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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 Dec 09. 2022

첫눈 내리는 날

   어제저녁부터 시름시름 내리던 눈발이 이제 제법 작정을 한 듯 퍼붓는다. 한국 에서도 폭설 주의보 뉴스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정 반대편에 있는 한국 날씨가 신통하게 같이 돌아갈 때가 있다.

     

  늦가을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골프를 치던 중년 여인네들이, 이제 골프 시즌도 끝났으니 첫눈 오는 날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음악도 듣고 포도주나 마시자고 젊은 애들처럼 설레며 약속했던 그런 첫눈은, 올해에는 어영부영 지나가 버렸다. 첫눈이 오니 만나자고 하기는 모호한, 싸라기눈이 몇 줌 뿌려졌고 또 한 번은 눈과 비가 섞여서 잠깐 내리다가 말았으니 어쩌면 오늘 내리는 눈이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첫눈답다 싶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껏 전화통이 조용한 거로 보아 이 눈 속을 뚫고 운전해서 나올 용기가 있는 아줌마는 아무도 없나 보다. 딱히 할 일도 없어 늘척한 오후이지만 갑자기 하얀 눈 세계에 갇혀버리니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듯 으스스 마음조차 춥다.

      

  눈보라에 지척을 분간하기 힘든 뒷마당을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종종걸음으로 가로질러, 울타리 밑 장작더미에서 장작 한 단을 안고 뛰어 들어온다. 마당 가에 있던 늙은 나무를 베어 버리고 여름내 남편은 한 켜 한 켜 땔 나무로 잘라서 쌓아 놓았다. 벽난로에 나무를 가득 집어넣고 불을지핀다. 마당 한구석에서 말랐다, 젖었다 되풀이하며 적당한 땔감이 된 나무들이 희뿌연 연기로 습기를 밀어내더니 제법 불꽃이 탐스럽게 일어난다. 타다닥 탁 나무 타는 소리와 매캐한 나무 타는 냄새에 부르르 한기를 털어 버리고 나는 포도주 한 모금을 넘긴다. 그 시절 그와 음악다방에서 자주 신청했던 ‘타이스의 명상곡’ 시디를 찾아걸고 스위치를 누른다. 벽난로 속에서는 나무들이 벌겋게 타오르고 있고 나는 어느새 내 기억 저편의 ‘첫눈 내리는 날’을 찾아가고 있다.  



  그때가 정말 첫눈 내리는 날이었을까? 그냥 첫눈이었다고 생각을 하자. 이 만큼 세월이 흐르고 나면 첫눈과 두 번째 내린 눈의 의미가 무엇이 그리 다르겠나. 바래다준다는핑계로 우리 집까지 눈 속을 걸으면서 몇 시간이 걸렸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시절 그 사람을 만나면 항상 걸었지만 유별나게 추위를 타는 내가 추위에 떨었던 기억은 왜 없을까? 걸을 때마다 우리는 그의 구멍 난 호주머니 속에서 두 손끼리 만나 곧잘 숨기 장난을 했었다. 두툼한 손이 내 손을 찾아 헤적일 때 내 둘째 손가락은 그의 호주머니 속, 터진 구멍에 빠져 그의 가난을 가늠하고 있었던 걸 그는 짐작도 못 했으리라. 군복을 물들인 꺼칠한 그의 점퍼 위에는 눈송이들이 내려앉아 젖어들었고, 내 가슴속에는 이별을 감지하는 눈송이들이 시리게 젖고 있었다. 다방 구석에앉아 성냥 쌓기 놀이만 몇 시간을 해도 지루해하지 않던 나에게 꼭 사랑의 고백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밤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짙은 눈썹 위에 눈송이 하나 매달은 채 젖은 눈으로 '사랑한다.' 고백하던 그를 밀치고 돌아섰던 그 밤, 담요가 깔린 아랫목에 발을 집어넣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던 그 밤 내내 눈은 내리고, 그리고 그날은 ‘첫눈 내리던 날’이었다고 나는 지금껏 믿고 있다.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다. 남편이 좋아하는 두부를 듬뿍 집어넣은 된장찌개에 가스 불을 틀어 놓고 포도주 묻은 입술 가를 훔친다. 어느새 벽난로 속에서 타고 있던 나무도 잦아들고 음악도 끝나 버렸지만, 창밖에 눈보라는 더욱 기승스럽다. 벚꽃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빈 새집이 눈을 잔뜩 인 채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다. 밥상 밑에서 졸고 있던 코코가 귀를 쫑긋하며 컹컹 짖는다. 아마 남편이 돌아온 모양이다. 차고 문이 열리기도 전에 제일 먼저 코코가 알아차린다. 김치를 썰고 수저를 놓고 상을 본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내 아릿한 '첫눈 내리는 날’ 추억을 저만치 밀어 버리고 뱃속에서 꼬르륵 응답한다.

    

  벌컥 찬바람을 앞세우고 남편이 들어왔다. "아휴, 배고파냄새가 좋은데." 씩 웃는 그의 희끗희끗해진 눈썹 위에 눈송이 하나 녹아 젖어있다. 서툴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 젖은 눈 옆으로 요즈음 들어 주름이 더 깊어졌다. 수저 부딪치는 소리, 음식 먹는 소리, 무엇 하나 안 던져주나 밥상 밑에서 끙끙대는 코코 소리, 밖에는 여전히 눈이 퍼붓고 한마디 말없이 밥만 먹어도 우리는, 하나도 심심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벽난로 앞에서 코코를 무릎에 앉히고 얼리던 남편이 담배를 가져오란다. 그의 코트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찾던 손가락이, 터져버린 호주머니 구멍에 삐쭉 빠져 버렸다. 며칠 전, 호주머니가 구멍이나 동전을 다 잃어버렸다던 그의말이 생각난다. 남자의 호주머니에 구멍이 나면 재산이 샌다던 엄마 얘기도 떠오른다. 오늘 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의 구멍 난 호주머니들을 모두 다 꿰매 놓으리라. 두툼한 누비 월남치마 입은 엄마가 장독대에 올라가 된장 항아리에 수북하게 쌓인 눈을 조심스레 밀어내며, ‘올겨울 이렇게 눈이 푸짐하니 내년에는 풍년 들겠네’ 하시던 모습이 어제인 양 떠올라와 빙긋이 웃는다. 내년에는 우리 남편 호주머니에도 풍년이 들려나, 돋보기를 추켜올리며 바늘귀에 실을 정성스레 꿴다.

    

  밖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그래 오늘이 진짜 ‘첫눈 내리는 날’이다. 친구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해야겠다. 첫눈이 이렇게 아름답게 내리는데 모두 좋은 꿈들 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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