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야, 안녕!
21화 무인학교
-과거야, 안녕!-
등장인물: 루미나, 이연
환상적인 픽셀들이 흩어지고 눈앞의 색채가 흐려지자, 그들은 무인 학교의 조용한 복도에 서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와, 무슨 순간이동한 줄 알았어요.”
“그렇네요. 여기는 학교 같은데요?”
"학교 안은 확실한데, 설마 이곳에 괴수가 나타날 리는 없겠죠? 은정은 이곳으로 왔을까요?"
“모르죠. 또 다른 길이 있었는 지도요. 나갈 수 있는 길이 한 곳은 아닐 수 있죠. ”
아무도 없는 듯한 학교 안으로 주홍빛 노을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무인 학교의 정적 속을 걷던 그들은 순간,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놀라 주위를 살폈다.
학교 안을 가득 메운 것은 전자음도 사람의 음성도 아닌, 차갑고 균일하게 조율된 어떤 소리였다.
“두 사람, 지각입니다. 무한대의 교실로 얼른 들어가세요.”
루미나와 이연은 당황스러운 눈빛을 교환하며, 멀리 보이는 무한대 표식의 교실로 향했다.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출석 확인 후, 숙제 검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기계적인 목소리는 감정 하나 없이 명령을 반복했다.
이연과 함께 무한대의 교실로 들어서자, 그 안에는 꿈의 숲을 여행하던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때, 계속해서 울리는 무인학교의 명령에 루미나와 은정은 어쩔 수 없이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댄 순간, 그들의 책상 위로 종이와 필기구가 홀연히 나타났다. 여전히 그 기계적인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제출되지 않은 숙제는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각자 지난 과제를 검토하여 제출해 주세요.”
당황한 루미나가 종이를 들여다보았으나, 역시나 백지였다. 이제 막 이곳에 도착했을 뿐, 숙제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이연은 옆 사람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무슨 숙제예요? 대체 뭘 해야 하죠?”
옆에 있던 한 남자는 눈을 크게 뜨며 경고하듯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문제 안 풀면... 큰일 날지도 몰라요. 예전에 벌 받은 사람도 있어요. 이 학교는 무서워요. 무조건 따라야 해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계음이 한층 더 또렷하게 교실에 울려 퍼졌다.
“숙제 미제출자 3명. 주의 대상 등록. 재촉구 1회 이후, 경고 조치가 시행됩니다.”
이연이 속삭이듯 루미나를 향해 말했다.
"왜 3명이죠? 은정! 은정이에요. 그 녀석은 아마 교실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런 소리가 울려 퍼지고 노을 지는 학교라면, 무조건 밖으로 뛰었을 거라고요. 우리도 나가야 할 것 같아요."
교실 안의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누군가는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의자에 등을 기댔고, 또 다른 누군가는 종이를 구기듯 움켜쥐었다. 마치 하얀 종이가 그들에게 숙제가 아닌 심판인 것처럼.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을 때, 단죄를 받은 듯 고개를 푹 숙이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 무거운 침묵과 긴장이 교실 전체를 조용히 조여오며, 이연과 루미나의 존재마저 낯설게 만들었다.
루미나는 눈앞의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오래된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초등학생 시절, 겨울밤. 학원 강사는 그녀를 교실에 혼자 남겨두며 말했다.
“문제 다 풀기 전엔 절대 못 나가.”
몇 시간이 흘렀을 무렵, 건물의 불이 하나씩 꺼지더니, 모든 불빛이 사라졌다. 문은 굳게 잠겼고, 학원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 깜깜한 복도, 교실 한편에 쪼그려 앉아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울던 아이.
그러한 기억이 루미나의 머릿속에 각인되며, 그녀의 동공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의 교실, 기계음, 이 억압적인 분위기. 그날의 그 어둠과 너무 나도 닮아 있었다.
루미나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꾹 움켜쥐었다. 두 손으로 종이를 찢듯이 구겨대며,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녀는 기억의 감옥이, 다시 눈앞에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가슴속 끌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삼켰다.
칠판에는 그들이 제출하지 못한 문제 하나가 적혀 있었다.
‘인생이라는 입자는 위치(현재 상태)와 운동량(미래의 방향)을 동시에 정확히 결정할 수 없다 한다. 그러나 본 시스템은 인생의 모든 선택과 길은 반드시 명확하고 확정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당신은 자신의 미래와 현재를 완벽히 통제하고 예측할 수 있음을 증명하라.’
루미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건 애초에 풀 수 없는 문제야!! 각자의 길은 자신만이 정답을 알고 있으니! 이 문제가 틀렸다는 것!! 그게 바로 정답이라고!”
