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으로 주거지를 옮겨 건설 현장 잡부 생활을 하시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여쭈었다. "왜, 50여 년을 순창군 그 산골 동네 금방동에서 지내셨어요? 도시에 살면 일자리도 많고, 사람이 많으니 그만큼 돈을 벌어들일 기회도 더 주어지는 거 같던데요?" 대답은 이렇다. "이놈아, 내가 학교를 다녀봤냐, 아는 게 있냐? 농사일밖에 모르는 내가 고향을 떠나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이었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기에 한글도 시원시원하게 읽어내지 못했고, 글자를 쓰기는 하나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전혀 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인천이라는 도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도시로의 이사 자체가 스스로 원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꽃다운 청춘 스물한 살에 고인이 돼버린 동생(이름:희광)이 또래들보다 뒤늦게 정읍에서 농고를 졸업하고, 인천으로 왔다. 그의 권유에 못 이겨 갑작스레 주거지를 옮겼다.
사실 연년생 동생인 그를 잘 모른다. 경북 구미 소재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떠나왔고, 희광이는 중학교 졸업과 함께 돈을 벌겠다면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인천의 공장으로 취업을 했기에, 철이 들 때쯤 형제의 정을 나눌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1987년 육군 하사로 입대하여 대전 통신학교와 대구 방공포병학교를 거쳐 벌교 미사일 부대로 배치받았다. 방공포병학교에서 미사일 정비를 배우던 사이에 노태우 정권의 6. 29. 선언(대통령 직접 선거제 도입)이 있었으며, 이후 벌교 군부대에서 아찔하고 위험천만했던 내무반 생활을 하던 1988년에는 올림픽이 열렸다.
이 시기만 해도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에 전념했다. 인천에서 공장을 다니던 희광이는 중졸에다 나이도 어리다는 이유로 마음의 상처를 자주 받았나 보다. 내가 군에 입대하던 해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정읍의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정읍에서 자취를 하면서 3년간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그러다가 1990년 2월 졸업과 함께 인천으로 상경했고, 세 달 뒤쯤 아버지도 이사했다. 그러나 불과 2개월도 지나지 않아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다. 희광이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는 이가 거의 없던 인천 부평구 백마 시장 근처에 정착하면서 주변인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시골 시장에서 소품 장사를 하던 아버지에게서 배웠는지 모르겠다. 백마 시장 한편에 좌판을 벌였다. 리어카에 노래 테이프를 잔뜩
싣고 다니면서 판매를 한 것이다. 싹싹하면서도 배려심이 넘친 성격 때문에 아는 이가 한둘씩 늘어갔다. 만족할 만큼 벌이도 되었다. 그러나 행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비 오는 밤, 포장마차에서 시장에서 알게 된 형과 술을 마시다가 의견 충돌이 있었다. 사소한 다툼이었다. 어찌 보면 다툼도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돌변한 그놈에게 일방적으로 당해버렸다. 포장마차 한편 의자에서 넘어진 희광이의 머리에 뾰족한 우산 끝이 그놈의 손에서 날아들었고, 피가 솟구쳤다. 앗!, 비명 소리와 함께 당황한 희광이는 자리를 피해 아버지가 계시는 시장 인근 단칸방으로 돌아왔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엄마 나 아파, 병원 가야 해요" 이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부모님은 119를 불러 병원 응급실로 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응급처치, 지혈이 안 된 채였다. 피가 솟는 부위를 수건으로 누르면서 응급실 병상에 자기 발로 누웠던 희광이는 과다출혈로 금세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놈과 희광이는 골목이나 길거리에서 장사를 했고, 고달픈 처지가 비슷했다. 트럭에서 야채를 판매하던 그놈의 성격이 괴팍스럽다는 것을 희광이는 알지 못했다. 그냥 처지가 비슷하니 공감대가 있었고, 자주 얼굴을 보면서 술 한잔하자는 그놈의 말을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부슬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저녁, 포장마차에 함께 간 것이 전부였다.
