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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오 Feb 26. 2024

공감이 가는 숫자

숫자를 이용한 브랜드텔링

모든 것에서 수를 없애보라.
그러면,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성 이시도루스(560~636), 에스파냐 성직자


'1970년 4월 11일 미국 동부 표준시 13시 13분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아폴로 13호가 발사된다. 그리고 이틀 후인 4월 13일 아폴로 13호가 지구에서 321,860km 떨어진 지점에 도착했을 무렵 산소 탱크가 갑자기 폭발했다.’

이 글을 읽고 ’13’ 이란 숫자가 가지고 있는 ‘저주의 의미’를 떠올렸다면 우리는 이미 숫자가 주술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4월 17일 아폴로호의 모든 승무원이 살아서 귀환한다. 나사는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인 실패(Successful Failure)라 평하기도 한다. 16년이 지난 1986년 1월 28일 우주왕복선 챌린져호가 땅을 박차고 출발한 지 73초 만에 굉음을 내며 엄청난 섬광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승무원 7명 모두 사망한 사고였죠. 민간인 교사도 포함되었기에 더욱 안타까운 사고였다. ‘7’은 행운의 숫자이며 생명의 숫자임에도 행운은 없었고 생명은 모두 사라져 갔다.

그러면 ’13’과 ‘7’의 주술적 상징성은 잘못된 믿음이지 않을까? 그래도 왠지 모르게 그 숫자들이 찜찜하다.   

수(數 number)에 대한 개념은 인류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 수에 주술적 성격이 있음도 이에 대한 증거일 것이다.
숫자(數字 numeral)가 없을 때 사람들은 수를 나타내기 위해 뼈에 눈금을 새기기도 했고(이상고 뼈 Ishango bone, 콩고), 매듭으로 수를 표현하기도(결승법, Quipu, 잉카) 신체 부위를 숫자로 일대일 대응(뉴기니 파푸스 족)시켜 수를 세기도 했다.

(좌상) 이상고 뼈 (좌하) 결승법 (우) 신체 부위 일대일 숫자 대응


1세기 인도에선 위대한 숫자의 원형이 발명된다. 발명은 인도에서 했지만, 세계적으로 퍼트린 건 아라비아기에 그 이름은 아라비아 숫자 Arabic numerals이다. 아라비아 숫자는 19세기에 전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하게 된다. 세계가 공통으로 같은 숫자를 사용하게 된 건 수를 헤아리거나 계산하는 등 그 쓰임은 같기 때문일 것이다. 숫자의 쓰임 중에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은 기록이다.

기록을 위해서 숫자는 상징성을 갖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기억하기 쉬운 형태여야 했다.

아라비아 숫자는 15세기에 걸쳐 변하고 발전하여 지금의 모습이 된다.

Development of Hindu-Arabic numerals


숫자가 갖고 있는 기억하기 쉬운 형태와 상징성으로 브랜드는 숫자를 이용해 하고 싶은 말을 효율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1906년 사업가 세 명이 뭉쳐 고품격 펜 제작을 목표로 ‘심플로 필로 펜 컴퍼니 Simplo Filler Pen Co.’라는 회사를 함부르크에 설립한다, ‘최고’와 ‘완벽’을 추구하는 사업가 3명이 뭉쳤으니 만들어진 펜도 그 기질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1909년 사명을 서유럽 최고봉의 산 ‘몽블랑’으로 브랜드 이름을 변경하고 1924년엔 마이스터스튁(Meisterstuck) 시리즈를 내놓는다. 그리고 마이스터스튁 시리즈는 몽블랑 브랜드의 시그니쳐 제품이 된다.
‘명작’이란 의미의 마이스터스튁은 완제품 생산까지 6주 이상 소요되고 250가지 공정을 거친다. 만년필의 핵심부품 펜촉은 제작하는 공정만도 35단계에 테스트도 15가지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완벽한 마이스터스튁의 펜촉이 된다.

완성된 펜촉엔 최종적으로 ‘4810’이라는 숫자를 새긴다. ‘4810’이란 숫자는 몽블랑 산의 높이로 최고의 상징이자 최고 만년필을 상징한다.

상징적 숫자가 가진 최고(最高)라는 자부심과 최고의 제품이라는 자부심을 동일시한 것이다.

그걸 상징이라도 하듯 마이스터스튁 펜캡 정상엔 몽블랑 산의 만년설을 상징하는 몽블랑의 로고 ‘화이트 스타’가 자리 잡고 있다.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만년필

 

숫자는 높이, 거리, 길이를 표현하고 표현된 숫자로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사람들이 기록한 최고의 높이, 최고의 거리는 사람들의 도전과 좌절, 성공의 이야기가 녹아있기도 하다.

기원전 490년 마라톤 평원.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가 아테네에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전령이 달린 거리는 42.195Km. 전령 페이디피데스가 뛰어가 승리를 전하고 쓰러져 숨진 이야기는 다소 외우기도 힘든 숫자 42.195를 마라톤이라는 경기의 상징으로 만든다. 숫자를 들으면 마라톤을, 마라톤을 들으면 숫자가 생각난다. 그리고 뒤이어 그 기나긴 거리를 뛰어간 페이디피데스의 모습을 떠올린다.  


숫자가 사람의 노고를 상징할 때 그 숫자는 공감을 이끌어내며 빛을 발한다.
영국의 자동차 서스펜션 기술자 조지 카워다인 George Carwardine은 발칙하고 기발한 생각을 한다. 사람의 팔을 흉내 내어 어느 위치든 움직여 빛을 비출 수 있는 조명을 구상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스프링을 사용했다. 조지 카워다인은 차의 무게를 지탱하는 서스펜션 시스템 분야의 전문가였기 때문에 안정감 있게 균형을 잡고 원하는 곳을 비출 수 있는 조명의 원형을 개발할 수 있었다. (Anglepoise Original 1227, 1933)
앵글포이즈를 대표하는 모델은 앵글포이즈 오리지널 1227이다.


‘1227’

이 네 자리 숫자를 모델명으로 한 이유가 무엇일까?
숫자 ‘1227’은 천이백스물일곱 번째로 만든 모델이란 뜻이다. 조지 카워다인과 허버트 테리 Herbert Terry & Sons 회사는 조명 디자인이 나오는 대로 순차적인 번호를 붙였다. 1227번째로 만든 모델이 테스트를 거쳐 완벽한 제품이 되었고 이 후로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 대표적인 모델이 된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종이에 아이디어를 옮기고 뚝살배긴 손으로 금속에 스프링을 걸어 사람의 팔을 닮은 조명이 완성되기를 천이백스물 일곱 번 했단 얘기이다. 땀과 정성이 담긴 모델이기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탄생한 앵글포이즈는 75주년이 되는 2009년에 영국왕실 우정국 우표 Royal Mail stamp에 영국의 대표 디자인 10가지 중 하나로 선정되어 발행되기도 한다.  


(좌) 앵글포이즈 1227 특허  (우) 1935년 출시된 앵글포이즈 1227

 

브랜드가 숫자로 말할 때 깃든 이야기에 따라 숫자는 자부심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열정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자부심과 열정의 주인공은 물론 사람일 것이다.

숫자로 이야기하려면 이야기가 있는 숫자가 필요하다.
나열된 숫자에 공감할 삶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아무 의미 없는 숫자를 맹목적으로 강요한다면 쏟아지는 정보에 시달리고 암기에 질린 사람들이 피곤해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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