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난 전사!
19화 회색의 괴수
-깨어난 전사!-
등장인물: 루미나, 이연, 은정
멀리서 어슴푸레 비치던 불빛은 마치 공사장의 투광등처럼, 그들이 있는 숲 속 깊은 곳까지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루미나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 밝음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긴장의 끈을 그만 놓아버렸다.
어둠 한복판, 넓은 공터에 두 개의 컨테이너 박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곳을 지나쳤지만, 첫 번째 컨테이너 옆을 스치며 무심코 걸음을 옮겼을 때, 시야 한편에 어렴풋한 무언가가 잡혔다.
그녀의 빠른 발걸음은 그곳에서 멈춰 서지 못한 채, 그대로 두 번째 컨테이너 앞을 지나쳤고, 그 안에는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혈색 없는 회색의 괴수가 고개를 젖힌 채 코를 골며 잠들어있었다.
찰나, 그녀가 무심코 지나쳤던 첫 번째 컨테이너 속 장면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녀의 시각과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한 뇌의 지각처럼... 분명, 어둠 속에 앉아 있던 한 남자. 그는 날카롭고 커다란 눈으로, 확실하게 그녀의 걸음에 맞춰 동공을 움직였고, 괴수의 입가엔, 마치 먹잇감을 포착한 짐승처럼 섬뜩한 웃음이 서려있었다.
‘이미 늦은 것일까?‘
루미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서서히 몸을 돌렸고, 그 순간 그녀의 발밑으로 무언가가 툭 하고 부딪히며, 데굴데굴 굴러갔다.
“꺄악—!”
은정은 비명과 함께 숲 속으로 정신없이 내달렸다.
이연은 충격에 휩싸여 그저 겁에 질린 눈으로 굳어버렸다.
그 모습을 본 루미나는 망설이지 않고 컨테이너 옆에 놓여 있던 날카로운 창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잠든 괴수를 향해 돌진했고, 거대한 창을 휘둘러 괴수의 목을 힘껏 내리쳤다. 괴수의 머리가 '댕강' 잘려 나가더니 그대로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루미나는 얼굴에 튄 회색 피를 소매로 거칠게 닦아냈다. 그리고 뒤돌아, 다른 한 명의 괴수를 노려보았다. 괴수는 기괴하게 웃으며, 돌처럼 굳어버린 이연의 옆을 유유히 지나쳐 갔다.
괴수가 숲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그제야 이연의 몸을 짓누르던 공포와 긴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연은 긴장이 풀린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연!”
“흑... 흑...”
참고 있던 두려움이 폭발하듯, 그녀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도망가야죠! 그렇게 멀뚱하게 서 있으면 어떡해요! 은정은 어디에 있어요!”
루미나는 정신을 놓아버린 이연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이연은 울음으로 얼룩진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더니, 떨리는 손가락으로 숲을 가리켰다.
"이런 C... "
이연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두 개의 머리를 바라보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루미나는 정신을 잃은 이연을 두고 갈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의 뺨을 거칠게 때리며 깨우려 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폭포수처럼 비가 쏟아졌고, 이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해요! 은정이!! 은정!!!”
“진정해요! 이연! 좀 조용히 해요. 이러다 우리 다 위험해져요. 제발, 진정해요!”
세찬 비에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던 루미나는 이연을 향해 외쳤다.
이연은 아무 말 없이, 비에 젖은 얼굴로 흐느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얼굴 위로,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과 붉어진 눈가만이 그녀의 감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디 숨어있어요. 은정은 내가 반드시 찾아올 테니까! 꼼짝 말고, 숨죽이고 있으라고요. 알았죠?”
“그러다 루미나까지... 위험해지면 어떻게 해요. 흑흑흑...”
“이연! 나 봐요! 아까 뭐라고 했어요? 모험! 기억나요?”
“네, 흑... 흑...”
“기억해요! 꿈의 숲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아! 이건 그냥, 잠깐의 모험일 뿐이야! 알아들어요?!”
