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의 어느 날, 절친 동료의 우스꽝스러운 장난으로 열외 되어 찜찜하게 부대에 남아 있다가 당일 작전 중에 부대원 전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제대 날에 가장 먼저 친구의 아코디언을 돌려주기 위해 그이 아내를 만난 자리에서 친구의 유품으로 아코디언을 도로 받습니다. 줄게 없었던 그는 자신의 주소를 줍니다. 전사한 친구와 그의 아내 그리고 한 살 살배기 아이는 유대인입니다. 먼 훗날 그 종이쪼가리는 유대인 청년에게 유일한 희망이 됩니다.
은색 눈을 가진 독일인이 거국적 대세로 위세를 떨치는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은 걸 자신의 인생에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아들을 포함해 주변 사람들은 무식한 바보라고 비웃지만 그는 자신의 결정이 매우 의식적인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면 선량한 것이 분명한 이웃들을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못살게 구는 집단은 좋은 사람들 일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종종 책을 훔치거나 또 다른 책을 도둑질하고 싶어 하는 양딸을 위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담배를 팔아 크리스마스 날에 책 두 권을 선물로 줍니다. 곧 다가올 생일을 위해 한 권은 남기자고 한 아내의 말을 안 듣는 고집쟁이이기도 합니다. 생일은 나중 일이고 아이가 더 크게 기뻐하는 걸 더 빨리 보고 싶었을까요. 결국 생일엔 아무 선물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의 미련함이 답답한 그의 아내는 어김없이 욕을 퍼부었습니다.
공습대비를 위해 유리창마다 블라인드 칠을 해주며 그 와중에 쏠쏠한 수입을 챙기기도 합니다. 누군가 돈 대신 샴페인으로 지불하겠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샴페인 병이 도료를 문지르는 데만 쓰이는 게 아니라 원래 상큼하게 톡 쏘는, 역겨우면서도 달콤한 그런 게 들어 있던 병이라는 걸 양딸에게 알려주고 싶었답니다. 그녀 평생에 다시없을 샴페인 맛을 보았던 오후였지요.
서슬 퍼런 나치 세상에 ‘아직도 아코디언을 연주하시나요?’ 라며 자신의 필적이 분명한 주소를 들고 온 유대인 청년을 자신의 판잣집에 은신시켜 줍니다. 정확한 유대인의 거처는 지하실 계단 밑 작은 공간이고요 쓰레기 같은 시트로 가려 거기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곳입니다. 그 탓에 아내와 양딸까지 위험해지지만 그는 자신의 성품대로 의리의 본질을 실천합니다.
유대인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모른척하고 무시하고 더 나아가 비난해야 하는 시국에 유대인 이웃의 유리를 블라인드 칠해주는 무모함은 그에겐 그저 가벼운 해프닝일 뿐입니다.
유대인 행렬이 있던 날, 온 동네 사람들이 길가에서 구경하고 있는 와중에 짐승처럼 끌려가는 늙은 유대인에게 마음이 꽂혀 빵을 던져줍니다. 감격한 유대인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흐느끼는 바람에 독일군에게 들켜 채찍에 맞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집 지하실에 웅크리고 있는 또 다른 유대인을 생각합니다. 비참한 사람에 대한 연민 때문에 더 비참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그런 사람은 바보지요. 그는 자신이 바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이미 할 만큼 해주셨습니다.' 나흘동안 동네 다리밑에서 피신하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유대인은 매우 위험할 것이 분명한 어딘가로 가버립니다. 유대인은 떠났지만 책도둑의 아버지에게는 고요하거나 차분하지도 않고 평화롭지도 않은 정적이 남았지요. 그건 아마도 우울함이었을 겁니다.
영국군 전투기가 지나가고 불꽃이 비처럼 내리던 새벽, 책도둑의 아버지 한스 후버만의 주검은 아내와 함께 침대시트에 뒤엉켜 누워있었습니다. 고요함을 담고 있던 은빛 눈이 녹슬기 시작하고 바람이 들락거리던 아코디언 주름상자는 텅 비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p.s.
나팔꽃, 채송화, 달리아, 맨드라미...
이 책에는
이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저마다의 생김새와 향기도 풍기고요.
혹시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신 분들께
'책도둑'을 읽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