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톤
플라톤 지음/ 조우현 옮김/ 거암, 1983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산다는 것이라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말일세."(본 책 96쪽)
84년 6월 11일,
본 책을 다시 읽어야 할 일이 있어 새로 구입한 책이 배송되는 동안 잃어버린 줄 알았던 옛 <크리톤>을 먼저 읽었다. 천오백 원짜리 작은 책 페이지마다 오랜 시간의 향기가 누렇게 고여 있다. 맨 앞장 여백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하던 날짜와 함께 ‘가난한 나의 영혼을 위하여 이 밤 외로이 앉았느니 내 영혼이 성숙할 때는 언제 이더냐’ 어린 내가 한껏 멋을 부려 쓴 글이 있다. 갓 스물을 넘기고 아직은 섣부르던 청춘의 나를 조우하는 듯 뭉클한 감격이 느껴진다.
그 시절 나는 내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다. 중고등시절 한국사시간을 통해 우리 역사 속 지도자들의 한결같은 무능함과 지리멸렬한 이전투구를 목격했다. 그러한 생각으로 필터링된 현실의 사회 정치 또한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때까지 국민으로서 국가의 보호를 단 한 번도 체감하지 못했고 국가라는 사회적 보호망으로부터 유리된 외톨이었으며 내 나라에 대한 애정도 유대감도 없었다. 그런 내 나라에서의 남은 미래는 암울하기만 했고 사회적 삶에 대하여 일말의 희망도 없었다.
그토록 비루한 국가관의 소유자였던 내가 자신의 목숨을 걸어 조국의 정의를 지키고자 했던 한 인간의 삶과 그의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법이 뭐라고. 정의는 무엇이며 실체를 느낄 수 없는 나라는 또 무엇이라서. 법은 지켜야 한다고, 감옥 담을 넘어 도망쳐버리면 훼손될 것이니 정의는 그리 돼서는 안 된다고. 그저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살아야 한다며 죽지 않기를 바라는 친구의 간절한 소망을 끝끝내 거절하는 그의 말이 나에겐 생명력이 없었다.
2023년 2월 15일,
격세를 고지하는 듯 만 원짜리 가격표를 달고 나에게 온 새 책,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러하다. 나라면 임박한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그리 깊이 잘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간곡한 소망 또한 저버릴 수 없으니 친구의 청에 못 이겨 탈옥을 감행할 것이다. 부당하게 매도당한 70년의 삶이 억울하여 미련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 살아남아 더 잘살아 보고자 했을 것이다. 여전한 일상을 살 듯 그런 태도로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의 시간을 맞고 보내고 중년에 이르니 알아진 게 있다. (한동안 한국사 관련 책을 읽었다. 무지함에서 비롯되는 오해가 얼마나 해악 한 것인지 알게 되어 너무 좋았다.) 그가 그토록 지켜내고자 했던 ‘법과 정의’ 그 간절함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누가 뭐라 해도 사회적 존재로서 나의 정체성은 내 나라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 나의 부모와 나의 후대,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모든 정서와 기질의 출처는 세대를 관통하여 역사의 흐름으로 존재하는 내 조국이라는 사실. 수천 년의 지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내 나라는 느리지만 옳은 방향으로 이어져 왔으며 지금도 그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현실의 삶에서 체감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 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한 시민으로서의 자존감으로 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도록 나의 일상을 조절하고 절제하는 것, 국경일에는 태극기를 내걸어 기쁜 날이면 기쁘고 뿌듯한 마음으로, 슬픈 역사가 있는 날엔 다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며 내 나라에 대한 존중을 표시하는 것, 이런 것이 내가 일상의 삶에서 수호할 수 있는 정의요 애국이다.
어쩌면 그런 맥락 속에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결국 조국 아테네에 대한 극진한 애정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