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 버드, 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
에티컬 컬처 스쿨은 이 비상하게 박학다식한 아이에게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오펜하이머는 그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부문에서 자신이 원할 때 빛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대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회 문제들로부터 보호 반을 수 있었다. (중략) 에티컬 컬처 스쿨의 분위기는 그가 하루아침에 어른이 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사춘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53쪽)
'원자폭탄의 아버지' 혹은
검은 비 제조책임자의 핵폭탄 제조에 관련한 일련의 행적
1945년 8월 7일
오전,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속 직원들이 강당에서 오펜하이머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평소처럼 강당 옆쪽에서 나타나 단상에 오르리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극적으로 뒤쪽에서 입장해 중앙 통로를 따라 앞쪽으로 걸어갔다. 무대(?)에 오르자 두 손을 감싸 쥐고 우승자처럼 머리 위에서 흔들어 댔다. 그는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다고 말했고 이것을 너무 늦게 개발해 독일에 사용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1945년 8월 6일
당일 새벽 2시 45분에 ‘리틀 보이’를 탑재한 B-29기가 남태평양의 티니엔 기지에서 출발,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에 투하. 570미터 상공에서 폭발한 ‘작은 소년’은 열과 빛과 광풍으로 변환되어 온 도시에 저주로 임했다.
<참고:히로시마에 떨어진 ‘작은 소년’의 위력>
-약 570미터 상공에서의 폭발과 동시에 자줏빛 버섯구름, 1.4Km 상공까지 치솟아 오름
-엄청난 섬광, 목격과 동시에 실명한 사람도 있다고 함
-쇠를 기체로 바꾸고도 남을 약 4000도의 열, 폭심에 있던 사람은 검은 자국만 남긴 채 증발해 버림
-굉음 및 초당 300m의 음속에 가까운 폭풍, 순간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임
-가열된 공기의 급속한 상승으로 지표면의 순간 진공상태에 이어 강력한 대류현상과 함께 화염폭풍에 실린 유리 파편이 휘몰아쳐 사람들을 무차별 강타해 심각한 상해가 발생한다.
또한 모든 수분의 중발로 극한의 건조 상태는 극심한 갈증을 유발한다.
하늘은 열기와 재로 뒤덮여 밤처럼 어두웠고 폭발 후 30분쯤부터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목마름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기다렸단 듯 비를 받아먹지만 쇠 맛이 가득한 비는 갈증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심각해진다.
폭발 후 2시간쯤 후부터 생존자들에게서 방사능 중독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다량의 탈모, 코와 입 등에서의 출혈, 입에서 사라지지 않는 쇠 맛과 심각한 구토로 이어지는 메스꺼움증세 및 급성백혈병 증세가 나타났다.
"사람 동물 모든 생명이 가지고 있는 것이 말 그대로 죽음에 그슬렸다."(당시 도쿄라디오 방송 보도 내용 중)
한편, TNT 1만 5000톤에 상당하는 전대미문의 폭발에 관련한 결과를 오펜하이머에게 보고하는 중대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워싱턴에 대기하고 있던 맨리는 작전개시 여섯 시간 만에 수송기 에놀라 게이의 폭탄 담당 장교 파슨스로부터 작전 성공 취지의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로스앨러모스의 오펜하이머는 당일 상황을 보고받지 못했다. 대통령의 공식발표 전까지 그 누구도 원자폭탄 관련 정보를 공유할 수 없다는 상부의 지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 제조 최고 책임자 오펜하이머는 8월 7일 오전 11시 트루먼 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이 막 시작될 때에야 비로소 맨리의 보고를 받았다. 같은 날 오후 2시 워싱턴에 있던 레슬리 R 그로브스 중장-로스앨러모스 연구 소장으로 오펜하이머를 발탁한- 과의 통화 중 축하인사를 받았다.
1945년 7월 16일
1942년 8월에 극비로 시작된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여부를 판가름하게 될 실험을 단행한다. 1944년 봄, 오펜하이머는 3박 4일에 걸쳐 일단의 로스앨러모스 소속 연구원들과 핵폭탄 실험 부지를 탐색했다. 그들은 앨라모고도(Alamogordo) 북서쪽 97킬로미터 지점의 사막 부지를 낙점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 지역을 죽음의 여행’이라는 뜻의 호르다나 델 무에르토(Jordans del Muerto)라고 불렀다.
오펜하이머는 이 실험을 ‘트리니티(Trinity)’라고 명명했다.
당일 밤, 오펜하이머는 아내에게 “침대보를 갈아 도 좋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실험이 성공할 경우 보내기로 약속된 비밀메시지였다.
1945년 5월 31일
미국 핵정책의 미래에 관련한 자문회의 ‘임시 위원회(Interim Committee)’에 참석. ‘여러 종류의 목표물과 기대되는 효과’에 대한 토론에서 일본에게 원자폭탄과 관련한 어떤 사전경고도 줄 수 없으며 민간인 지역에 집중할 수 없지만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깊은 심리적 인상을 남겨야 하는 폭탄 사용목적에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목표물은 '많은 노동자가 거주하는 중요 군수공장 지역’이라는 참석자들의 주장에 오펜하이머도 동의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다수의 폭탄투하 가능성도 제기했다.
1943년 8월 26일
서해안 방첩대장 보리스 패시 중령과의 인터뷰 중 로스앨러모스 총책임자로서 “모든 것이 100퍼센트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내가 뭔가 잘못한 일이 있었다면 총살형을 당할 각오가 되었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약 5개월 여 동안 로스앨러모스 소장으로 재직 중이던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과업에 자부심과 아울러 성공에 대한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1943년 7월 20일
기밀 취급인가권 수령
그로브스는 맨해튼 프로젝트 보안 부서에게 오펜하이머의 기밀 취급 인가를 발급하라고 지시했다.
“오펜하이머는 프로젝트에 꼭 필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우리의 정보와 무관하게 추진될” 것이라고 했다.(399쪽)
오펜하이머는 좌익성향 활동에 대하여 극심한 의심을 받고 있어서 그의 기밀 접근 허용에 회의적인 사람들-방첩대장 보리스 패시 중령 등-이 있음에도 프로젝트 최고 책임자 그로브스 장군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어서 그는 연구소 소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었다.
1943년 3월 ~ 1945년 10월 18일
실제 원자 폭탄 설계 및 제작한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 소장 재직
1942년 10월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극비 군사연구소 책임자로 물망에 오름
프롤로그
1945년 8월 6일과 9일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을 연속으로 경험한 일본은 결국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승전국 미국에서 오펜하이머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유명인이 되었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들은 다시 한번 올림푸스 산으로 돌격해 인간을 위해 제우스의 벼락을 가지고 돌아왔다.”(라이프)라며 과학자들의 영광스러운 업적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그는 미국 철학 협회(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의 강연에서 과학이 인간에게 유익하기만 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자신의 창조물은 개념상 ‘공포와 침략의 무기’라고 규정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된 폭탄이,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사실상 패배한 적을 향해’ 사용되었다고 했다. 또한 “그것은 침략자의 무기입니다. 놀라움과 두려움은 분열하는 원자핵만큼 그것의 근본적인 성질입니다.”(538쪽)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