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전사들이여!
22화 전설의 마을
-위대한 전사들이여!-
등장인물: 루미나, 은정, 이연, 카인(마을의 우두머리), 레아(카인의 오른팔)
그들이 걷는 길은 방금 전까지 비가 쏟아진 듯 온통 축축했다. 질척이는 진흙으로 뒤덮인 길을 걸을 때마다, 불쾌한 감각이 발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나뭇잎과 가지들에는 빗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숲 속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동물들의 신음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축축한 대지 위에서 무언가가 숨죽이고 기다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영~ 기분이 좋지 않네요...”
“네, 영매가 아닌 저도 이런 곳은 느낌이 별로예요.”
“그나저나 은정은 혼자서 이 먼 길을 왔을까요?”
“겁 많은 녀석이 혼자 숲을 지나갔을 것 같진 않아요... 길이 엇갈렸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걸지도 모르죠.”
이연은 꿈의 숲 어딘가를 혼자 헤매고 있을 은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루미나를 바라보았다.
“흠...”
루미나는 이연의 그런 표정을 이해한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엇!”
그때, 갑작스러운 한기를 느낀 루미나는 곧바로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연은 또다시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저 멀리 그녀들이 발견한 것은, 뿌연 안갯속에 세워져 있던 커다란 울타리였고, 그 안에는 수많은 가축들의 사체가 마구잡이로 널려 있었다. 누군가 기르던 가축이거나 꿈의 숲 설계자의 애완동물이었을 이 동물들은, 한때 나무 오두막 안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보였다.
검고 진한 진흙에 반쯤 파묻힌 동물 사체들에서 썩은 내가 진동하며 루미나의 코를 찔렀다.
“돌아갈까요? 여기, 뭔가 기분이 안 좋아요.”
“그래도 혹시 은정이 이 길로 지나갔을지도 몰라요.”
“잠깐만요, 발자국이 있는지 확인해 볼게요.”
발자국을 확인하려 몸을 숙인 루미나는, 은정의 것이 아닌 괴수가 남긴 듯한 커다란 발자국은 물론, 수많은 사람이 지나간 흔적들까지 발견하였다.
“발자국이 너무 많아요. 하...”
“그렇다는 건, 이쪽에 길이 있다는 뜻 아닐까요? 멀리서 봐도 이곳이 길처럼 보이네요.”
“알았어요. 그럼 제가 먼저 갈게요. 조심히 따라와요.”
“네.”
동물 사체들이 널려 있는 울타리를 향해, 그들은 걸음을 옮겼다. 울타리에 가까워질수록 역한 비린내와 썩은 사체 냄새가 진흙과 뒤섞여 더욱 눅눅하고 무거운 향기를 퍼뜨렸다. 잔인하게 공격당한 가축들의 몰골을 본 루미나와 이연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숲길로 향했다.
“욱! 누가 저런 짓을 했을까요?”
“괴수가 아니면, 검은 연기의 사람들이겠죠?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존재가...”
“또요? 또 다른 존재가 있다고요?”
“그냥 추측해 보는 거예요. 내가 영매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어요. 이연. ”
“아마 괴수일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아무래도 저렇게 장난질을 해 놓을 정도면 덩치도 크고, 비정한..."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어! 저기요! 마을이에요!”
마을은 중세 유럽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이국적인 분위기였다. 몇몇의 사람들은 마치 중세 영화 속 인물들이 현대 옷을 입고 나타난 듯 묘한 느낌을 풍겼다. 그들은 온몸에 고된 고난의 흔적처럼 진흙을 뒤집어썼지만, 눈빛은 한결같이 강직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루미나라고 합니다. 친구를 찾고 있는데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급했던 이연이 은정의 인상착의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키는 저랑 비슷하고요. 아... 아니, 더 작아요! 그리고 어... 그 머리는 어두운 갈색, 묶은 머리... 또...”
루미나는 다급한 이연을 진정시키며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이 친구처럼 젊은 여성이에요. 이름은 은정라고 하고요. 방금 이 친구가 말한 대로예요. 혹시 보셨나요?”
그녀들을 수상쩍게 바라보던 한 남성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너희는 절대 이곳을 지날 수도, 들어갈 수도 없어!”
갑작스레 마을 곳곳에 숨어있던 남성들이 루미나와 이연을 에워쌌다.
“왜... 왜 그러세요? 루미나, 이 사람들 왜 이래요? 이자들이 검은 연기의 사람들이에요?”