희광이의 작은 배려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건으로 연결되었고, 마침내는 죽어버렸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아연실색할 광경을 직접 보고 겪으면서 무너져 버렸다. 반면, 그놈은 과실치사로 5년의 교도소 복역 이후, 지금쯤 어디선가 행복하게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우리 가족사에 가장 큰 사건은 순식간에 벌어지고 말았다. 속수무책이었다. 희광이가 그 짧은 시간에 고인이 돼버린 것이다.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소심한 편이던 형과 여동생은 이 사건으로 충격을 크게 받았다. 더 소심해졌고, 불안해졌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게 되었다. 정서적 불안과 함께 여동생의 가출이 있었고, 형은 말이 없어졌다. 부지불식간에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님, 이런 시간들이 이어지면서 얼마나 상심했을까....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도 할 수 없다.
군에 있던 나도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른 가족처럼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종교에 심취해 있었고, 여가를 이용하여 여러 분야의 책을 보았으며, 계속된 군 생활로 긴장감이 유지된 덕분이었다.
벌교에서 함께 생활했던 고등학교 선후배의 도움도 있었고, 성남시 미사일 부대에서 근무하던 고등학교 동기이자 지금까지도 인천에서 함께 살면서 나를 챙겨주던 친구의 역할도 컸다. 그러나 젊고 왕성한 혈기가 있던 때라, 때로는 술을 마시며 아픈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희광이로 인해 온 가족이 정신적으로 무너지면서 나라도 자식의 역할을 좀 더 잘해야 한다고 자주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 힘을 잃지 마시고, 용기도 잃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앞으로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동생이 못다 한 효도를 할게요." 이런 말씀을 기회가 될 때마다 드렸지만, 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도시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자식을 잃어버린 50대 초반의 중년, 그는 몸을 혹사시킬 수밖에 없었다. 몸이 부서져라 노동을 해야 잠시라도 잃어버린 자식의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선천적으로 술은 몸에 맞지 않았다. 술에 취해 깊고 편안한 밤을 보낼 수도 없었다. 오직 힘든 노동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건설 현장 잡부 생활을 10년 이상 했고, 그 생활에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부터 즐겨온 담배뿐이었다. 어머니도 우울한 나날을 보내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시때때로 눈물을 흘리셨다. 암흑이 가득히 들어찬 단칸방이 싫다며 고1 딸내미는 어느 날 가출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한 집안 어른으로서 가장으로서 꿋꿋하게 건재해야 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고독했을까?
나는 특별 휴가 기간에 신앙이 없던 어머니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드렸다.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자식 잃은 어머니의 마음에 위로를 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는 인천 주안의 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선택한 일들 중, 몇 안 되는 가장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연세가 80줄에 접어들고,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사람을 만나기가 무서워지기 전까지 줄곧 신앙생활을 하셨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으셔서 그나마 다행이다.
50대부터 고인이 되기까지의 아버지의 도시는 자식을 잃어버린 고통으로 시작되었으며, 건설 현장 잡부의 삶이 만만할 리도 없었다. 60대 끝자락에서는 후두암이 기다렸고, 서울의 큰 병원에서 일곱 시간에 걸친 후두 절제술을 받았다. 이로 인해 말씀을 할 수 없는 세월만 10여 년이다. 답답한 속내를 표현할 수단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 와중에서도 처절한 삶에 대한 사투는 계속되었고, 포기한 삶이란 결단코 없었음을 몸소 보여주셨다.
동네에서 리어카를 끌며 폐지를 모았고, 고물상에 팔러 다니셨다. 몇 천 원 내지 몇 만 원을 벌어서 내 아이들에게 소소한 용돈을 주는 즐거움을 누리셨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목소리가 전혀 안 나오니, 몸 짓과 간단한 필답으로 의사 표현을 하셨다. 폐지 줍는 일을 말리던 나는 얼마 되지 않아 빠르게 포기했다. 스스로 병마를 이겨가면서, 손자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은 그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수술 후 재발 없이 10여 년을 그렇게 보냈으나, 비루한 일상일지라도 정말 감사하다. 아버지가 모든 게 귀찮다고 일도 팽개치고 자리에 누워서 10여 년을 보냈다면 어찌했을까? 아내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들은 또 다른 고통으로 시달렸을 것이다.
아버지의 도시는 아픔과 기쁨이 교차했다. 아들을 잃어버리면서 기나긴 고통이 시작되었던 곳이다. 반면, 두 아들이 공무원으로 자리를 잡았고, 또한 나의 두 아들이 태어나 온갖 재롱을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