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 꿈을 찾다!
20화 작은 다툼
-이연, 꿈을 찾다!-
등장인물: 루미나, 이연, 은정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무서워서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아? 큭큭.”
“적당히 해. 너는 대체 눈치를 어디다 버리고 다니는 거야. 좀 챙겨.”
“순! 겁. 쟁. 이.”
은정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연은 참아왔던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너는! 이 말까진 안 하려 했는데! 어제 루미나가 괴물들이랑 싸우고 있을 때 어디서 뭘 했어! 제일 먼저 도망갔잖아! 그것도 우리를 내버려 두고! 아니야? 징징거리는 것도 지겨웠고, 그 약 올리는 듯한 태도도! 눈치 없이 사람들에게 함부로 지껄이는 것까지! 네가 어릴 적 친구만 아니었어도, 벌써 두고 떠났어!”
“그냥, 장난 일 뿐이야!”
“너는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여? 웃어주고, 넘어가 주니까! 넌 세상 사람들이 다 우습지!”
“내가 언제 다 우습게 봤다고 그래!”
“너 어떻게 날 두고 도망을 가냐? 치사하게... 만약, 루미나가 없었더라면! 그때 그 괴수가 날 지나쳐서 널 찾으러 가지 않았다면! 난 꼼짝없이 잡혔을 거라고! 알아?”
“난 그저 몸이 저절로 움직였을 뿐이야... 그냥 살려고 그런 거라고... 살려고... 너도 무서웠잖아.
그 괴수들... 또 루미나가 괴수의 목을...”
“이제 알겠어? 겁쟁이는 말이야, 너 같은...”
그들의 다툼을 듣던 루미나는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로 조심스럽게 파고들었다.
“그만들 좀 해요. 은정은 그냥 놀라서 도망친 거고, 이연 씨는 나한테 미안해서 거기 남은 것뿐이에요.
그리고 우리 모두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그거면 된 거죠.”
“미안해요. 루미나. 그냥 도망쳐 버린 건요.”
"흐음, 그때 은정 씨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괴수가 숲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거예요. 영매인 저만 느꼈을 테지만, 그 괴수... 우리 셋 중 가장 겁이 많은 사람에게 홀린 듯 따라간 것 같았어요.”
“영매? 루미나 영매예요?”
“아 네, 그냥 그런 기운이 있다고만 보면 돼요. 은정이 알고 있는 사주팔자, 뭐 점보고 그런 건 아니에요. 이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죠.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어쨌든 서로가 함께한 덕분에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요. 그렇죠?”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은정, 아까 한 말은 잊어줘. 어제 일 때문에 서운한 마음에 그랬어. 미안해, 진심으로.”
“이해해. 만약 네가 날 두고 도망가버렸다면, 난 아마 지금쯤 네 멱살을 잡고 흠씬 두들겨 패줬을 거야.”
“그럼 지금이라도 패주면 되겠네요. 이연, 여기서 잠시 은정과 싸우고 있을래요? 저 멀리 뭔가 보이는 것 같아서 얼른 다녀올 테니.”
“엥, 농담이죠?”
은정은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루미나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당연히 농담이죠. 아까부터 저 멀리 익숙한 무언가가 보여서요. 둘은 모르겠지만요.”
“뭐가 보인다는 거예요? 이곳은 나무들뿐이고... 숲 밖에는 아무것도 안 보여요.”
“버스!”
“무슨 버스요?”
“있어요. 초록색 귀여운 버스가요! 아마 다음 여정은 편안한 곳이 될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예전에 한 번 타봤어요. 마법의 초록 버스요. 빨리 따라와요! 아, 그리고 버스가 움직인다고 너무 놀라지 말아요. 이미 열차에서 경험해 봤죠!”
