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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꿈의 숲 14화

14화 균형의 다리

너를 믿어!

by 우산을 쓴 소녀
글, 그림: 우산을 쓴 소녀

14화 균형의 다리

-너를 믿어!-

등장인물: 루미나, 구관조 부부, 등반가


마을은 마치 꽃으로만 꾸며진 듯 온통 알록달록한 자연의 색채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연보라, 하늘빛, 연분홍으로 번지는 수국들은 가지마다 포슬포슬 피어올라, 마치 꿈속에서나 볼 법한 풍경을 자아냈다. 루미나는 그 꿈만 같은 꽃밭을 거닐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냈다.


나비가 그녀의 머리 위에 앉아 한참을 동행하였고, 흩날리는 수많은 벚꽃 잎이 흐르듯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아~ 좋다!”


“아! 좋다!”


루미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메아리 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누구야?”


“뭐야! 누구야!


그녀는 또 한 번 놀라 주변을 살폈으나, 주변은 온통 꽃의 달콤한 향에 이끌려온 나비와 벌 뿐이었다.


“이 마을은 메아리 마을인가?”


“이 마을은 메아리 마을인가!”

“앗! 그만해!”

루미나는 두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 그때였다.


무지개 빛을 품은 구관조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왔다. 구관조는 그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으며,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누구야? 넌 누구야?”


루미나는 따끔거리는 듯한 두피의 통증에 짜증을 내며, 구관조의 날개 부분을 잡아끌어내렸다.


주황색 부리를 가진 구관조는 여러 번 날개를 펄럭이더니, 이내 땅에 내려앉았다.


“너야 말로 누구야!”


“안녕! 안녕! 난 레인보우! 레인보우!”


“레인보우? 그게 니 이름이야?”


“레인보우!”


그녀는 같은 말만 반복하는 구관조가 답답하다는 듯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따라오지 마.”


하지만 그녀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던 구관조는 계속해서 뒤를 따르며 떠들어댔다.


“레인보우야??”


“뭐라고? 아니, 난 루미나야!”


“레인보우, 난 루미나!”


“아니, 넌 레인보우, 나는 루미나지!”


“따라오지 마. 이름이 뭐야?”

구관조는 심심하단 듯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의 말투와 소리를 능청스럽게 흉내 내었다.


“미안한데. 내가 지금 좀 바빠. 그냥 좀 가주면 안 되겠니?”


"같이 갈래? 따라와~ 따라와~"


“어딜 따라오라는 거야... 지금 네가 날 따라오고 있는 거잖아?”


“같이 갈래? 따라와~ 이리 와~ 맛있는 거 줄게~ 착하지!”


“... 뭐라고?”


구관조는 그녀를 따라가며,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이리 와~ 이리 와~ 휙! 탁! 잡았다~~~ 잡았다!”


“…”


“같이 갈래? 잡았다! 탁탁탁!!”


“누가 널 잡았구나? 그렇지? 먹을 것으로 유인해서 잡았던 거야?”


“탁! 꽥~! 탁탁!”


“흠...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그녀는 몸을 숙여 구관조와 눈을 맞췄다. 혹시 다친 곳이라도 있을까 살폈지만, 구관조는 아무 이상 없이 말끔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미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실마리가 떠올랐다.


'혼자 있던 게 아닐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피앙새? 그렇지? 너희는 부부였을 거야. 그렇다면, 누군가가 잡아간 거고 맞지?”


“레인보우! 잡았다!”


“레인보우?... 무지개? 무지개라...”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없는데? 혹시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어? 무지개가 있는 곳 말이야.”


신이 난 아이처럼, 구관조는 모래 위를 타닥타닥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뒤에야, 두 사람은 무지개가 떠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비가 그친 마을은 맑게 개어 있었다. 무엇보다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고리 모양의 무지개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무슨 신의 오라 같은 모습인데?”


“레인보우! 전부 갖고 싶어!!”


“잡아간 사람이 그랬어? 전부 갖고 싶다고? 그래서 너의 피앙새를 데려간 거로구나? 그렇지?”


“가자! 잡았다! 가자!”


“그래, 알았어. 얼른 찾아보자.”


바로 그 순간, 멀찍이서 젊은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루미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익숙한 소리에 구관조도 그녀를 재촉하듯 총총거리며 앞서 나갔다.


