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변하는 죽음의 의미, 살아 있는 오늘
“You must remember you will die.
You must remember you must live.”
대학 시절, 친구들과 ‘나이 서른에 우린’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자주 불렀습니다. 불과 몇 해 뒤를 상상하는 노래였는데, 그때의 마음은 걱정과 불안보다 기대와 희망에 조금 더 기울어 있었습니다. 어떤 직업을 가질지, 누구와 사랑을 이룰지, 어떤 성취를 맞이할지, 미래는 늘 나를 기다려 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퇴사 후 지난 2년 동안 제 관심사는 한결같았습니다. 남은 인생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그러던 어느 날부터 너무나 감사히도 강의 의뢰가 몰려오며 삶의 박자가 다시 빨라졌습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 건강을 먼저 돌보아야겠다는 생각과 지금은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유혹이 엇갈립니다. 강의 스케줄의 피로, 준비에 대한 압박이 파도처럼 번갈아 밀려오지만, 아직은 안온함을 추구하는 장년의 삶을 꿈꾸기보다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감당하고 싶습니다.
문득, 다시 2년 뒤를 떠올립니다. 그때도 지금 같은 에너지를 지니고 있을까요?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말을 믿고 싶지만, 언젠가 무거운 숫자로 다가올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지점에서 아마 지금 하는 걱정들은 고마움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 같습니다. 여전히 붙들고 씨름할 일이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축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더 견딜 만해집니다.
20대, 30대, 40대에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해마다 또렷해지는 변화들. 죽음을 더 자주 떠올릴수록 삶의 의미는 더 복잡해집니다. 언젠가 마주할 그 순간 앞에서 지금의 많은 가치들은 무의미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돌이켜 보면 지금껏 붙잡아 온 삶의 의미들은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은 문장들이었습니다. 명예, 돈, 공부, 이들만으로는 삶의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라”는 말로는 제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어렵습니다.
<오늘 앞에서>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소풍을 왔다”라는 비유가 때로 현실 도피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말로 인해 죽음을 생각하고, 그래서 삶의 우선순위가 명확해지고 하찮은 것들이 조금은 걸러짐을 느낍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분명한 목표라는 것이 아직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게 됩니다.
<남기고 싶은 흔적>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라고 태어났을까.” 뭔가 되는 사람인 척하는 이런 질문도 때로 교만한 것 같아 망설여집니다. 그럼에도 공부로 닦은 기량으로 무엇을 남기고 떠날 수 있을지 저는 여전히 자문합니다.
사실 제가 바라는 것은 소소한 행복, '안빈낙도'에 가깝습니다. 때로는 마음에도 없는 지나치게 큰 포부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닌지 솔직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전, 제 몫의 작고 꾸준한 유익만을 주로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모님이 바라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공존합니다. 너무나 큰 빛은 아니라도 그저 세상에 약간의 족적은 남기고 싶다는 생각도 죽음 생각할 때 더 뚜렷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 남겨주는 힘>
아무리 자식이지만 삶의 의미를 타인에게서 찾는 일은, 삶과 죽음에 대한 어떤 철학의 원칙이 있다면 그것에 맞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훌쩍 자라 저에게서 서서히 멀어지는 딸아이를 바라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흔들릴 때면 ‘자식을 위해 살아간다’는 단순하고도 강력한 생각이 저를 지탱해 주었습니다.
젊은 날에는 쉽게 와닿지 않던 문장, memento mori. 이제야 그 곁에 또 하나의 문장을 나란히 놓습니다. memento vivere. 살아 있음을 잊지 말 것. 남의 눈치를 좇지 않고, 제 몫의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고, 제가 떠난 뒤에도 딸에게 ‘멋진 아버지’로 기억되기를 소망합니다. 죽음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고, 그래서 오늘을 기억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