루미나는 겁을 먹은 이연을 오른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보호하듯 말했다.
“아뇨, 이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아요. 그 사악한 검은 연기...”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던 루미나는 그들을 향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희는 어릴 적 잃어버린 꿈을 찾으러 온 사람들입니다. 당신들과 싸우려 온 게 아니에요. 아마 밖에서 벌어진 일들 때문에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는 이제 막 도착했어요. 그저 잃어버린 친구를 찾으러 왔을 뿐이니, 모두 진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너희가 그자들이 아니란 걸 어떻게 증명할 거야?!”
"그자들이란 게..."
"그 역겨운 인간들 말이야!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잔인하고 사악한 사냥꾼들! "
"그들이 혹시 꿈의 구슬을 빼앗았나요? "
"어허! 이거 알고 있구먼! 뻔해! 그자들과 한패일 수도 있다고! 다들 속지 마! "
한 남성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여기 루미나는 영매예요! 검은 연기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림 사이로, 조용한 위엄을 지닌 한 여성이 걸어 나왔다. 희끗한 머리카락이 몇 가닥 섞여 있었지만, 눈빛은 맑고 단단했으며, 겉으로 권위를 드러내지 않아도 주변의 시선을 자연스레 집중시켰다.
그녀의 곁엔 육중한 체격의 여성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그녀에게서 움직임 하나 없이도 강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들은 위계로 묶인 관계보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료 같았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발걸음으로 두 여성은 루미나와 이연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영매라...”
"네, 저는 사람들의 기운과 에너지를 볼 수 있는 능력... 아니...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꿈의 숲이 아닌,
외부 세계에서도 그러한 감각이 다른 사람들 보다 강했어요. 검은 연기의 사람들은..."
"검은 연기의 사람들? 그게 정확히 뭐죠? "
"아마도 이 마을 분들이 경계하고 있는 그 사람들, 그러니까 제 눈에만 보이는 검은 연기에 휩싸인 사람들요. "
"그들을 봤어요? 어디서요! "
육중한 체격의 여성이 앞으로 나서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70년대 마을에서요..."
그녀들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성이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놀라게 해서 유감이에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검은... 아니, 사악한 그자들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거예요. 헤칠 생각은 없었어요. 내 이름은 카인이에요. 그리고 이쪽은 레아, 나의 동료죠. 우린 꿈의 숲에서 만났어요.”
"동료... 저도 그런 동료가 있었죠... "
루미나는 샘이 그리운 듯이 말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쪽 이름은? "
"저는 루미나예요. 그리고 이 친구는 이연. 어리지만 꽤 강직한 친구예요. "
“두 사람도 숲에서 만났군요?”
“저희는 꿈의 숲 속으로 오는 열차 안에서 처음 만났어요. 여정 중에 다시 만나 함께 이연의 친구를 찾고 있고요.”
“그랬군요? 함께 출발한 사람들이라, 두 분 보통 인연이 아니네요. 난 그동안의 여정중 한 번도 처음 함께했던 그들과 마주친 적이 없어요. 물론, 얼굴을 잊어서겠지만요. 하하하.”
육중한 체격의 레아는 카인이 그녀들과 서스름 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는, 걱정스러운 듯 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카인, 이 사람들 믿어도 되겠어? 깊게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
"글쎄, 레아.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뭐 그렇게 위험해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잖아? "
"그건 그렇지만..."
"레아, 니 손에는 한주먹 거리도 안 될 텐데? 뭘~ "
그녀들은 루미나와 이연 앞으로 다가와 정중히 자신들의 아지트로 초대했다. 그곳은 주워 온 나무를 땔감 삼아 생활하는 작은 오두막이었다.
"여기 한기는 무시 못해요. 몸을 좀 녹여요. 여기, 우롱차예요. 따뜻하게 한잔씩 해요. "
카인은 친절하게 루미나와 이연에게 차를 건넸다.
"그나저나 아깐 한말, 영매라는 이야기. 그리고 검은 연기의 사람들이라고 했던 것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당연하죠. 그 자들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꿈을 빼앗는 자들이라고 들었어요. 그들 역시 외부세계에서 왔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꿈의 구슬을 빼앗고 난 뒤에 사람들은 마치 영혼을 잃은 듯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요."
