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한길사, 2010
-금서의 저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1513년 출판 당시부터 극심한 냉대를 받았다. 1559년에는 마키아벨리의 모든 저작이 교황청의 ‘금서목록(Index Liborum Prohibitorum)’에 이름을 올렸다. 내용이 부도덕하고 신학적 오류를 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가톨릭과 교리적, 정치적 대척점에 있던 개신교 측에서는 저작의 내용에 대한 평가 때문이 아니라 저자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인이며 가톨릭교도라는 지극히 일차적인 이유로 외면했다.
오랜 오명의 시간을 거쳐 현재는 고전의 반열에 있는 ‘군주론’을 집필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저자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함께 고찰함으로써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에 대한 오해의 역사를 재고해 보고자 한다.
-그의 시대
인간은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신의 지배를 받았다. 신은 대리인을 통해 그의 말씀을 계시했고 그것은 그 어떤 인간도 거역할 수 없는 준엄한 것이었다. 그 시대 모든 인간은 스스로 미천한 존재로 규정했다.
그 어두움의 시대에 대한 거역의 조짐이 나타났다. 이른바 ‘르네상스’라 명명된 그것은 예술, 과학 철학 등 모든 분야에서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이 열리고 내재된 역량을 스스로 발견하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재정립하는 거대 담론이었다. 이런 시대 조류의 한가운데 피렌체가 있다. 학문과 예술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막강한 후견인과 시대적 엘리트들이 피렌체를 거점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하고 있던 시공간적 배경에서 마키아벨리가 출생했고 성장하여 고위관료가 되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여 번영의 길로 가기를 바랐던 그의 염원이 군주론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꽃의 도시, 피렌체
피렌체는 아름다운 도시다. 또한 풍요롭기도 하다. 도시의 서쪽으로 흘러 그 끝이 지중해에 닿는 아르노 강은 그 어느 도시국가보다 아름답게 하고 풍요하게도 하는 피렌체의 원천이다. 그 강에 기대 물류와 의류 산업을 넘어 금융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환경이 오히려 위험을 부르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빈부격차의 심화, 상류 정치세력 간의 빈번한 갈등, 게다가 교황청, 프랑스 에스파냐, 신성로마제국 등 아름답고 풍요한 도시국가를 차지하려는 외부세력의 탐욕으로 피렌체는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었다.
-공직자, 마키아벨리
1498년, 29세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정무위원회 제2서기장직에 올랐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베르나르도의 영향으로 탄탄한 인문학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던 그는 주로 외교업무를 담당했다. 그가 현실행정 관료로서 시대의 주류들을 직접 대면하고 관찰할 수 있었던 다수의 기회는 고대 로마의 부활을 꿈꾸는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모든 정치체제를 아울러 통치자의 역량이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인간의 힘, 운명의 힘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인간의 힘(비르투), 혹은 운명의 힘(포르투나)으로 국가를 얻는다고 말하면서 이런 범주에 있던 군주들을 평가함에 있어 도덕을 배제한다. 마키아벨리에게 통치행위는 철저히 힘의 논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파견 사절 신분으로 당시 유력한 지도자 체사레 보르자를 4개월 동안 근접반경에서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보르자의 야심과 걸맞은 능력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사랑을 받으면서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정복한 영토에는 약탈을 허락하지 않으며, (중략) 용병제도를 믿지 않고 국민개병제도의 도입을 실행하고 있다. 그리고 결단력이 뛰어나고 무장으로서도 빼어나며 아울러 전략적인 두뇌를 가졌고 남의 생각 따위는 개의치 않는 귀족주의자.”(본 책 275쪽)라고 호평한다. 그러나 보르자의 지위는 근본적으로 교황이었던 아버지 알렉센데르 6세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자신의 걸출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죽음과 건강상의 문제로 급속한 몰락을 피할 수 없었다. 타인의 호의나 행운은 변화무쌍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군주의 오른 자들의 지배는 불안정하다고 평가한다.
마키아벨리는 사악한 방법을 사용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경우는 ‘비르투’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무자비하고 반종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왕에 쟁취한 권력을 지속하려면 일시적으로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조금씩 반복적으로 자비를 베풀어 지배를 받는 자들의 마음을 사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는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의 소유자다. “인간은 부드럽게 대하거나 아주 강하게 짓눌러야 한다.” 혹은 “인간은 가벼운 상처를 입으면 복수를 꾀하지만 아주 심하게 상처를 받으면 엄두조차 내기 어려워한다.”라고 하는 그의 인간성을 관통하는 강력한 논조는 너무나 과격해서 군주론을 통해 피력하고자 했던 권력의 본질을 오히려 가려버린다. 군주론이 오랜 시간 동안 극심한 폄훼와 왜곡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적나라한 폭로 때문이기도 하다.
-국민군
14, 15세기, 극심한 영토전쟁시대에 대부분의 국가가 자국 안보를 위해 주로 용병에 의존했다. 이로써 시민들은 생업에 전념할 수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용병은 계약에 의해 성립되는 관계라는 치명적인 취약성을 내포한다. 마키아벨리는 근본적으로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용병은 어떠한 경우에도 무익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오히려 자국 안보에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단정한다. 동맹조약에 따라 대리전쟁을 치르더라도 패배할 경우 당연한 몰락이 예정되어 있거니와 승리하더라도 군대통솔권을 용병 측에서 쥐게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런 맥락에서 피렌체 정부 10인 구성체인 ‘전쟁 위원회’ 실무를 담당했던 마키아벨리에게 자국 군대 양성은 필생의 염원이었다.
1506년 2월 15일 자국민으로 구성된 400명의 보병행진이 있었다. 마키아벨리주도로 현실화된 소규모 국민군 창설은 피렌체 시민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파면
1512년 11월 17일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제2서기국 서기관 직에서 파면되었다. 군사방위 업무를 담당했던 10인 위원회 비서관도 면직되면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피렌체를 사랑했고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의 공직자로서 불철주야 헌신했던 마흔셋 사나이의 실직은 말할 수 없는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피렌체 외곽의 산탄드레아 산장에 칩거하며 필생의 역작 ‘군주론’을 집필했다.
이어서
'소문으로는 진실에 닿을 수 없다'
군주론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