그녀들은 루미나의 뒤를 따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한 그들 앞에는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녹색 버스가 덩굴로 뒤덮인 채 서 있었다. 바람이 불자 버스의 잎사귀들이 살랑거렸고, 그녀들은 버스의 돌계단을 함께 뛰어오르며, 괴수의 숲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버스는 숲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루미나와 일행은 피곤에 지쳐, 풀이 깔린 버스 바닥에 아무렇게나 몸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그녀들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버스 밖, 낯선 어딘가에 내던져진 상태였다.
버스는 그들을 내려놓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영원히 솟아나는 샘이 있었고, 그 물줄기가 커다란 분수를 이루고 있었다. 곁에는 고풍스럽고 형형색색으로 장식된 한옥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선명한 초록빛으로 수 놓인 들판은, 마치 누군가 세밀한 붓으로 그려놓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무릉도원.”
이연이 작게 읊조리자, 넋이 나간 듯 풍경을 바라보던 루미나가 대답했다.
“네?... 뭐라고요?...”
“아, 아뇨. 와, 정말 멋져요! 마치 그래픽 아티스트가 그려놓은 세상 같아요. 제가 꿈꾸던 세상이에요. 정말 대단해요, 이곳!”
그녀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물줄기가 솟아오르는 호숫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푸르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고, 마치 그림으로 그린 세계처럼 생생했다.
마치 그래픽처럼 흔들리는 버드나무들이 바람결에 살랑이고, 그 나뭇가지에 매달린 작은 참새들은 아름다운 오카리나 선율에 맞춰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합창하고 있었다.
그곳의 모든 풍경은 꿈처럼 사랑스러웠다.
그래픽처럼 생생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연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모니터 속에서 반짝이던 가상의 초원, 그 위를 날아다니던 픽셀의 새들, 그리고 손끝으로 꿈을 그리던 한 남자. 이 모든 것이 마치 데자뷔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래픽 아티스트.
이연의 어릴 적 꿈, 그리고 너무 일찍 접어야 했던 꿈.
“그 인간처럼 되지 마.”
이연의 엄마는 아버지의 직업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술가 흉내를 낸다는 이유로 어린 이연 앞에서 다투는 일이 잦았다. 이연의 아버지는 그녀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른 가족을 꾸렸다.
그녀의 엄마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발작에 가까운 두려움이었다. 그렇게 남겨진 두 사람은 그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래픽 아티스트의 꿈은 이연에게,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금기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어느덧 엄마가 바라는 대로 대학에 진학했다. 꿈을 영원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발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황홀하고 기이한 풍경 앞에서 이연은 잊고 살았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가슴 한편에서 잠들어 있던 꿈이었다.
“이건... 내가 꿈꾸던 세계였어...”
가슴 깊은 곳, 오랫동안 닫혀 있던 이연의 마음이 서서히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금세 녹아들었고, 사소한 모든 것들에 사랑의 마음을 담았다. 새들의 노랫소리, 햇살에 반짝이는 분수 물방울, 그녀는 모든 것에 온 마음을 빼앗긴 듯했다.
이연의 모습을 바라보던 은정은 질투심을 감추지 못한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기 굳이 오래 있을 필요 있을까? 난 벌써부터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아. 봐봐, 진짜 같으면서도 아닌 느낌이랄까? 뭔가 번쩍번쩍, 알록달록. 아,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이연이 고개를 돌려 살짝 미소 지었다.
“여긴 나에게만 특별한 곳인가 봐. 네가 어떻게 보든 상관없지 안 그래?”
은정은 팔짱을 끼고 투덜거리며 말했다.
“난 그냥 당장 여기서 나가고 싶어. 뭐가 좋다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돼. 이런 데서 뭘 하겠다고? 그냥 시간 낭비야.”
“은정, 왜 그래? 나에게는 특별한 곳 이라니까, 난 지금 이곳에 아주 중요한 목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특별하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뭐가 특별하다는 거야? 정신만 없잖아! 봐봐! 이상한 것투성이야!”
