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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꿈의 숲 16화

16화 치유의 숲

감정의 수용, 내려놓음!

by 우산을 쓴 소녀
글, 그림: 우산을 쓴 소녀

16화 치유의 숲

-감정의 수용, 내려놓음-

등장인물: 루미나, 남성 1


루미나가 하얀 대나무집에 머무는 동안, 그곳의 나날들은 햇살처럼 따스하고 평화로웠다.


그녀와 골든은 저녁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고, 낮에는 알록달록한 들판을 함께 뛰놀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골든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숲 너머로 자취를 감춘 그는 루미나의 부름에도 끝내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골든을 찾아 숲 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부스럭-


고요하던 숲의 정적을 깨뜨린 소리에 루미나의 몸이 얼어붙었다.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나무 뒤에서 한 남자가 그녀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길게 늘어진 흰머리, 창백한 입술, 눈빛은 무언가에 불타오르는 듯, 그녀 가까이 다가온 그는 그녀의 양팔을 붙들고 미친 사람처럼 외쳐댔다.


“이 숲의 지배자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우린 더 이상 이 아름다운 환영에 속아선 안돼! 이건 감옥이야! 완벽하게 설계된 꿈의 감옥!”

오래도록 열기를 더하던 그의 외침은 해가 저물어 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갈라지기 시작했고, 창백한 입술은 푸른빛이 돌기 시작하며, 더욱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고난과 고통을 겪었는지 알아? 얼마나 많은 날들을 이 숲에 쏟아부었는지 아냐고! 우리는 다 함께 숲의 설계자를 찾아가야 해! 그리고 따져야지! 암~ 그렇고 말고!”

그의 끝없는 하소연에 지쳐버린 그녀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난 분명, 운명에 의해 이곳으로 왔고 이제야 목적이란 것이 생겼어요. 당신도 꿈을 찾으러 온 거죠? 맞죠?”


“...”


“이곳에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꿈을 찾으려 하지 않고, 마치 모든 걸 잊은 듯 방황하다 정착해 버리는 걸까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잊은 채로 말이죠...”


“...”


“당신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을 잊은 거죠?”


그녀의 말에 남자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혐오감을 감추려는 듯 그는 금세 웃음의 가면을 쓰고

루미나를 향해 날 선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 너 같은 애들은 늘 그렇지 뭐. 남들이 피 흘릴 때 늘 뒤에 숨어있지. 너야 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꿈? 큭큭큭. 그건 도망치는 핑계를 대고 있는 거라고! 안 그래?”


루미나는 남성의 말에 잠시 흔들렸지만 곧 알아차렸다.


그의 말은 껍데기뿐인 선동이었고, 그 밑바닥엔 누군가의 불안을 발판 삼아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려는

날 선 욕망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무엇으로부터 도망을 간다는 거죠? 그리고, 이곳에 온 목적은 운명과 각자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어요. 설령 설계자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를 향해 대체 뭐라고 비난할 거죠?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적 잃어버린 꿈을 찾으러 오죠. 저 역시 영혼의 뜻에 따라 이곳으로 오게 되었고요. 수많은 여정이 목적을 만들었고, 이제야 겨우 꿈의 숲에 서 있는 이유를 찾았는데...”


남자는 루미나의 말을 무시하는 듯, 오직 자신의 말만이 중요하다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래, 너 같은 애들이 꼭 있지. 이 꿈의 숲의 거짓 평화가 진짜라고 믿는 건 네 자유야! 하지만 그게 얼마나 우스운 건지만 알아둬! "


표정은 여전히 냉소적으로 굳어 있었지만,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은 말과는 달리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남자가 떠난 뒤, 루미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마음속에 잠시 머문 불안과 함께 그녀는 잃어버린 골든을 떠올리며, 망설임 없이 숲 속으로 향했다.


이제 곧 새벽이 올 시간이었지만, 숲은 오히려 더 눈부셨다.