"그들이 꿈의 구슬을 빼앗는 모습을 우리도 자주 목격했어요. 그리고 이곳의 신성한 동물들을 학살하고 다닌다는 것도요. 그럼 아까 그 기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들 주변으로 검은 연기들이 피어올랐어요. 그들이 떠난 자리에도 검은 연기는 여전했고요."
“기운을 보시는 거죠? 그 사악한 놈들의...”
"거봐 레아. 너희 어머니 같은 그런 사람 같아."
카인은 레아를 툭치며 말했다.
“레아의 어머님이 영매였다고 해요. 검은 연기를 본다는 그런 이야기들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레아 조차도요.”
“아... 그 심정 알죠. 전 그런 능력이 있지만, 설득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오래전에 느꼈어요. 그저, 저만 알고 있는 하나의 재능에 가까운 거죠.”
“재능이라... 그런 건 재능이라 할 수 없어요! 저주죠!”
레아는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오두막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신경 쓰지 말아요. 레아가 어머니 이야기에 민감해서...”
“그럴 수도 있죠 뭐.”
이연이 루미나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것을 보던 카인은 오크통에 물을 채워, 장작불에 올렸다. 잠시 후, 보글보글 끓던 물은 하늘로 치솟던 수증기와 숲의 쌀쌀한 공기와 맞닿으며, 어둠이 내린 시린 밤임에도 따뜻한 정을 느끼게 했다.
“자, 내가 오크통에 따뜻한 물을 준비해 뒀어요. 그리고 여기 맥주도 조금 준비해 뒀고요. 직접 발효시킨 것이니, 맛은 보장해요! 그리고 둘 다 좀 씻어요. 진흙투성이네요.”
카인이 준비해 준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근 루미나와 이연은 차갑게 얼어붙은 발이 스르르 녹아내리자, 물의 일부가 된 것처럼 두 발을 꼼지락거렸다.
“정말 좋지 않아요? 따뜻한 물이라니... 상상조차 못 해봤어요. 이곳에서...”
이연은 그동안의 고생과 피로가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쌀쌀해지던 기온은 카인이 준비해 준 따끈한 목욕물과 모닥불에 의해 그 어느 때 보다도 숲의 밤공기를 따스하게 만들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떠 있었고 간혹 별똥별들이 떨어지며, 마치 그들의 여정을 응원하는 듯했다.
“이연,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뭐요?”
“꿈을 찾았을 때 어땠어요?”
“음, 삶에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느낌이었어요. 어딘가 허전했던 커다란 구멍은 사라지고, 가슴속에 뭔지 모를 열정과 가득한 아이디어들? 떨리는 동시에 설렘인 것 같기도 해요.”
“이연의 눈이 저 하늘의 별들처럼 반짝거렸어요. 그래픽 세상에서요.”
“그곳에는 또 다른 저만의 세계가 있었으니까요. 모두가 그렇듯 가슴속에 자신만이 그리는 세상이 있잖아요.”
“그렇군요...”
루미나는 하늘을 바라보다 잠시 눈을 감았다.
타닥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가 그녀들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목욕을 마친 그녀들은 오두막에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고, 카인을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따라와요. 그, 친구 이름이 은정? 맞죠?"
"네!! 은정요! 찾으셨어요? "
"네... 뭐, 찾았다기 보단 보호 정도로 해두죠. "
그녀들은 전설의 마을의 우두머리 카인을 따라 후미진 오두막으로 향했다. 그곳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주변에는 횃불 몇 개와 그곳을 지키는 건장한 남성 둘이 서 있었다.
"카인! 여긴 웬일이에요? "
"저... 그 은정이라는 젊은 여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
"아, 네. 좀 전 까지도 소리 지르며 울다가 지쳐 버렸는지 이제 막 잠잠해졌어요. "
"음, 깨워서 데리고 나와줄래요? "
"네? 아 예. 카인. "
그들은 오두막의 걸쇠를 열고, 지쳐 잠든 은정을 번쩍 들어 올려 데리고 나왔다.
"여기. "
"이리 와요. 이연, 은정 맞아요? "
“네! 은정!! 정신 좀 차려!”
“카인, 감사해요. 이렇게 안전한 곳에 있었다니, 다행이에요.”
카인은 감사인사를 전하는 루미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사실,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이곳에 가뒀어요. 물론 헤치거나 하지는 않았고요. 수상한 사람일수록 한동안 잡아뒀다가 바다로 배를 태워 보냈거든요. "
"그러셨군요. 그럼 은정은..."