은정은 투덜거리면서도 그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긴 내가 그리던 곳이야. 어릴 적 꿈 말이야.”
은정은 꿈을 찾은 듯 빛나는 이연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마음이 한없이 조급해졌다.
‘내가 먼저 찾지 않으면, 이연이 혼자 가버릴지도 몰라.’
이러한 두려움은 은정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럼, 나 혼자라도 나갈 거야!”
그 말만을 남긴 채, 은정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연은 은정의 모습이 사라진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온 세포가 그래픽의 픽셀들과 하나가 되는 기분마저 들었다. 호숫가,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아름답게 퍼져나가는 오카리나의 선율에 이끌린 이연은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똑같은 모습을 한 쌍둥이 자매가 나란히 벤치에 앉아, 고요히 오카리나를 연주하고 있었다.
쌍둥이 자매는 파스텔톤의 분홍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연보랏빛 눈동자에는 호기심 가득한 빛이 반짝였고, 잎사귀처럼 생긴 연두색 플랫슈즈를 신은 두 사람은 마치 바람에 실려온 요정처럼 보였다.
이연이 다가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쌍둥이 자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맑고 투명한 오카리나 소리가 숲에 울려 퍼지자, 그 선율에 맞춰 꽃들이 피어나고 주변은 점점 더 화사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쌍둥이 자매는 마지막 음을 나란히 맞추고는 말없이 손을 내밀어 이연에게 그래픽 마을의 픽셀 조각 하나를 건넸다. 이연은 그것을 주머니에 넣으며 자매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루미나의 입가에도 조용히 미소가 번졌다.
“찾았네요. 꿈. 축하해요, 정말.”
“고마워요. 덕분이에요. 그런데... 혹시 은정 못 보셨어요? 어디로 간 걸까요?”
“좀 전에 저쪽으로 갔어요. 곳곳을 더 구경하고 싶었나 봐요. 조금 시간을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런 숲은 아마 다시는 볼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죠? 정말 환상적이죠? 이 풍경을 통째로 병에 담아 간직하고 싶을 정도예요. 저한테는 그만큼 특별하고 멋진 곳이거든요.”
“이연이 이렇게 좋아하니, 나도 기뻐요. 이제 꿈의 숲에서 나가는 일만 남았네요?”
“은정의 꿈을 마저 찾아야죠. 그 겁쟁이가 혼자서 어떻게 여정을 이어가요. 저라도 옆에 있어줘야죠.”
“함께 왔으니까, 함께 나가는 게 당연한 거겠죠?”
“루미나는 정말 대단해요. 이런 낯설고 신비한 곳에 혼자 올 생각을 하다니, 정말 용감해요!”
“여기가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오지 않았을 거예요. 열 명쯤은 데리고 왔겠죠. 하하. 아니, 아예 작전 짜서 군대처럼 쳐들어왔을지도 몰라요.”
“하하하. 그랬으면 괴수도 두렵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루미나 덕분에 은정이랑 저는 정말 든든했어요. 천군만마보다 더 큰 힘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나가면 꼭 보답할게요.”
“그 이야기, 왠지 익숙한데요. 하하. 만약 정말 운명이라면, 분명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일단 뒷일은 생각하지 말아요. 우선은 이연과 은정이 무사히 나가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요. 물론, 저도요.”
“네! 그렇네요. 여정을 마무리하는 것이 먼저겠어요.”
“은정이를 찾아볼까요?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어딘가에서 종종걸음 치고 있을 것 같아요.”
“그래요, 분명 어딘가에 있겠죠...”
그때, 쌍둥이 자매가 환하게 웃으며 이연과 루미나를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그들의 손짓을 따라 색색의 픽셀 조각으로 된 길이 펼쳐졌고, 그래픽 마을의 빛들이 서서히 모여 거대한 빛의 문을 만들었다. 문 앞에 선 이들은 쌍둥이들과 인사를 나눈 뒤, 잠시 망설이다 이내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