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하는 아이들에게 진짜 읽고 싶은 책이 있는지 물어봅니다. 어떤 아이들은 '흔한 남매'시리즈를 얘기하고, 어떤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읽는 책도 버겁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나에겐 항상 읽고 싶은 도서목록이 몇 권씩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이것이 나의 재산이고, 통장잔고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꼭 읽게 된다는 게 저의 지론입니다.
내가 배운 '지식'은 망망대해에 펼쳐진 둥그런 작은 점 같은 섬과 같습니다. 섬에는 볼품없는 몇 그루 이름 모를 나무와 푸르스름한 이끼와 하늘하늘한 몇 송이 꽃이 전부입니다. 몇 권의 책을 읽는다고 갑자기 섬이 커지거나 풍성해질 리도 없습니다. 매번 보았던 나무와 보았던 꽃 몇 송이가 전부인지라 나의 지식은 미비해 보입니다. 그래도 재미있는 책을 몇 권 더 사봅니다. 이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자 지식의 섬은 훌쩍 커져 있습니다. 나무뿐 아니라 나무에 붙은 매미나 잎사귀 위에 풀색 사마귀도 보입니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도 바람에 흔들리며 갖은 그림을 그려냅니다. 나의 지식의 섬이 커지자 가보지 못한 변두리가 늘어나 있습니다. 섬의 변두리는 지식이 커지면서 다시 배워야 할 새로운 지식을 말합니다.
변두리를 다니며 새로운 지식을 채우면 섬은 다시 커져있고, 따라서 섬의 변두리는 더 늘어나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이 나의 주머니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토요일 오전에 논술수업이 있어서 아이의 집에 가다가 '지혜의 바다'도서관에 잠깐 들렀습니다.달랑 수업시간 15분 남았는데, 원하는 책을 번개의 속도로 내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스스로와 내기를 하면서, 도서관 2층으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읽고 싶은 책은 한 권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조선 성종 때의 사람 김부의 '표해록'을 읽고 싶었던 겁니다.
표해록에 대해 들은 것은 한 달 전입니다. 한국사 강의 속에서 기가 막힌 김부의 사연을 들었죠.
제주도 관아에서 파견근무 중이던 김 부가 아버지 부음을 듣고 나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13일을 표류하고, 6개월을 걸어서 중국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요즘 인생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던 지라 기가 막힌 한 사람의 사연이 무척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시나리오에 없었던 타국에 들어가 갖은 고생을 하며 조선 땅을 다시 밟기 위해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조선의 관리라는 임무밖에 다른 삶이 들어올 여지가 없었을 텐데 중국의 풍속을 경험하면서 조선의 관리로서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꼭 이 책을 읽으면 나에게도 뭔가 깨달음을 줄 것만 같아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짧은 시간에 대출까지 해내지는 못했어요.
사다리를 타고 맨 꼭대기까지 갔지만 청구번호는 보이지 않았어요. 아마 그 위에 있을 것 같았는데 더 이상 찾을 수는 없었어요.(아쉬워라)
그 책과의 인연은 아직 닿지 않았지만 저의 주머니에 목록이 있는 이상 언젠가는 꺼내 읽을 수 있겠죠?
아이들이 독서논술수업으로 일 년, 이 년 책을 읽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독서코칭이 따로 필요 없는 자신만의 섬을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작은 섬일지라도 무언가가 채워지고 아기자기하게 가꾸게 될 지식의 섬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독서의 삶은 시작되는 것이죠.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 지식의 섬을 키워나가는 생활독서인으로 자리매김해 나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