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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오 Nov 22. 2017

장인정신이 만들어 낸 오렌지 빛 선물

세 가지 색깔 브랜드텔링 2.

오늘도 여관엔 벨벳과 실크를 사기 위해 귀족을 따라온 수행원들이 방을 잡기 위해 줄을 서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여관집 어린 아들은 이렇게 몰려드는 사람들이 왜 그런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습니다. 크레펠트(Krefeld)에서 생산되는 실크와 벨벳의 품질은 어린아이의 눈으로 봐도 훌륭해 보였기 때문이죠. 게다가 조금이라도 품질이 나쁜 공장과 장사치들은 말없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남은 장인들은 사라진 그들과는 눈빛과 손놀림이 달라 보이는 장인들이었죠. 

‘옷감 하나도 정성스레 만들어야 하는구나.’

아이는 생각했습니다.  

크레펠트엔 황제와 왕, 추기경 등 당대 내로라할 권력자들의 옷감을 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곳의 벨벳과 실크는 그만큼 우수한 품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크레펠트가 벨벳과 실크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때문이었습니다.


Portrait of Frederick the Great; By Anton Graff, 1781


‘왕은 국가의 첫 번째 종’이라 말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개화된 독재자였습니다. 제도와 법을 정비하며 질서를 구축한 왕이 그다음으로 한 일은 국가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 크레펠트는 프리드리히 2세 의해 18세기부터 벨벳과 실크를 주력 산업으로 선정했고 그로 인해 부유해졌죠. 크레펠트는 ‘벨벳과 실크의 도시(Samt-und Seidenstadt)’라 불렸습니다.

아이는 1801년 현재 독일 북동쪽 크레펠트(Krefeld)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크레펠트는 나폴레옹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아이는 프랑스 시민으로 태어났죠.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태생으로 띠에리 에르메스 Thierry Hermès, 어머니는 독일 태생으로 아그네스 쿠넨 Agnese Kuhnen이었습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프랑스 국민이라는 사실에 항상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재패하고 프랑스는 모든 유럽 위에 군림했기 때문이죠. 1814년 1월 14일 크레펠트가 프러시안령으로 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이 날 이후 아이의 가족에게 프랑스 국민이란 사실은 오히려 그들을 주눅 들게 만들었습니다. 

1년 후 아이는 열다섯 나이에 크나 큰 시련을 겪게 됩니다. 여관을 경영하던 부모가 크레펠트의 전쟁과 몹쓸 병으로 세상을 등지게 된 겁니다. 졸지에 사고무친이 된 아이는 자신의 생계를 자기가 꾸려야 했죠. 아이는 힘이 들 때마다 생전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습니다.

‘가야 해! 어떻게든 이 곳을 벗어나 조국 프랑스로 빨리 가야만 해.’

스무 살이 된 에르메스는 아버지가 스스로 되뇌던 약속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더불어 그의 마음 한 켠에는  좁은 크레펠트를 벗어나 성공의 기회가 많은 꿈의 땅으로 가고 싶은 생각도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해 그는 크레펠트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프랑스의 파리로 향합니다. 


파리의 몽마르트, 1821.


파리에 입성한 에르메스는 자신이 즐거워할 일을 찾아 나섰습니다. 벨벳과 실크의 도시 크레펠트의 그 장인들처럼 몰두하면서 할 수 있는 자신 만의 일을 말입니다.

‘기회는 가까운 곳에 있어!!!’

그 옛날 크레펠트 벨벳과 실크 거리에서 마주한 장인들과 그들이 만들어 낸 기막힌 옷감들이 펄럭이던 모습이 파리의 거리와 중첩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진정한 장인이 만든 벨벳과 실크가 뿜어내는 아우라와 그 앞에 줄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중첩된 환상이 걷어진 파리의 거리는 달랐습니다. 화려한 겉모습으로 빛나는 듯했지만 정작 에르메스의 눈에 비친 쇼윈도에 진열된 제품은 무언가 부족해 보였죠. 장인이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만든 것이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회색의 건물로 들어 찬 이 거리에도 장인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경외심을 갖고 몰려들 장인의 제품이 필요하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리의 마차였습니다. 당시 파리 도심의 주요 교통수단은 마차로 말의 안장에 고리와 나무, 가죽끈으로 객차(Carriage)를 연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게다가 산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죠.


마차와 마구의 종류


에르메스의 예리한 눈에 그들이 사용하는 마구의 조악함이 들어왔습니다. 

가죽이라고는 하나 금방이라도 찢길 듯 보이는 싸구려에 바느질은 들쑥날쑥 마구잡이로 한 티가 역력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말이 날뛰면 가죽과 바늘땀은 찢기거나 끊어지고 풀어헤쳐져 사람을 보호할 수 없을 듯 보였습니다. 

에르메스는 결심했습니다. 

‘말을 이용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과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마구를 만들자. 그리고 이 거리엔 장인정신으로 만들어진 제품 만이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자.’

아이템은 선정했으니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마구를 만들고 팔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마구는 말을 소유할 수 있는 귀족들이 주로 구매하는 것이니 그들이 빈번하게 다니는 파리의 번화가에 가게를 구해야 했습니다. 가게를 알아보러 다니던 그는 천정부지로 올라가 있는 중심가의 세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하고 갈등하던 그에게 불행이 행운을 가져다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1835년 마들렌 광장의 거리를 행렬하던 루이 필리프 왕(Louis Philippe)을 공화당원이 습격하는 바람에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을 포함해서 20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거리는 쑥대밭이 되었고 그 후 이 거리에서 조성된 공포감 덕분에 건물의 임대료가 낮아졌죠. 그럼에도 비어있는 상태의 건물이 많아졌습니다. 에르메스는 이 기회를 틈타 그동안 모았던 돈을 투자해 1837년 첫 가게를 오픈합니다. 