“쉿! 내가 조용히 데려 올 테니까, 너는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알았지?”


그녀는 숲 속으로 조용히 숨어들었다. 여전히 하늘에는 동그란 무지개가 떠 있었고, 풀 숲은 촉촉한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 마~ 누가 보면 어쩌려고?”


“에이 뭐가 어때서~ 여기 아무도 없는데~ 뽀뽀도 안돼?”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그리고 저 하늘을 봐 무지개도 보고 있다고~”


“자기도 좋으면서~?”


그들은 구관조의 피앙새를 끈에 묶어둔 채, 서로에게 애정을 속삭였다.


루미나는 엉성하게 묶인 끈을 풀어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이리 와~ 조용히!”


하지만 암컷 구관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꿈쩍하지 않았다. 자신을 도와주려는 루미나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암컷 구관조는 그녀를 그저 말똥말똥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등 뒤로 익숙한 모습이 나타나자, 신이 난 듯 날개를 펄럭이며 달려갔다.


커플은 오직 서로에게만 몰두한 채 애정 행각을 벌였다. 그들의 애정 행각을 더 구경하고 싶었던 루미나는 아쉽다는 듯 구관조를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에잇... 아쉽군. 훗.”


“레인보우! 찾았다!”

구관조 커플은 주황빛 아담한 부리를 서로 부비며 반가워했다. 그녀는 그런 둘의 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떠나기 전, 루미나는 암컷 구관조의 몸에 감겨 있던 끈을 끊어냈다. 그리고 조용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잘 가! 잘 살아! 다시는 잡히지 말고! 알았지?”


“레인보우! 고마워! 고마워!”


앙증맞은 구관조 커플은 그녀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나서야, 푸른 하늘을 향해 아름답고 우아하게 날아올랐다.


루미나는 하늘의 무지개가 사라질 때까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어느덧 하늘의 무지개는 서서히 사라지고 노을빛이 온 세상을 감싼 순간, 그녀의 눈앞에 거대하고 날카로운 바위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길 꼭 지나가야 하는 거야? 하... 저 마을에 있던 사람들은 정말 운이 좋았어. 딱 좋은 타이밍에 꿈을 찾았으니... 저곳에서 꿈을 찾지 못했다면, 이 커다란 산을 그들도 함께 넘어야 했을 테니까...”


그녀는 한동안 칼바위 산을 오르길 망설였다.


바위산은 지금까지 걸어온 숲길과는 확연히 달랐다. 온통 뾰족한 날이 선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차가운 기운은 마치 얼음성 같았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가파른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까마득한 높이에 정신이 아찔해지자,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고 차가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루미나의 손은 군데군데 상처가 나기 시작했고, 피가 얼어붙은 듯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도와줘요?”


따뜻한 음성에 이끌리듯,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울겠네. 도와줘요? 말아요?”


“도... 도와주세요.”


칼바위 중턱에서 만난 남성은 밧줄로 루미나를 정상까지 끌어올려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높디높은 산을 안전하게 오를 수 있었다.


“휴… 감사합니다. 죽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상처 없이 버티는 건 불가능했어요. 보세요, 온몸이 이렇다니까요.”

루미나는 상처로 뒤덮인 두 손을 내밀었다.


“저런, 맨 몸으로 여기가 어디라고 배짱 한번 두둑하네요. 정말.”


“그런데 그런 밧줄은 다 어디서 구하셨어요? 그런 장비들은 전문 산악인 분들이 사용하시는 물건 아닌가요?”


“방금 찾았어요. 방금 그 산 중턱에서요. 내 어릴 적 꿈.”


“와~ 정말 멋진 꿈이에요. 전문 산악인! 그 히말라야 원정대 같은 그런 거죠?”


“맞아요. 드디어 찾았네요. 이 꿈의 숲에서 꽤나 오래 헤맸는데 말이죠...”


“꿈의 숲에서 떠나려니, 아쉬우세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저... 꿈을 찾았지만, 외부세계에 있는 가족들 생각에 걱정이 돼서요...”


“꿈의 구슬을 가지고 나가면, 꿈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혹시 그것 때문이에요?”


“네... 내 꿈만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요.”


“딜레마네요. 그렇다면 가족들을 이곳으로... 자녀분들이 많이 어린가요?”


