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홍수, 받아들임!
15화 대홍수
-감정의 홍수, 받아들임!-
등장인물:루미나, 옛 친구[보연], 골든[골든레트리버]
루미나는 드디어 70년대 섬과 완벽한 작별을 하였고, 더 이상 검은 연기의 사람들을 피해 도망 다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하늘의 장난이었을까. 그곳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숲을 막 벗어난 그녀는 쏟아지는 비를 피해 몸을 숨길 곳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포장된 도로 위를 걷던 루미나의 맞은편으로 외관이 깔끔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건물 안은 사람들이 머물렀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지하층과 지상 2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건물 곳곳에서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폭우를 피해 모인 그들은 더 이상 여정을 이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콘크리트 건물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루미나는 말없이 유리문 너머로 쏟아지는 폭우를 바라보았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는 끝없이 쏟아졌고, 하늘은 컴컴한 호수처럼 어둡고 진했다.
그 순간—
멀리서 들려오던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건물 안으로 가득 울려 퍼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누군가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루미나는 몸을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복도 모퉁이 끝에서 어떤 여인이 울음을 터뜨린 채,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그녀는 흐느끼며 루미나의 팔에 꼭 붙어 애원하듯 울부짖었다.
“무슨 일이에요?”
“제가 오는 길에 꿈을 찾았는데, 그만 꿈의 구슬을 지하에 두고 나왔어요. 어떡하죠?”
그녀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흐르고 있었다.
“잠시만요.”
루미나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지하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밟고 내려서자 지하층은 이미 물에 잠긴 뒤였다. 조명은 서늘하게 피어올랐다 꺼졌다를 반복하며 그 너머의 알 수 없는 심연의 끝을 간신히 드러냈다.
1층으로 올라온 루미나는 조용히 여인에게 다가갔다.
“이미 손 쓸 수 없을 만큼 물이 많이 차올랐어요.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여인은 그대로 주저앉아,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루미나는 어느새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흐느끼는 여인을 그대로 지나쳤다. 그러곤 빗물을 막으려 돌을 쌓고 있는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가 일을 거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노력에도 비는 멈추려 하지 않았다.
루미나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무작정 폭우가 쏟아지는 길 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배가 필요해. 이대로라면 저 건물이 잠기는 걸 물론이고, 이 마을 전체가 물속에 잠길지도 몰라!”
그녀는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빗속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범람한 바닷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물가에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때였다.
항해사 탈렌의 도움인지, 아니면 그의 젊은 영혼의 은혜인지, 그녀가 누군가를 태워 보냈던 작은 보트 한 대가 거센 물살을 타고, 기적처럼 떠내려온 것이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기적 같은 광경에, 이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
폭우처럼 쏟아지던 루미나의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려온 마음을 씻어 내렸다.
한동안 꼼짝 않고 서서 울던 그녀의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숲 사이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젠가 본 듯한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서 있었다.
루미나는 눈을 비비며, 또다시 환영을 보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커다란 귀를 쫑긋 세운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신이 난 듯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개의 따뜻한 털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자, 루미나는 비로소 모든 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숲 속에 멍하니 서 있던 여인도 루미나를 알아본 듯,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오래전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였다. 여인은 풀숲을 헤치고 나와 루미나의 앞에 다가섰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어. 너는?”
“응, 나도 잘 지냈지.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야? 너도 꿈을 찾으러 왔어?”
“아니, 딱히 뭘 찾으러 온 건 아니지만 목적이 생긴 건 분명해.”
“목적? 그렇구나... 그럼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야?”
루미나는 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배 타고 나가야지.”
“운전할 줄 알아?”
“응. 꿈의 숲에서 배웠어.”
“역시, 넌 어릴 적부터 뭐든 빨리 배우는 아이였어. 가끔 그런 널 보면서 멋지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질투가 나기도 했지.”