루미나가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칠판을 향해 소리치자, 교실 안은 금세 술렁였다. 그녀에게 반박하는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미친 듯이 자신들의 답안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우린 다 했어!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이 문제의 정답은 말이야! 남들이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거라고!”
“숙제 안 하면 여기서 절대 못 나가! 너 때문에 여기 꼼짝 못 하게 생겼잖아! 책임져!”
“정신 차려! 이건 학교야, 네 마음대로 되는 곳 아니라고! 알아들어? 정답은 정해져 있어!”
그들은 거친 목소리로 루미나를 몰아붙이며, 종이를 쥔 손으로 위협했다. 루미나는 그들의 위협적인 행동에서 집착과 두려움이 만든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다.
그들의 반응에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담아 강직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루미나와 이연이 교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문 앞에 섰다. 그 순간, 문이 쾅하고 거세게 닫혔고 그 소리에 놀란 이연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교실 안의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모두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잠시 망설이던 루미나는 문을 거세게 걷어찼다. 문이 요란하게 부서지며 열리자, 그녀는 이연의 손을 잡고 재빠르게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학교 전체에 비상경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며, 그녀들을 붙잡아두려는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듣지 말아요! 이연! 귀 막아요.”
그 음성에는 인간의 심리를 자극해 죄책감과 자책감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들이 섞여 있었다. 그중에는 이연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심지어 이연의 엄마 목소리를 흉내 내는 소리도 뒤섞여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듣지 말라고요! 이연! 귀 막아요!”
이연은 루미나의 말에 따라 두 귀를 꾹 막고, 건물 출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붉은 경고등이 깜빡이고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지만, 무인 학교가 할 수 있는 건 겨우 문을 봉쇄하는 것뿐인듯했다.
“진짜 무인학교인가 봐요! 아무도 안 나오네요!”
“그러게요! 겁낼 일은 없지만, 이 소음은 정말 거슬려요! 빨리 출구부터 찾아봐요!”
계단을 내려오던 루미나와 이연은 1층 계단 앞으로 보이는 출입문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유리창!! 유리창을 깰 만한 도구!”
“저기!!”
루미나는 복도 끝 진열장에서 트로피를 낚아챘다. 그리고 굳게 닫힌 출입문의 유리창을 향해 그대로 힘껏 내던졌다.
“이연, 이 밑으로 나가요!”
“네, 먼저 나갈게요!”
어두워진 운동장 위로 붉은 경고등의 빛줄기가 교차하며, 그녀들을 쫓기 시작했고 감지 센서가 작동할 때마다
경고음이 운동장 가득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루미나와 이연은 두 귀를 막은 채 달렸다. 뒤쪽에서 쏟아지는 괴상한 소리들과 붉은빛을 외면한 채, 정문을 넘어 숲길로 접어들었다. 미세하게 들려오던 비난의 목소리와 심리적 압박감을 주던 잔인한 고문의 말들은 점차 흐려지며, 그들의 정신에서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안 들리죠?!”
“정말... 세뇌교육이 뭔지 알 것 같네요. 짧은 순간이었는데도 마음이 흔들렸어요. 그 목소리들이 마치 내 기억을 조작하려는 것처럼 들렸어요.”
“저런 소리들은 외부 세계에서 익숙하게 들었었어요.”
“아, 그렇죠. 영매시니까... 귀신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죽은 자는 말이 없어요. 죽은 이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산 자들의 목소리죠.”
"산 사람들이요? 그냥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신 거예요? 그건... 그 영화에서 봤는데 속마음을 읽는 뭐 독심술인가요? "
"아뇨. 정확히 말하면 사념의 목소리들이에요. 그들의 에고 같은 거죠. "
"아... 에고... 정말 괴롭겠네요."
"처음에는 무서웠죠. 시간이 흐르니까 사념이 꼭 부정적인 말들만 해주는 게 아니더라고요. 누군가의 에고도 존재하지만, 누군가의 희망과 격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물론, 고도의 집중력과 마음 수련을 게을리하면 안 되지만요. 그래도 이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고 있어요."
"네... 어렵군요. 쉽지 않은 길이에요."
어느새 붉은 경고등의 깜빡임도 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갔다.
루미나와 이연은 숨을 고른 뒤, 어딘가로 사라졌을 은정을 찾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숲은 짙은 안개에 완전히 뒤덮여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축축한 한기와 습기가 그들의 몸을 감쌌고, 나무들은 검은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가만히 잠겨 있었다.
안개 사이로 흐릿한 빛만이 낮과 밤을 겨우 구분하게 해 주었을 뿐, 주변은 온통 뿌옇고 무거운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두 사람은 숨죽인 적막 속에서, 밤이 가득히 내린 길을 손끝으로 더듬어 가며,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