 스커트 라도 입을라치면 꼭 한 사람 정도는 다가와서
“자기 다리는 너무 가늘어. 아휴 그 다리로 어떻게 골프를 치지? 안쓰러워 못 보겠네."
불쌍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니 내가 언제 자기들 다리를 가지고
“아휴 자기 다리는 왜 그렇게 굵어? 그 다리 가지고 왜 박세리처럼 못 치지?"
라고 말한 적이라도 있나,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느 해 여름이었다. 여자들끼리 정기적으로 만나서 즐기는 골프 리그에, 손님으로 참석한 한 젊은 여자와 한 썸이 되어 같이 골프를 칠 기회가 있었다. 9홀이 끝나고 잠시 군것질들을 즐기면서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손님답게 조용히 앉아있던 그녀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나한테 말을 걸어왔다.
“다리가 참 예쁘세요. 꼭 발레리나 다리 같아요."
꿈에도 들어본 적 없는 칭찬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했다. 저 말의 진의가 무얼까 의심이 생기면서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흉보는 것도 격이 있는지 이 여자 흉도 참 세련되게 보는구나, 생각했었다. 그녀의 해맑은 표정 때문이었을까, 웬일로 기분이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 그 뒤로 짧은 옷을 입을 때면 슬그머니 그 여자의 말이 떠오른다. 슬쩍 거울에 다리를 비춰보면 내 다리가 정말 발레리나 다리라도 된 듯 근사하게 보이곤 한다. 그리고는 내가 정말 발레리나라도 된 듯 신이 나고 발걸음조차가 벼워지는 거다. 이제는 나도 골프를 칠 때 아무도 개의치 않고 짧은 치마도 입고 짧은 바지도 마음대로 입는다. 발레리나 다리 같다지 않은가?!
이제는 누가 다리 얘기를 꺼내면 믿거나 말거나
‘발레를 했거든요. 발레리나 되려다 몇 바퀴 돌고 넘어진 뒤 그만두었어요.’ 하고 받아치자 작정하고 있다. 누구한테나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얘기를 해 주면 서로 좋으련만
사람 심리가 그게 그리 싶지가 않은 모양이다. 사실 같은 뜻의 말이래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어제저녁, 가까이에 사는 여동생이 놀러 왔다. 하나뿐인 아들이 집을 떠나자 쓸쓸했는지 강아지 한 마리를 샀다면서 자랑하고 싶어 온 셈이었다. 깔끔한 성격에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들을 좋아하는 동생은 짐승을 유별나게 싫어했다. 나는 딸들이 차례로 집을 떠나면서 엄마는 딸만 키웠으니 아들도 키워보라고 하나씩 사다주어 하얀 멀티스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 동생은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전화해서 지금 언니 집에 갈 건데 개들 좀 가두어 놓으라고 미리 부탁할 정도로 짐승을 싫어한다. 그런 동생이 못생기기로 제일 유명하고 항상 침을 질질 흘리는 쭈글이, '퍼그' 강아지를 데리고 왔다.
“저리 가 이 녀석들아! 언니 쟤들 좀 집어넣어, 우리 아기 놀래. 아이고, 우리 아기 엄마한테 오세요."
반갑다고 꼬리 흔들며 다가가는 내 새하얀 아들들을 구박하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동생한테 나는 은근히 마음이 뒤틀렸다.
“세상에, 얘는 정말 대책 없이 못생겼네. 짐승은 자기를 키우는 주인을 닮는다던데 새카만 것이 꼭 너 닮은 것 아니니?"
다른 형제들은 다 흰 피부를 가지고 있는데 이상하게 혼자서 까무잡잡한 동생은 까맣고 비쩍 말랐다고 별명이 ‘흑산도 멸치’다. 그러니 동생은 까맣다는 말에 제일 질색을 한다. 내 말에 금방 새초롬해지는 동생을 흘깃 보며 ‘까무잡잡한 녀석이 주인 닮아 제법 섹시하다고 말할 걸 그랬었나?’ 슬그머니 뒤늦은 후회를 해 본다. 눈을 내리깐 채 입을 꼭 다물고 강아지만 쓰다듬고 있는 동생의 침묵이 이후
어떤 강도의 반격으로 날아올지 지금부터 마음이 영 편치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