루미나는 어릴 적 기억이 불편한 듯,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밀려든 파도에 떠내려온 보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꿈의 숲에서 수많은 길을 걸어온 루미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책임감과 결심이 그녀의 눈빛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친구는 그런 루미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조심스레 루미나에게 다가갔다.
“혹시 배에 자리가 남으면 말이야... 나도 좀 데려갈 수 있을까?”
“그럼 계속 여기 있으려고 했어? 그 개도 데려와.”
거센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루미나는 불어난 물살에 흔들리는 보트에 몸을 싣고 올라탔다. 그녀는 조종대를 단단히 잡고 방향을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기억해. 이 바다... 목숨 걸고 건너야 해.”
“여기서 죽은 사람은 없다고 들었는데?”
“죽지는 않지만, 다칠 수는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
“죽지는 않지만... 다친다라, 글쎄...?”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야. 물에 빠져 죽지는 않겠지만, 네가 보고 있는 이 상처들은 진실이야. 그러니까 만약 물에 빠지면 어떻게 될지 잘 생각해 봐.”
“무서워... 혹시 영원히 잠드는 것처럼...”
“그럴 수도 있지. 이곳에 그대로 남겨지거나, 바다에 가라앉거나. 어쩌면 이 땅의 신이 혼수상태인 그를 꿈의 숲 밖으로 내던질지도 모르지.”
“설마... 내던져졌다면, 모두가 봤을 거야.”
“그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사람들은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않을 거야.”
“그럼, 가라앉았... 잠깐만... ”
루미나의 어릴 적 친구는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채 결국 배 위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정말 성가신 녀석이야. 여전하네.”
그녀는 더 이상 말이 없는 친구가 오히려 반가운 듯했다.
그녀의 보트가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자, 이내 바다는 잠잠해지고 빗소리도 점점 옅어졌다. 곧 구름이 걷히며 따스한 햇살이 수면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그녀들은 섬 끝자락에 자리한 대나무집에 도착했다.
집은 작고 아담했으며, 자연이 직접 꾸민 듯 벽과 처마 사이로 풀과 꽃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홍수로 물이 가득 찬 섬 가운데, 유일하게 잠기지 않은 그 집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 보였다.
비가 그치고, 물결이 출렁이며 반사된 집의 형상이 꿈처럼 일렁였다. 현실이 아닌 듯, 그 고요함 속에서 대나무집은 마치 세상과 단절된 또 하나의 세계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보트가 섬 가장자리에 다다르자, 루미나는 조종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여기에 머물 거야. “
루미나의 친구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받아들일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난 돌아갈 거야. 같이 가자.”
“어디로 돌아간다는 거야? 꿈을 찾으러?”
“아니! 당장 나가야지! 이곳을!”
“길은 알아? 밖으로 나가는 길 말이야.”
“아니.”
“그럼 어디로 가려고?”
“어떻게든 가보자!”
“보연아...”
루미나는 무심코 다정한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그녀의 눈빛은 다시 차갑게 굳어버렸다.
“가고 싶으면 혼자 가. 원한다면 보트 모는 법도 알려줄게. 아, 아니지. 저기 나룻배 보이잖아? 노 젓는 법도 알 텐데. 알아서 잘 가.”
그녀는 섬 근처에 버려지듯 놓여있던 나룻배를 가리켰다.
“대체 너란 애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엉뚱한 건 여전하네. 왜 이 폭우를 뚫고 사람 하나 없는 곳에 온 거야? 봐, 눈에 뻔히 보이잖아! 이 텅 빈 대나무 집 말이야!”
“말 좀 그만하고, 니 개나 데려가.”
“내 개? 무슨 개? 이 개?”
“니 개 아니야?”
“아니야, 난 니 개인줄 알았는데?”
“하... 아니 이건 또 뭔 소리야, 네가 숲 속에서 달고 왔잖아.”
“아무튼! 내 개 아니야! 그래, 여기서 평생 살든 네 마음대로 해. 넌 여전히 꿈만 좇고 다니는구나? 그렇지?
이런 경험쯤 했으면 정신 차릴 법도 한데, 아직도 꿈이나 좇고 다니네?”
