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믿고 날아올라!
23화 꿈의 구슬
-너를 믿고 날아올라!-
등장인물: 루미나, 신호수의 남자
평화로운 항해가 될 것이라는 루미나의 짐작과 달리, 배는 오래가지 않아 거센 풍랑에 휩쓸려 뒤집혀 버렸다. 그녀들은 바닷속으로 조용히 침잠해 갔다.
루미나는 깊은 물속으로 서서히 잠기며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바로 그때, 루미나의 가슴에 품어둔 우산이 거세게 꿈틀거렸고, 하늘을 가릴 듯 거대한 그물처럼 펼쳐졌다. 영물인 우산은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내려가 루미나와 그녀의 일행을 한꺼번에 건져 올렸다. 우산은 한번 더 솟구치더니, 그대로 하늘을 향해 일행을 거침없이 던져 버렸다.
루미나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수정처럼 맑고 투명한 둥근 형체들이 놓여 있었다. 구슬 속에는 찬란한 에너지들이 우주의 오라처럼 은은하게 반짝였다. 주변은 부드러운 우주의 초원으로 가득했고, 바람에 살랑이는 빛처럼 모든 것이 몽환적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와... 요상한 풍경들은 이미 많이 봤지만, 이 곳은 어쩐지 묘하네요.”
“이번에는 색감이 아주 다르죠? 우주 속에 있는 느낌이랄까?”
“이곳도... 그래픽 뭐시깽이처럼 만들어졌네?”
“아니야, 은정. 그곳은 픽셀처럼 보였잖아. 여기는 우주 속 꿈의 동산 같은 느낌이랄까?”
"그게 그거지 머... 그런데 이 왕구슬은 뭐야? "
은정이 눈앞에 놓인 커다란 구슬에 손을 가져다 대자, 구슬에서 여덟 개의 다리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거미의 수정처럼 커다란 두 눈과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소리쳤다.
"어머! 깜짝이야! 이 괴물은 뭐야?!"
"괴물이라니?? 난 오히려 신비로운데? 우리 가까이 가볼까요? 루미나?"
"그래요.몸이 꼭 수정 같네요. 수정 안에 우주가 담겨 있는 듯해요. 정말 아름다워요. “
루미나와 이연은 신비로운 우주의 빛이 담긴 거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저기 봐요! 무언가를 만들고 있어요. 그렇죠? 루미나?”
“그렇네요. 실타래인가? 구슬 같기도 하고...”
“우리 저쪽으로 가볼까요?”
"그러죠."
작은 언덕을 몇 개 넘자, 믿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수정 거미들이 곳곳에서 작은 원형의 구슬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들은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엇! 저 구슬!”
이연은 주머니 속 깊숙이 넣어 두었던 꿈의 구슬을 꺼내 잠시 바라보다, 수정거미들이 만들고 있는 구슬을 가리켰다.
“맞죠? 이 구슬?”
“정말이네요. 꿈의 구슬이에요.”
“저 수정 거미들이 꿈의 구슬을 만들고 있는 건가 봐요!”
“그렇네요? 만들어진 구슬들을 어디론가 보내는 것 같아요.”
그녀들의 대화 속, 은정은 갑작스레 구슬들이 흘러가는 수로로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그리곤 꿈의 구슬들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엇! 은정! 안 돼요! 그러지 마요!”
정적—
그곳은 곧 어둠으로 변했고, 주변을 살 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이연? 은정!”
어둠 속에서 허공을 휘젓던 루미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의식을 되찾았다. 깨어난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풍랑 이후의 프레임은 루미나가 심연에 잠겨 꾸었던 꿈속 한 장면이었다.
"여긴 어디지?"
루미나는 자신이 음산한 바닷가로 떠밀려온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차가운 바람과 짠내가 코끝을 스치고, 바다의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은정과 이연은... 심연의 늪에 빠진 걸까? 다신 볼 수 없는 걸까? 그들을 구할 방법은...'
그녀는 한동안, 이연과 은정이 잠들어 있을 조용한 바닷가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루미나는 품에 있던 영물, 우산을 천천히 펼쳐 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왜...'
루미나는 가늠할 수 없는 영물의 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푸른 빛… 그리고 바람을 타고 날았다... 숲을 밝힌 것도 결국 그 빛이었지.’