눈물로 붉어진 눈동자에 맺힌 슬픔을 애써 숨긴 채, 이연은 루미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요. 금방 올 테니, 혹시라도 너무 늦어진다 싶으면, 공터를 가로질러 저 멀리 숲 속 보이죠? 그곳으로 가서, 바닷가나 이동할 수 있는 모든 곳들로 무조건 빠져 나가요! 나갈 수 있을 때!”
“싫어요... 나 혼자 갈 수 없어요. 우린 어릴 적부터 단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어요. 흑흑흑. 어떻게 그냥 두고 가요...”
"마음대로 해요. 그럼."
루미나는 울고 있는 이연을 뒤로한 채, 은정을 찾아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사방을 헤매며 은정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세차게 쏟아지는 비에 시야도 소리도 모두 지워지고 있었다.
구름조차 달빛을 가로막은 그곳은 마치 빗소리에 잠식된 듯했고, 숲 속 깊이 들어갈수록 짙은 어둠과 한기가 몰려들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루미나의 몸은 점점 무거워졌고, 마치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극도의 긴장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온몸의 감각들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고, 뒤를 돌아볼 때마다 깊숙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는 어느새 약해지기 시작했다. 적막하던 숲 속은 비와 흙의 마찰로 강한 페트리코르 향이 퍼지며, 그녀의 정신을 맑게 깨웠다.
숲은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숲길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
그녀가 잠시 고개를 돌려 뒤를 살핀 순간, 등 뒤에서 나지막한 딸꾹질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돌아보니, 이연이 어느새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숨어 있으라 했잖아요!”
작게 기어들어가는 쇳소리로 이연을 향해 외쳤다.
“어차피 숨어 있다 잡히나, 쫓아가다 잡히나 똑같잖아요. 저도 은정이를 찾을 거예요. 은정이는 예의도 없고, 눈치도 없고, 예민하긴 하지만... 저에겐 둘도 없는 친구예요. 함께 가야 해요.”
루미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고,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모난 친구를 둘도 없이 사랑하는 친구를 둔 은정도... 참 기뻐하겠네요.”
“네.”
“알았으니, 서두르죠!”
숲의 어둠이 걷히고 희미한 달빛이 길의 윤곽을 드러냈다. 길 곳곳에 파인 진흙 웅덩이가 널려 있었고, 그 속을 헤매느라 이들의 신발과 옷은 흙탕물에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누가 괴수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루미나,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럼 하지 말아요.”
“그래도 말할래요. 그... 은정이가 우릴 보고 도망치면 어떡하죠? 지금 그쪽 모습, 저역시도 말이 아닐 것 같은데...”
루미나는 그런 이연을 슬쩍 바라보았고, 희미한 어둠 속으로 비친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하하하. “
은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루미나를 바라보다, 잠시 생각에 잠긴듯하더니, 루미나의 웃음에 이끌려 함께 웃기 시작했다.
“큭큭큭. 은정이가... 은정... 큭큭... 절 보고 꺅!! 소리 지르겠죠?... 하하하.”
“괴수도 그냥 지나칠 것 같은데요? 혼자 숲 속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는 정말 긴장했어요. 죽지는 않겠지만, 잘 못 하면 괴수들에게 잡혀 이곳에 박제되겠구나 싶었는데, 이연, 당신 덕분에 긴장이 싹 풀리네요. 함께 와줘서 고마워요. ”
“루미나는 남의 일인데도 나서서 이렇게 돕고 있잖아요. 제가 더 감사해야죠. 전 그 머리통 두 개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바람에... 만약, 그곳에 아직도 혼자 남겨져있었다면 숲 속을 헤매다 미쳐버렸을지도 몰라요.”
“아까 그 머리통은 둘 다 괴수들의 것이었어요. 아마도 그곳을 지났던 또 다른 여행자가 있었을 거예요.”
“네? 아... 난 또 사람인 줄...”