달빛은 유난히 밝고 차분했으며, 그 빛은 숲 전체에 닿아 모든 형태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숲은 그들만의 밤중 놀이를 즐기듯 반딧불이들이 여기저기 떠다니기 시작했고, 반짝이는 초록빛의 작은 불꽃들이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풀숲 너머, 작은 동물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고 루미나의 발자국 소리에 이따금씩 잠자던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루미나는 고요한 숲의 아름다운 밤을 골든도 함께 보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날이 밝아올 때까지 골든을 찾아 숲 속을 헤맸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모든 힘을 다해 골든의 이름을 외쳤다.


“골든!!!! 골든!!!! 골든!!!!!!!!!!!!!!!!!!”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나무들 사이로 흩어져갔다.


숲 속은 여전히 고요했고, 간혹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만이 평온을 실감케 했다.


"골든은 이곳에 있던 아이였을 거야. 동물은 데리고 들어 올 수 없으니, 꿈의 숲에서 아무 탈없이 잘 지낼 수 있겠지..."


그녀는 골든과의 추억이 담긴 하얀 대나무 집을 뒤로 한채, 길을 나섰다. 숲의 길은 어느새 좁다란 오솔길로 변해있었고, 지친 걸음으로 걷던 그녀는 텀텀이 놓인 나무 의자들을 발견하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비스듬한 의자는 그녀의 시선을 하늘 위로 데려갔다. 눈앞에는 커다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새들의 움직임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 빛에 따라 흔적을 남기며 사라져 갔다.


잠시 그녀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맑고 청량한 물소리에 이끌리듯 다가섰다. 파란 하늘에는 버섯구름이 한참 피어 있었고, 그녀는 찰랑이는 물결에 몸을 맡기듯 순응했다.


길 끝에는 겨우 세 걸음 남짓한 짧은 나무다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다리는 마치 새로운 마을로 들어서는 경계처럼 그녀를 이끌었다. 발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는 여전히 찰랑이는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루미나는 다리의 끝을 밝고, 물소리가 흐르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다리를 건너자, 그녀의 눈앞에 완전히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이게 대체 다 뭐야?”


그녀의 눈앞에는 거대한 장미꽃과 튤립들이 우뚝 솟아 있었고, 활짝 핀 해바라기들은 마치 커다란 파라솔처럼 펼쳐져 있었다.


꽃들의 잎줄기는 마치 장성한 나무 한그루처럼 굵고 단단했으며, 그 아래를 지나던 그녀는 마치 다른 종의 존재가 된 듯 작아져 있었다.


“유전자 변형이라도 된 건가? 정말 꿈의 숲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니까?”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팔뚝만 한 꿀벌 한 마리가 귓가를 윙 하고 스쳐 지나갔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루미나가 눈을 뜨자, 사람 머리만 한 민들레 씨앗들이 하늘을 가득 메운 채 날아다니고 있었다. 다시 한번 혼절할 뻔한 그녀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저건 벌이 아니라, 괴물이잖아? 으~”

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길가엔 온갖 종류의 버섯들과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나 있었고 동물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동물들은 보이질 않네. 그나저나...”

루미나가 언덕길을 오르던 그때, 땅이 꿈틀거리더니 거대한 지렁이의 머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지렁이는 천천히, 묵직하게 땅을 파헤치며 나아갔다.


“휴~ 지렁이였네. 땅 속의 농부! 힘내!”


그녀는 느릿하게 땅을 기어가는 지렁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응원의 마음을 건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멀리서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대한 식물들과 곤충들 사이에서도 유독 압도적인 크기의 나무였다. 그 굵기만 해도 운동장 하나를 통째로 감쌀 만큼 거대해 보였다. 나무에는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 수많은 날개들이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다.


“도대체 이곳은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이야? 날개는 또 뭐지? 이것도 마을의 영물 같은 것일까?”


그녀는 숲 한복판에 떡하니 버티고 선 거대한 나무의 위압감을 느꼈다. 마치 누구도 지나가지 못하게 길을 막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높이 매달린 신비로운 날개들을 한 번쯤 따보고 싶다는 충동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녀는 가슴에 품고 있던 우산을 슬쩍 바라보곤, 다시 날개로 시선을 돌렸다.