생각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어깨 위로 알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다.
그녀는 영물 우산을 가슴에 품으며, 허탈한 표정으로 적막한 바닷가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하늘의 별이 하나둘 지고 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가자.”
결심이 선듯한 한마디와 함께, 루미나는 묵묵히 자신의 남은 여정을 향해 나아갔다.
한참을 걷던 루미나의 앞으로, 오래된 폐건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 평범한 아파트.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자, 삭막한 철근, 회색빛 콘크리트,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난 채 모든 것이 멈춰 버린 폐건물이었다. 이미 공사가 중단된 지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곳이었다.
벽은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고, 창문은 대부분 깨져 있었다. 사람의 인기척이라곤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지만, 그녀는 주저 없이 폐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로비 한쪽, 녹슨 철제 엘리베이터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뻥 뚫린 채, 바깥 풍경이 그대로 노출되어 아찔한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었다. 철골과 먼지, 기계 소리 하나 없는 적막함, 낡은 엘리베이터가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이하게 느껴졌다.
루미나는 지상으로 가는 버튼 하나를 눌렀다. 덜컹, 쇳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는 느리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창 틈 사이로 찬바람이 스쳤고, 아래로 펼쳐진 폐허 같은 바닷가와 건물 잔해들이 그녀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루미나는 잠시 머물 만한 곳을 찾기 위해 폐건물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부서진 문들과 바닥으로 뽀얗게 쌓인 먼지들, 그리고 인기척 없는 텅 빈 방들, 건물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그 침묵은 불길하리만큼 깊었다.
그녀가 복도를 돌아 나가려는 순간, 검은 연기에 감싸진 뭔가가 휙 하고 루미나 앞을 스쳤다. 검은 후드티를 눌러쓴, 14세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루미나를 보지 못한 듯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뭐지? 날 보고도 그냥 지나쳤어. 저 아이... 그자들에게서 영혼을 빼앗긴 것은 아닐까?'
그녀가 생각에 잠긴 바로 그때, 건물 천장으로 강한 수압의 물줄기가 가득 쏟아져 나왔다. 오래된 급수관이나 방치된 저장 탱크 같은 곳에서 무언가가 터진 듯했다. 천장 틈새로 물방울들이 뚝, 뚝 떨어지기 시작하자, 금세 바닥을 타고 번져 축축한 냄새와 함께 지면을 전부 적셔 나갔다.
물에 젖은 복도를 따라 몇 걸음 더 옮겼을 때, 루미나는 건물 한 모퉁이에 서 있는 형광색 조끼를 입은 신호수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사람의 형체였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영혼을 잃은 듯 공허한 눈빛, 그는 말 한마디 없이 천천히 형광봉을 흔들며,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도 보지 않을 그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루미나가 걸음을 멈추자, 그 역시 멈칫했다. 남자는 말이 없었지만, 형광봉으로 옥상 쪽을 가리키며, 다급히 그녀를 도우려는 듯했다.
“... 왜 나를 돕는 거지?”
경계와 의문을 품은 채, 루미나는 그의 손짓을 따라 나선 계단을 지나 옥상으로 향했다. 그때 문득, 그녀를 스쳐 지나던 검은 후드티를 입은 작은 아이가 떠올랐다.
검은 연기의 사람들처럼 변해버린 아이, 그리고 결국 그들에게 영혼을 빼앗긴 그 어린 존재.
'혹시 저 사람도, 그 아이처럼...'
의심이 움트는 찰나.
삐걱—
루미나의 발밑, 철제 난간이 무너져 내렸다.
"헉!"
루미나는 무언의 비명만을 남긴 채, 건물 아래로 추락했다. 빛이 꺼진 건물의 심연으로...
‘앗…!’
눈을 질끈 감자,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말이 작게 흘러나왔다.
“날아올라! 루미나!”
순간, 그녀는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높이 솟구쳤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남자는 마치 자신의 할 일이 끝났다는 듯, 텅 빈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다 조용히 건물을 내려갔다.
'영혼을 잃고도 사람을 도우려는 본능이 당신에게 남아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요. 신호수의 남자, 그 본능이 나를 구원했으니... 당신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우산을 쓰고 떠올랐던 그날보다 더 높고 자유롭게, 바람은 하늘 가장 높은 곳으로 그녀를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