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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ezeDay Apr 18. 2023

[창작소설] 기억, 지옥 (1부)

기억, 지옥 (1부)

- 송지범



어쩌면 지우가 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어 아직 공원의 벤치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있다. 미련이 남은 것일까? 아니면 깔끔하게 끝내고 싶은 것일까? 이제껏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었던 여자가 또 있었을까? 이제는 쓸모없어진 이러한 질문들이 뒤엉켜 나의 목을 점점 조이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그녀를 잊기 위해 새로운 기억을 담으려고 공원에 나왔는데 오히려 그녀 생각만 가득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자 그늘 밑에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료함을 달래보려고 애쓰고 있었고, 한 노인은 그 옆에 누워 단잠을 자고 있기도 했다. 반대쪽에는 서로 바싹 붙어 있는 연인들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지우가 곁에만 있어도 좋을 때가 있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또 서글퍼졌다. 그리고 그녀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 기분은 상관하지도 않는지 가을햇살은 따뜻하게 내리쬐고 바람도 산들산들 불어온다. 가방 속에서 작은 사진첩 하나를 꺼냈다. 사진첩에 든 것은 모두 지우를 찍은 사진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사진첩을 천천히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기억에서 사라진 그녀와의 추억들이 한 장씩 늘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섯 장을 넘기다가 더 이상 그녀가 생각나는 것이 두려워 사진첩을 덮어버렸다. 


담배를 찾기 위해 걸치고 있던 겉옷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잡힌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 안에는 어제 날짜가 찍힌 비행기 표가 들어있었다. 외국으로 도망가서 산다고 해도 한국에서의 기억들을 잊고 새롭게 출발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그녀의 기억을 잊기 두려워하니까. 지우는 안다. 나는 절대로 자신을 잊지 못할 것임을. 그걸 안다고 해도 그녀는 절대로 내게 오지 않을 것이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고, 또 기다렸던 유나에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우와 만난 건 유나와 헤어지고 두 번째 사진관을 개업했을 때였다. 첫 번째 사진관은 목이 좋은 신촌에 개업을 했지만, 두 번째는 남과 섞이지 않고 살고 싶어서 노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삼청동에 개업했다. 주로 웹 사이트를 중심으로 사진 활동을 했기 때문에 젊은 층에게 제법 인기가 많았다. 내가 찍은 사진은 블로그를 통해서만 공개 했다. 물론 반응은 미온적이었지만 뜨거운 반응을 바라지도 않았기에 나름대로 만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자가 사진관으로 찾아왔다.


“혹시 여기 박진욱씨 계세요?”

“무슨 일이시죠?”


카메라 렌즈 닦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목까지 내려오는 단발에 검은색 뿔테안경을 끼고 있어 세련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여자는 한동안 나를 응시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건넸다.


“저는 이지우라고 해요. 큐레이터고, 박진욱씨 작품을 전시 할 수 있을까 해서요.”


나는 다시 고개를 숙여 아무 말 없이 카메라 렌즈를 닦았다. 내 사진이 작품 전시를 할 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잘못 알고 온 건 아닌지 물었다.


“잘못 찾아오신 거 아녜요?”


그녀는 침묵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말하는 나를 계속해서 응시하는 것 같았다. 여자의 태도에 조금 불쾌했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빨리 현관 밖으로 나가는 걸 원했으니까.


“제가 찍은 사진 중에 잘 나온 게 없을 텐데요.”

“저는 큐레이터예요. 작품성이 없으면 찾아오지도 않았겠죠.”


작품성이라니. 삼청동에 오고 나서는 한 번도 그런 것을 염두하고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의 작품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기분 나쁘진 않았기 때문에 살짝 고개를 들어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고 한 번 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데, 어떤 사진을 보고 오셨어요?”

“블로그에 '36.5°c' 라는 포트폴리오가 있더군요.”


36.5°c. 사람의 정상 체온이다. 나는 다시 옛날처럼 사람들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처음에 삼청동으로 왔을 때부터 나는 사람들을 피하면서도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내가 유나를 버리면서 선택한 길이었다. 다시 돌이킬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사람 한명 분의 체온인 36.5°c를 유지했고, 외로움이라는 추위와 싸워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진을 통해 그 외로움을 표현 하거나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의 사진으로 그 외로움을 채우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찍은 두 종류의 사진들은 그대로 포트폴리오에 저장 되었다. 그러한 나만의 외로움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들킨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작품성 있는 게 있던가요?”

“전시회의 주제와 맞는 사진이 몇 장 있더군요.”

“주제는 뭔가요?”

“고독이나 외로움에 관한 건데, 아직 결정하진 않았어요.”


나는 약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사진관을 개업하고 처음으로 내게 관심을 보인 사람이었다. 사진 전시를 떠나서 다시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내가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는 약속한 사람이 있으니 내일 사진 몇 장을 골라서 다시 오겠다고 했다. 내가 차마 거절 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가 나가자마자 곧바로 블로그의 포트폴리오를 뒤적거렸다. 그녀가 원하는 사진이 어떤 사진인지 찾아내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옛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웃거렸다. 가방 속에서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카메라를 들고 나오긴 했지만 찍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 나는 기억력이 나쁜 편이었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곧 잘 잊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조각난 기억의 대부분은 사진을 통해 맞춰지곤 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사진을 찍는 목적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을 때는 그와 관련된 사진을 태워버리곤 했는데, 가장 많이 태운 사진이 바로 지우에게 푹 빠지기 전에 사귀었던 유나의 사진이었다. 지우와 만나기전, 나는 유나가 자꾸 생각나는 것이 참을 수 없어서 그녀의 사진을 모두 모아 태워버렸다. 그리고 유나에 대한 기억을 쉽게 지울 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웃긴 일이다. 사람의 기억을 사진 몇 장이 좌지우지 한다는 게. 언제부터인가 나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 담긴 사진은 버리고, 간직하고 싶은 기억이 담긴 사진은 상자에 모아서 가끔 꺼내보곤 했다. 빨리 지우와의 기억을 지워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지우의 사진은 쉽게 태울 수 없었다. 아니 나는 그녀의 사진을 모아 놓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태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진을 태우더라도 내가 찍은 모든 사진에는, 내가 접촉하는 모든 것들에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기억이 묻어 있을 테니까.


힘없게 카메라를 들어 지는 노을 속에서 따로 떨어져 걷고 있는 남여의 모습을 사진기 속에 담고는 다시 사진첩을 집어 들었다. 다음 날 다시 찾아온 그녀는 선물이라며 이 사진첩 하나를 들고 왔었다. 선물이라는 것을 오랜만에 받아서 그런지 사진첩을 받는 손이 어색했지만 마음은 전시를 해야겠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사진첩 맨 뒷장을 폈다. 그녀의 명함 한 장이 끼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막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뿌옇게 흐렸던 지우와의 기억들이 다시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1부 끝, 2부에서 계속)

by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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