“꿈의 숲에서 죽을 순 없어요. 대부분 현실 같은 환영들일 때가 많으니 기억해 둬요.”
“현실 같은 환영?...”
“이제 비는 완전히 그친 것 같네요.”
“그러게요. 날도 밝아 오는데... 은정은 대체 어디까지 간 걸까요? 큰소리로 부르면, 위험해지겠죠?”
“그렇겠죠. 아무래도. 괴수들도 들을 수 있고요.”
그때였다.
숲길의 덤블 사이로 입을 틀어막은 채, 숨죽이며 숨어있는 은정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연은 정직하게 숨어있는 그녀의 뒤로 몰래 다가갔다.
“그렇게 숨어있으면! 눈먼 사람도 널 찾겠다! 이그~”
이연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은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듯 쓰러졌다.
“야! 나야 나! 이연! 괜찮아?!”
은정은 그녀의 목소리를 확신하고는 그녀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어대기 시작했다.
“이 바보야~ 너 궁둥이 다 보이게 이렇게 숨어 있으면, 누구라도 널 찾겠다.”
“야! 바보는 너고! 그 괴물이 이 앞으로 지나갔어... 넌 모르지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그래? 괴수가 이리로 지나갔단 말이지? 그냥 지나가기만 했어? 널 찾거나 하진 않았고?”
“그래서 이렇게 숨어있는 거잖아. 그 괴물처럼 생긴 사람... 웃고 있었어. 기분 나쁘게. 너도 봤어? 이연?”
“응, 잠시 스쳐가서, 얼굴까지는 기억이 안 나... 기절했거든.”
“기절? 하하하, 바보는 너잖아! 매번 강한 척하더니 기절이라니! 이연 네가?! 여기서 나가면 다 말해줄 거야.
이연이 괴물 보고 놀라서 기절했다고~ 큭큭큭”
둘은 또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장난기 어린 눈빛과 진심이 뒤섞인 말들이 오가며, 그들의 대화는 쉼 없이 이어졌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미나의 머릿속에 배를 타고 떠난 옛 친구 보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루미나, 루미나?”
은정은 멍하니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루미나의 팔을 흔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 아, 네.”
“어제 그 괴수들 말이에요. 괴물인지, 괴수인지요. 사람은 아니었죠?”
"글쎄요. 그걸 저도 잘 모르겠어요. 분명 생김새나 차림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꿈의 숲에서는 외부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죽는 경우는 없다고 들었거든요. 그리고 분명 피부색도 회색빛이었고, 뭔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오래 묵은 감정 같았다고나 할까요? "
“음... 사념? 뭐 이런 건가? 요즘 그런 드라마에서도 많이 나오잖아요.”
“아뇨, 사념이라고 하기에 너무 생생했고, 감각적으로 느끼기에는 검은 연기의 사람들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 사람들 정말, 인간대 인간으로서 정말 별로예요.”
은정은 검은 연기의 사람들과 괴수에게 토라진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쩜 그렇게 남의 꿈을 가로챌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거죠? 자신들도 어릴 적 꿈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안 그래요? 그 욕망 같은 꿈들 말고도요.”
“은정, 미안하지만 사람들이 다 당신 같지 않아요. 당신은 어쩌면 어릴 적 꿈을 찾아 이곳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꿈조차 꾸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어요. 정착민들이 그랬고, 바다 어딘가에 가라앉아 잠들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그랬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꿈조차...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올 수 있어요? 꿈의 숲은 어릴 적 꿈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닌가 봐요?”
이연은 다급하게 은정의 입을 틀어막고 말했다.
“우리 이제 갈까요? 하하하. 컨테이너까지 다시 가야 하는데 한 참 걸릴 테니...”
은정은 자신의 입을 막는 이연의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치 챙겨, 좀...”
이연은 은정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녀들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괴수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들을 짓눌렀지만, 이제 그들은 두려움에 떨던 모습 대신 결연한 발걸음으로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