"저 남자들 눈에는 성가시게 꽥꽥 대는 그쪽 친구가 못 마땅했을 거예요. 검은 연기의 사람들은 따뜻한 눈빛이 없으니까, 은정? 저 친구는 왠지 모르게 예매한 구석이 있었거든요."
카인은 잠들어 있는 은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모습을 본 루미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애써 웃음 지었다.
“잠시 스쳐 가는 바람에 흔들릴 수도 있죠. 사람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니까요.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잖아요.”
“그렇죠. 뭐. 그냥, 그동안 봐왔던 사람들의 눈빛. 그리고 지금의 그 사악한 무리들, 조심하라고 일러둬요. 특히 이연에게.”
“흠... 어렵네요.”
그녀들은 마을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잠에서 깬 은정은 이연을 보자마자 와락 품에 안겨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진정이 된 후에야 은정은 마을 사람들의 악행에 대해 퍼붓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날 붙들어서 이곳까지 끌고 왔어. 보여?! 이 진흙들!! 머리는 다 떡 지고 산발도...
아무리 애원해도 들어주질 않았어! 저 사람들 사악한 사람들이야!”
“은정, 진정해요. 저분들은 이 마을에 머물며, 검은 연기의 사람들과 맞서려는 분들이에요.”
“무슨 소리예요! 루미나! 봐요! 오다가 여기저기 옷도 찢기고, 사람을 진흙 바닥에 질질 끌고... 그리고 이 상처 좀 봐요!”
그때, 레아가 불쑥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넌 확실히 마음에 안 들어! 그 상처 우리가 낸 게 아니잖아! 네가 저 오두막 안에서 혼자 난리 치다가 생긴 거 아니야? 그리고 질질 끌려 온 게 아니라! 똑바로 걸어오라라니까 힘들다면서 주저앉기를 반복한 건 너야!!”
"..."
"자자, 다들 진정해요. 알았어요. 알았어. "
"저 봐봐, 말도 못 하고 있는 거. 왜! 아까처럼 또 거짓말해 보시지! "
멀리서 들려오는 그들의 다툼 소리를 들은 카인은 다급히 그들의 오두막으로 달려오며 말했다.
“워워~~ 다들 그만해요. 레아, 진정하고 같이 나가자, 다들 피곤할 거야.”
“카인! 저 은정라는 여자, 당장 이 마을에서 내보내야 해! 봐봐 저 눈빛, 곧 그들처럼 변해버릴 거라고! 난 알아! 난 봤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사악하게 변해가는 그 눈빛을...”
루미나는 이연에게 먼저 잠자리에 들라고 말한 뒤, 카인과 남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가 묵는 숙소로 향했다. 그곳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신성하게 오두막을 지키고 있었다.
"기운이 좋은 나무네요. "
카인은 루미나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뒤에서 바위 위로 가볍게 뛰어오르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렇죠! 역시, 이 오두막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어요. 모두들 이곳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제가 제일 먼저 이 집을 선택했죠!”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카인을 굉장히 신뢰하고 따르는 것처럼 보였어요. 전부 모르던 분들이에요?"
"가장 오래 함께 한 친구는 레아뿐이고, 나머지는 검은 연기의 사람들로부터 도망쳐온 사람들이에요. 왜 다들 이곳에 모이게 되었는지는..."
"아마 운명일 거예요. "
"운명이라뇨?"
"저는 검은 연기의 사람들과 대적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아무래도 혼자기도 했고, 운명의 발걸음은 그들로부터 저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고요. 아마도... 카인과 여기 모인 사람들... 그들로부터 누군가를 지켜내겠다는 사명감이나, 그들의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싶어 하는 용맹한 사람들이 모인 거겠죠."
"와! 루미나! 루미나는 이런 걸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알아요? 신통력이 대단한데요? "
"신통력이라 해주시니, 제가 무슨 신선이 된 느낌이라 황홀하긴 하지만, 추측해 보는 거예요. 여정을 하면서 배웠던 가르침들을 통해서요. 외부 세계로 따지면 삶의 가르침?"
“그렇다면 루미나와 일행들도 이곳에 오게 된 이유가...”
“아뇨, 저희는 이 마을 분들과는 달라요. 왜냐하면 이연, 그 친구는 꿈의 구슬을 이미 찾았고, 저의 여정은 아직 남아있다는 확신이 들어요. 하지만 은정은...”