“네, 첫째는 5살, 둘째는 이제 2살이 되었어요. 아내는 날 믿어주고 꿈의 숲 열차까지 배웅해 줬어요. 그런데 산악인이 꿈이란 걸 알게 되면...”


“그래서 꿈의 구슬을 두고 가시려고요?”


“그래야죠. 두고 가야죠. 알았으니 되었죠.”


“아내분께는 뭐라고 하실 건데요? 찾았지만 그냥 두고 왔다고요?”


“아뇨. 못 찾았다고 거짓말해야죠. 착한 사람이라 같이 찾으러 가자며, 따라나설지도 모르니까요.”


“그렇죠. 꿈의 숲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꿈을 찾지 못해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어라? 그럼, 꿈의 구슬을 두고 나가는 것도 가능한가요?”


“글쎄요. 아마도?”


“확실한 딜레마네요. 두고 나갈 수 없게 되면, 가지고 나가더라도...”


“다들 꿈의 숲을 너무 가볍게만 생각하고 찾아온 것은 아닐까 싶어요... 갑자기 후회가 되네요.”


“어릴 적 꿈! 순수했던 등반가님이 열망하던 그 무엇! 그것에 후회라뇨... 구해주셔서 감사하기는 하지만,

방금 그 말은 꿈을 찾지 못하고, 아직도 여정 중에 있는 제게는 너무 아픈 말이에요.”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들 경각심 없이 그저 놀러 오듯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란 것은

그쪽도 이미 느끼지 않았나요?”


“그건 그렇지만...”


“이곳이 어떤 세계인지는 모르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올 곳은 아니라는 점만 기억해 둬요. 후회란 말은 거두겠습니다. 만약 꿈을 두고 떠날 수 없다면, 가진 채 나가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때는 당신 말을 꼭 기억하죠. 순수했던 내가 그토록 열망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고.”


함께 걷던 숲길이 돌연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계단길을 택해 내려갔고, 루미나는 물이 흐르는 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혼자가 된 그녀는 밤새 계곡물이 넘쳐흐른 듯한 길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온갖 이끼들이 상처투성이인 손에 쓸리자, 아릿한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힘겹게 산길을 내려가던 그녀는 멀리 다리 하나를 발견했다. 바쁜 걸음으로 다리 앞에 다다르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다리 위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었다.


다리는 서로 겹겹이 포개져 있는 기이한 구조였다. 한 사람이 발을 올리면 다리가 크게 기울었고, 그럴 때마다 다리 위의 사람들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렇게 옆으로 매달린 다리들은 옆 산까지 쭉 이어져있었다.


“뭐야, 대체. 여길 어떻게 건너라는 거야?”


얼떨결에 첫 다리에 발을 딛는 순간, 다리가 삐걱거리며 한쪽으로 걷잡을 수 없이 기울었다. 줄에 매달린 다리가 크게 한 번 출렁이더니, 이내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사람들이 떨어지려던 찰나, 루미나는 재빠르게 겹쳐 있던 다른 다리 위로 몸을 날렸다.


루미나의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다리는 빠르게 균형을 되찾았지만, 중앙에 서 있던 한 여자는 충격에 굳은 얼굴로 루미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균형을 깨지 말고 가! 이곳은 균형이 맞지 않으면 다 떨어진다고!”


“균형의 다리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다들 왜 이렇게 가만히...”


“쉿!!! 조용!!”


다리에 갇힌 사람들은 균형이 깨질까 두려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몸을 옮겨가며, 위태로운 흔들 다리에 붙들려 있었다.


루미나는 더 이상 그곳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세 번째 다리 위로 재빠르게 올라섰다. 그러자 그녀가 떠난 다리가 미친 듯이 출렁였고,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균형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세 번째 다리 위에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지만, 루미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다음 다리로 올라섰다.


네 번째 다리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루미나는 그 후로도 여러 다리들을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었다.



“혼자 빠르게 건너면 쉬운 구조인데, 어쩌다 저렇게 된 건지...”


그녀는 그들에게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그녀가 건너온 다리는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위태롭게 균형을 잡은 채 서 있었다.


“그냥 가자, 가야만 해.”

루미나는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영혼의 부름에 따라 다음 목적지로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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