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직해라
철학, 배움이 전무한 아버지에게 철학이란 게 있었을까? 문득 의문이 든다. 단어 자체가 너무 어렵다. 누군가가 나에게 "너의 철학이 뭐냐?"라고 묻는다면, 대학과 대학원에서 오랜 기간, 여러 분야를 공부한 나도 일목요연한 답변을 하기는 매우 부담스럽다. 위키백과에는 철학이란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 원리 즉 인간의 본질, 세계관 등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나와 있다.
국어사전은 명사이며 그 뜻을 두 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흔히 인식, 존재, 가치의 세 기준에 따라 하위 분야를 나눌 수 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인생관, 세계관, 신조 따위를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국어사전의 후자 설명에 의하면, 배움이 길든 짧든, 심지어 배움이 전무할지라도 철학을 가질 수 있다. 삶을 살아오면서 온갖 경험으로 세계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생관이나 신조는 누구나 생길 수 있고, 마음속에 가질 수 있으며, 자녀에게 이야기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아버지도 철학이 있었고, 글이나 책으로 정리하여 자식들에게 가르치진 않았지만 언행으로 보여주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초등학교 4학년쯤 일이다. 어느 날인가 학교에 가다 말고, 들판과 산자락을 헤매다가 귀가한 일이 있었다. 헤아려보니 1978년도 일이다. 두메산골 동네에 전봇대가 설치되면서 저녁에 호롱 불이나 촛불 대신 전구에서 켜지는 환한 불빛을 보게 되었고, 전화는 마을 이장 댁에 한 대만 있을 때였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는 나의 미등교를 모를 거라 생각했다. '물어보시면 적당히 둘러대야지!'라고 작정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저녁이 되자, 아버지가 나를 몰아세웠다. "이놈아, 오늘 왜 학교에 가지 않은 거냐?" 그러자 얼른 좋은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사실대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늦잠을 잤고, 그 바람에 다른 날보다 출발이 늦었고요. 지각하여 선생님께 혼날 것이 걱정돼서 학교에 안 가고, 중간에 놀다 왔습니다."라고 이실직고했다.
내 답변에 아버지는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다. 매를 들거나 욕설로 이어지지 않았다. "똑바로 들어라!"라며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늦잠을 자지 말아라, 누구나 6시간만 자면 충분하다. 기상할 때 피곤한 것 같지만, 이리저리 움직이면 활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누구든지 속이려 들지 마라. 정직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아빠도 매우 싫어한다. 사실대로 말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다음부터는 학교 가는 길 중간에 돌아오지 말라" 등이다.
어린 마음에 학교에 가지 않아서 크게 혼날 것으로 걱정했다. 그런데 이렇게 말로만 타이르는 아버지를 보면서 '와우, 안 혼났다. 다행이다. 다음부터는 어떤 경우에도 학교 가는 중간에 놀다 오지 말아야지!'라는 결심도 했다. 아버지는 초1 때부터 줄반장을 하면서, 다른 또래들과 달리 언제 어디서나 책을 끼고 사는 나에게 기대가 컸다. 그래서 매를 들어 따끔하게 혼내기보다 훈계를 선택한 것 같다.
아버지는 거의 50년을 순창의 시골에서 농부로 살았고, 이후 인천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건설 현장 잡부로 삶을 보냈다. 농사를 지을 때나, 잡부로 지낼 때나 아버지는 늘 정직하셨다.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어린 시절 훈계 말씀은 갑작스레 하신 말씀이 아니다. 크고 작은 자갈이 가득했던 산자락 밭을 일구어 보리, 콩, 고구마, 감자 등의 농사에서, 호남정맥길 넘어 산골짜기 계단식 논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터득한 삶의 진리였다. 이른 봄부터 땀방울을 흘리며 정직하게 노력하면, 가을이 되어 내가 흘린 땀만큼 곡식이 주어진다. 아버지의 10대 후반부터 70대 말까지 펼쳐진 줄기찬 노동의 원동력은 바로 이것이었다. "정직!"
공무원이 된 나는 20년을 교육지원청과 본청에서 근무했다. 직장을 통하여 업무와 민원으로 스쳐간 사람이 수천 명 이상이며, 함께 근무하던 직원들이 정직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사고도 셀 수 없을 만큼 목격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직장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정직이라는 것을. 정직하지 못하면 동료나 상관으로부터 결코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때로는 엄청난 세금 낭비를 초래할 수 있고, 본인이 피해 갈 수 없는 궁지에 내몰리게 되며, 마침내는 잘못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다행스럽다. 일찌감치 겪은 아버지의 훈계가 머릿속에 남아서인지 모르겠으나, 공직 생활을 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정직해야겠다'라는 것을 실천해 왔다. 공직 입문 이후 26년째이지만, 정직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비리 또는 명예롭지 못한 사건에 휘말린 적이 없다. 앞으로 남은 4년여의 공직 생활과 그 이후의 삶에서도 정직한 삶을 이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