바람이 불자, 나무에 매달린 수많은 날개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흩날렸다. 바로 그때, 나무 아래에서 '툭'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개다!”

루미나는 날개가 떨어진 곳을 향해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달려갔다. 그러나 떨어진 건 하나의 날개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키만 한 날개를 정성스레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한쪽 날개로는 날지 못하잖아?”

루미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날개를 안아 들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나무 위에는 아직도 수많은 날개들이 미동도 없이 매달려 있었다.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오면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새들처럼 일제히 일렁였다.


“날개 하나... 꼭 찾을 수 있을까?”

루미나는 품에 안긴 날개를 소중히 감싸 안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커다란 나무가 앞을 가로막았다. 돌아갈 곳도, 피해 갈 길도 없었던 루미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나무의 둘레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거대한 나무의 몸통을 따라 걷는 동안, 그녀는 문득 오래전 함께 길을 걸었던 샘을 떠올렸다.


“대체 이곳에 얼마나 있었던 걸까?”

루미나는 샘의 얼굴조차 가물해질 정도였다.


“이제는 탈렌의 얼굴도 전혀 떠오르지 않아... 이러다 나도 그들처럼 기억을 잃는 건 아닐까? 내 목적을... 지금 이곳을 걷고 있는 이유를 말이야.”


그녀는 거대한 곤충이나 길을 잃는 것보다, 자신의 목적과 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공포감에 휩싸였다.


“이대론 안 되겠어.”


루미나는 떨려오는 양손을 억지로 눌러 진정시키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손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버텨야 해... 걸어가야 해, 나의 길이야...”


그 사이 숲에는 어느새 어둠이 깔렸다. 밤새도록 나무를 돌아 걷던 루미나는 나뭇잎 사이로 들려오는 희미한 물소리를 들었다. 그곳에는 날개 나무가 감춰 둔 에메랄드빛 호수가 빛나고 있었다.


“정말 신비로워. 마셔도 되는 물일까?”


그녀는 물가로 다가가 두 손을 모아 물을 떠 올렸다. 차갑고 깨끗한 물이 손바닥 가득 담겼다. 그 물을 조심스럽게 입가로 가져가자, 맑은 물이 목을 타고 시원하게 흘러내렸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에 몽롱해진 루미나는 휘청거렸다. 결국 별빛 같은 반딧불이들 사이로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일어나, 루미나. 얼른!”


“응?! 누구야?...”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정신 차려!”


“새... 샘?? 샘 맞지?!”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이런 곳에 쓰러져서 뭐 하는 거야. 대체 어디서 길을 잃은 거야? 기억해?”


“그... 열차...! 그래, 열차를 놓쳤어. 흑흑흑. 샘을 놓쳤어. 원앙 같던 에드부부도...”


“이런, 이런 기억이 소실되었군! 원앙은 무슨!”


“내 기억? 기억이 잘못된 거야?... 안돼... 안돼.”


"그 부부는 원앙이 아니라,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하는 까치랑 까마귀 사이 같았다랄까? "


"아, 하하. 난 또...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온 건 아니지? "


"왜 아니겠어! 난 루미나가 어딜 가든 다 알 수 있으니까. 헤헤. "


"샘, 웃는 거 보니까 너무 기분 좋다. "


"이제 일어날 수 있지? 기운 내서 또 만나야지. "


“응? 누굴 만나?”


“루미나. 나 여기서 꼭 기다리고 있을게. 알겠지? 우리 둘만의 약속이야.”


“어디서... 기다린.. 다는.”


루미나가 쓰러진 사이, 잠시 샘의 꿈을 꾸었다. 꿈의 숲에서 당당하게 홀로 걸어왔지만, 결국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눈앞의 호수가 넘쳐흐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온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울고는 그대로 잠에 들었다.


루미나는 쓰러져 잠든 사이, 샘에 대한 꿈을 꾸었다. 꿈의 숲에서 당당하게 걸어온 그녀였지만, 결국 호수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호수가 넘쳐흐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온몸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었고, 그렇게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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