마들렌 광장의 바스 듀 롬프르 56번가(Rue Basse Du Rempart 56)


이 곳에서 에르메스의 마구상은 시작되었습니다. 


1837년 당시 첫번째 에르메스 마구상 근처 파리 지도


에르메스는 그의 신념대로 마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안장에 사용되는 가죽은 암소 가죽으로 에르메스 마구상에선 암소 가죽을 만들 때 참나무 껍질을 구덩이에 가득 넣고 약 9개월여에 걸쳐 무두질했습니다. 그래야만 오랫동안 사용해도 갈라지지 않았기에 에르메스는 오래 걸리더라도 정성을 다해 이 과정을 꼭 지켰습니다. 게다가 가죽과 가죽을 연결할 때는 꼭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새들 스티치는 양손으로 바늘 두 개를 잡고 같은 구멍을 통과시켜 견고하게 바느질하는 방식입니다. 기계가 손쉽게 만들어내는 스티치는 한 곳이 끊어지면 전체가 쉽게 풀어지지만 새들 스티치 방식은 한 곳이 끊어져도 교차된 실이 하나하나 조여져 있기에 풀어지지 않아 견고했죠.

기계와 새들 스티치의 비교


새들 스티치는 꼭 사람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수놓듯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야 했지만 에르메스는 이 공정을 꼭 지켜 만들었습니다. 그래야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마구가 되기 때문이었죠.  

에르메스의 손가락은 굳은살에 갈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투박하지만 그 손으로 완성된 마구의 매끈한 표면을 쓸어내릴 때마다 희열을 느꼈죠. 어느 순간부터 거리에 다니는 마차의 마구를 보며 자신이 만든 것들을 세는 버릇도 생겼습니다. 자신의 마구를 사용하는 말의 주인과 말에게 떳떳함을 느끼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장인 정신으로 만든 에르메스의 마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제법 많은 고객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1842년 7월 13일 프랑스에 슬픈 일이 일어납니다. 

루이 필리프 왕의 장남 오를레앙 공작(Ferdinand Philippe, Duke of Orleans)이 자신의 군을 정비하기 위해 떠나는 날이었습니다. 가족들과 인사하며 마차에 올라앉는 순간 갑자기 말이 미친 듯이 날뛰는 순간 공작은 균형을 잃고 마차 밖으로 튕겨져 땅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그리고, 두개골이 골절되어 의사들이 응급처치를 했음에도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겁니다. 


오를레앙 공작의 죽음


사고의 원인을 조사해보니 말의 이상행동은 조악한 마구 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공작이 마구에 얹어진 마차에 올라서자 잘못 만들어진 마구의 날카로운 부분이 말을 찔렀고 깜짝 놀란 말이 날뛰게 되어 생긴 비극이었습니다. 차기 왕의 자리를 물려받을 공작의 죽음은 전 프랑스 국민을 울렸고 이 사건으로 마구에 대한 사람들에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마구를 사용하는 귀족과 황족들은 마구를 검사하고 조악한 마구를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 훌륭하게 만들어진 마구를 찾기 시작했죠. 물어물어 찾다 보니 에르메스의 마구가 훌륭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입소문 때문인지 에르메스 마구상엔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그 옛날 크레펠트의 벨벳과 실크 장인의 상가 모습이 파리 회색의 도심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에르메스의 신념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죠. 

‘신념은 신념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불혹의 나이(당시 42세)에 그의 신념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고 신념은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인정신’이란 철학은 에르메스 마구 상의 본질이 되어갔습니다. 

에르메스는 파리를 넘어 프랑스 전역으로 명성이 퍼져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죠. 67세 에르메스에게 또 하나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세계의 바이어들이 몰려드는 만국 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가 파리의 세느강변의 샹드마르스(Champ-de-Mars) 공원에서 개최된 것입니다. 


Palais de l'Exposition universelle de 1867, vu à vol d'oiseau


이 곳에서 에르메스의 마구는 1등 상을 거머쥐게 됩니다. 이로써 에르메스는 프랑스를 넘어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크레펠트의 벨벳과 실크를 만들던 장인 정신이 에르메스의 씨앗이 되고 파리에서 꽃을 피워 다시 전 세계에 씨앗을 퍼뜨리게 된 것이죠.

1878년 마구 하나만으로도 세계에 이름을 떨친 에르메스는 아들 샤를 에밀 에르메스(Charles Emile Hermès)에게 장인 정신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납니다. 

에르메스의 뜻을 이어받은 세 번째 오너 샤를 에밀 에르메스의 아들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Emile Morris Hermès)는 1945년 마구상으로 시작한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심벌을 만듭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화가 알프레드 드 드로(Alfred de Dreux) 석판화 ‘Le duc attele’에서 형태를 따서 만든 로고를 공표합니다.


Le duc attele 와 에르메스의 로고

 

로고는 사륜마차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사륜마차를 의미하는 ‘깔레쉬(Caleche, 마차)’라는 별칭까지 붙었습니다. 

깔레쉬가 오렌지 빛이 된 것은 2차 대전 이후 에르메스의 상자 개발 담당이 천연가죽과 가장 흡사한 색상을 선택한 것으로 비롯되었다 합니다. 


에르메스의 오렌지 빛 상자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선물이 담겨 있습니다. 


한 땀 한 땀 만들어 간 장인의 손때를 간직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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