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틀에서 생각의 거울로
“생각을 틀 안에 가두지 말라”("Think outside the square.")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많은 프레임워크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SWOT, PEST, GROW.... 너무나 많은 분야에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두문자어(framework acronym)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에 맞춰 생각하지 않으면, 같은 리그에 속할 수 없다는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틀 안에 갇힌 창의성>
심지어 ‘창의성’조차 SCAMPER라는 이름의 프레임워크로 설명됩니다. SCAMPER는 아이디어를 확장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Substitute(대체), Combine(결합), Adapt(응용), Modify(수정), Put to other uses(전용), Eliminate(제거), Reverse(재배열). 이 일곱 가지 질문은 발상의 전환을 유도하며, 새로운 관점을 제안합니다. 창의성을 위한 질문들이지만, 결국 창의성을 규정하는 틀이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어쨌든 이제, 인간이 억지스럽게 만들어 낸 이런 프레임워크들마저 모두 AI가 알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SCAMPER의 ‘E(Eliminate, 제거)’를 적용한 [춘향전]을 써 줘.”라고 요청하면, ChatGPT는 ‘춘향이 없는 춘향전’을 써 줄 수도 있습니다. 이몽룡이 방자 없이 홀로 길을 나서거나, 끝내 변학도가 등장하지 않아 위기 없이 평온하게 흘러가는 서사가 탄생하기도 합니다.
AI는 무수한 프레임워크를 기억하고, 지치지 않고 조합하며, 인간보다 더 다양한 실험을 해냅니다. 연결, 확장, 대체, 제거…, 창의성의 어느 요소에서도 AI는 사람에게 뒤처지지 않아 보입니다. 이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AI가 모든 도식을 이해하고, 심지어 '창의성'까지 흉내 내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요?
<MECE라는 사고의 거울>
저는 MECE(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라는 사고 도구를 떠올립니다. MECE는 서로 겹치지 않으며(Mutually Exclusive), 빠짐없이 설명하는(Collectively Exhaustive) 구조를 뜻합니다.
챗GPT에게 이렇게 요청해 보았습니다. "나를 MECE의 원칙에 따라 분류해 줘."
결과는 이렇습니다. 그동안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이 4개의 카테고리로 저를 온전히 설명하고, 이 분류는 서로 겹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1. 교육자/강연자 – AI, 영어, 번역, 글쓰기 등 다양한 주제로 콘텐츠를 전달합니다.
2. 창업가/기획자 – 기술 기반 스타트업의 기획과 실행을 이끕니다.
3. 콘텐츠 제작자 – 브런치 연재, 시네마틱 영상, 영화 기반 영어 콘텐츠 등 창작 활동을 합니다.
4. AI 활용 전문가 – ChatGPT 등의 생성형 AI를 전략적으로 활용합니다.
대충 괜찮아 보입니다. ChatGPT는 제한된 대화 기록 안에서 최선을 다해 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카테고리 수를 지나치게 줄이면 현실을 왜곡하고, 반대로 끝없이 세분화하면 복잡성의 수렁에 빠지니 이 정도로 받아 들일만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쉽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딸의 '아빠'인 나는 어디에 포함될 수 있을까요? 아이와의 대화, 아이를 위해 만들었던 음식, 시집보내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주책…. 이런 것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프레임워크 밖으로 걸어 나갈 자유>
프레임워크는 언제나 현실보다 단순합니다. 그 단순함이 사고를 명료하게 해 주지만, 동시에 삶의 깊이와 겹침, 복잡성과 흐름을 누락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MECE 역시 절대적인 진리로 보지는 않습니다. 대신, 나를 비춰보는 거울로 삼습니다. AI는 데이터를 근거로, 저는 맥락과 뉘앙스를 근거로 그 빈틈을 메우면 됩니다.
이제는 프레임워크를 더 이상 암기해야 할 절대 명제로 바라볼 필요도 없고, 저 역시 프레임워크를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보다는 단순함과 복잡성, 분석과 상상을 잇는 다리로 활용하려 합니다. 최소한의 경계를 긋되, 경계 너머의 가능성을 잊지 않는 태도, 이것이 AI 시대의 사고법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도 저는 프레임워크를 활용할 뿐 언제든 그 밖으로 걸어 나갈 준비를 합니다. 춘향이 없는 춘향전을 상상하는 마음으로, 낯선 상상과 경계 넘기를 주저하지 않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