“레아 말이 얼추 들어맞죠? 그 녀석이 통찰력이 있어요. 선하고, 용맹하고요.”
“카인은 꼭 잔다르크 같아요. 레아 역시 특별하고요. 이러한 강한 기운을 오랜만에 느끼는 것 같아요.”
“이거 왜 이래요. 루미나, 당신은 겉으로는 순순히 보이지만, 우리 못지않은 내공이 있어 보이는 걸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녀들의 덕담을 몰래 엿듣던 레아가 잠에서 깬 척, 카인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하암... 너무 피곤했어. 화를 내서 그런가? 하하하."
"레아, 좀 더 자지 왜 일어났어?"
“그냥 솔직히 말할게.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나도 너무 끼어들고 싶었단 말이야. 신통력부터 통찰력까지 너무 흥미로운 대화잖아.”
"알았어. 이제 난 빠져 줄 테니,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그녀는 양손을 목 뒤로 깍지 낀 채, 대화에 집중하는 듯 바라보았다.
"흠흠 저 일단은... 저희 어머니 이야기는 들으셨겠지만, 대부분 그런 능력은 자식에게 유전되거나 하지 않나요? 왜 저는 그 검은 연기를 볼 수 없는 거죠?"
"유전... 분명 레아도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부분들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존재해요. 예를 들어 카인이 말한 통찰력이라던지,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용맹함. 그로부터 오는 신적 존재의 보호 같은 거요. "
"신적 존재의 보호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거죠?"
"용맹함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거예요. 강직함, 용맹함, 끈기, 인내 같은 것들요. 그 능력은 신의 보호가 필요한 순간이 많아요. 예를 들면 검은 연기의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 그들과 맞서 싸울 용기가 있는 것처럼요."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카인이 장난을 치듯 박수를 치며 말했다.
"와우~ 신적인 존재의 보호! 역시! 우리 레아, 용맹함의 정수를 보여주지! 내가 사람 볼 줄 안다! 정말! 짝짝짝! "
"거 좀 조용히 해봐! 궁금한 게 더 있다고, 쉿! "
"알았어. 그럼 난 좀 잔다. "
카인은 침대 위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음... 그럼 카인의 능력은 어떤 거예요? 갑자기 궁금해지네.”
레아는 잠든 카인이 들을세라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미 알고 있잖아요. 레아의 통찰력으로 봐봐요. "
"음, 카인은 최고의 리더예요. 사람들이 신뢰할 만하고,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녀의 다정한 말에도
강한 카리스마를 느껴요. 그리고..."
"이미 많은 걸 느꼈네요. 레아의 통찰력은 카인이란 강인한 리더를 운명으로 만나게 했어요. 카인의 결속력으로 이렇게 마을을 지키고 있고요. 난 그걸 기운으로 느끼고 있는 거예요. 모두 같으면서도 다른 거죠. "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루미나와 대화하는 게 재미있어요. 많이 배우기도 하고요.”
"모든 것에서 배우죠. 우리 모두는."
그렇게 새벽녘이 되어서야 대화를 마친 그들은 깊은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어느새 전설의 마을은 그녀들의 나지막한 숨소리와 깊은 심연의 어둠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 그녀들은 길고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뜬 그녀들의 앞에는 카인과 레아가 기다리듯 서 있었다. 루미나는 그녀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정말 아쉽다. 우리 마을에 함께 머물며 검은 연기의 사람들을 알아보는 걸 도와준다면 좋을 텐데.”
“레아, 그건 우리의 욕심이야. 꿈을 찾아 떠난 여행자를 붙잡아 두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어. 그러면 우리도 그들과 다를 게 없잖아.”
“알아, 나도 잘 안다고... 그냥, 루미나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래...”
레아는 루미나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정이 들었는지,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이 못내 서운해 보였다.
“두 분이 계시니, 검은 연기의 그들이 이곳을 통과하기란 어려울 거예요. 믿고 여정을 떠나겠습니다! 감사했어요! “
루미나는 카인, 레아와 차례로 악수했고, 이연과 은정도 멀찍이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바닷가 끝에 다다르자, 카인이 준비해 둔 작은 요트 한 척이 떠 있었다.
루미나는 조심스레 요트에 올라 레버를 당기고 밀기를 반복하며 배를 움직였다. 요트는 잔잔한 물살을 가르며 전설의 마을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