“너 지금 엄~~ 청 우스운 소리 하고 있는 거 알지? 그런 너는 여기 왜 온 건데 꿈 찾으러 온 거 아니야?”
“난 꿈을 이뤘어!! 그것도 여러 번이나!!”
“꿈을 이룬 사람이 이곳에 왔을 리가 없잖아. 여전히 멍청하구나?”
“넌 꼭 그렇게 화가 나면 인신공격을 하더라? 멍청이라는 둥!”
“아... 진짜 피곤하네. 이제 그만 좀 가줄래? 얼른 배에서 내려. 저기 뒤집힌 나룻배나 잘 세워봐. 있는 힘을 다해서... 여기선 도와줄 사람 하나도 없으니까, 혼자 힘으로 말이야.”
친구 보연은 씩씩대며 보트에서 내린 뒤, 말없이 뒤집힌 나룻배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이를 악문 채 몇 번이고 배를 바로 세우려 애썼다.
수차례의 헛된 시도 끝에, 보연은 마침내 배를 뒤집었다. 노를 젓자마자 배는 갈피를 잃고 흔들렸지만, 그녀는 곧 단단히 방향을 잡아 앞으로 나아갔다.
“야! 루미나! 바보는 너야!!”
친구 보연은 마치 루미나를 이긴 듯한 표정으로 큰소리를 치며 섬에서 멀어져 갔다.
루미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그녀는 똘망똘망한 눈과 축 처진 귀가 매력적인 친구와 함께 섬에 머무르게 되었다. 영리하고 민첩한 그 친구는 말없이 그녀 옆에 서서, 따뜻한 눈빛으로 루미나를 바라보았다.
“니 이름은 골든로 하자.”
루미나는 자신을 바라보던 개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양손을 뻗어, 마치 먼지를 털듯 개의 털을 이리저리 흔들며 쓰다듬었다. 골든은 그녀의 손길이 좋았는지 얌전히 따르고 있었고, 가끔 꼬리를 살짝살짝 흔들어 댔다. 털은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손끝에 느껴지는 온기가 되려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녀가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서자, 골든도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대나무 집은 잠을 잘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낡은 나무를 그대로 잘라 만든 기다란 의자가 있었고, 침대 옆으로 작은 사각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골든은 바닥에 몸을 뉘었다. 골든의 숨소리가 마치 자장노래처럼, 루미나의 귀를 간지렸다.
그녀는 깊은 피로감에 침대 위로 향했다. 골든과 그녀는 나란히 잠에 빠졌다.
낮이 서서히 어둠에 잠기고, 창문 틈으로 부드러운 솔솔바람이 불어왔다.
방 안은 고요했으며, 시간은 달려 나가듯 어느새 새벽으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눈을 뜨자 물에 잠겼던 섬은 마법처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촉촉한 흙 길 위로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나 있었고, 햇살은 섬 전체에 부드러운 금빛 가루를 흩뿌리고 있었다.
골든은 꼬리를 살랑대며, 그녀를 향해 커다랗고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골든, 우리 산책 갈까?”
“왈왈!”
“그래, 나가자!”
문을 나서자 촉촉한 땅은 진한 흙냄새를 풍겼고, 그 위로 수많은 꽃들과 생명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녀의 눈앞으로 노란 금잔화와 하얀 은방울꽃들이 제각기 바람에 살랑이며 빛났고, 그 풍경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신이 난 골든이 숲을 향해 달려 나가자, 길가에 피어 있던 꽃들이 바람을 따라 고개 숙여 인사하듯 흔들렸다.
“신났네, 골든.”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미나의 얼굴에 엄마의 미소처럼 따뜻한 웃음이 번졌다. 이윽고 숲의 향기가 불러온 잔잔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스치며 지나갔다.
골든과 함께 쉬기에 좋은 아담한 집이었다.
그녀는 젖은 땔감들을 햇볕에 널고 주변을 정리하며, 새로운 시작을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