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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n 20. 2024

네가 나에게 왔다

7장

  희야의 수줍은 표정에 미소 비슷한 것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약간은 흥분한 듯 볼이 발그레해졌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반갑기는 한지 선유는 희야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었다. 선유와 호진이 양쪽에서 희야의 손을 잡자 손을 빼지 않은 채 함께 놀이기구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 친구들 많아? 희야가 소개해줄래?” 희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유와 호진의 손을 잡은 희야를 보고 흩어져 있던 아이들이 희야 옆으로 다가왔다.

“누구세요?”

“응, 희야 후원자야.”

아이들은 희야 뒤를 따라다니다가 곧 흥미를 잃고 다시 놀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희야가 한 여자아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긴 곱슬머리에 짙은 쌍까풀, 큰 눈망울을 가진 아이가 혼자 흙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네가 희야 친구니?”

“네. 희야 후원자님이세요?”

아이가 입을 벌리고 활짝 웃었다. 앞니가 빠져 있는 게 보였다. 귀여운 아이네. 선유는 이렇게 예쁜 아이는 왜 입양되지 않고 이곳에 있을까 생각했다.

“이름이 뭐야?”

“은아예요. 저 희야랑 같은 방 써요.”

“그렇구나. 참 예쁘게 생겼네.”

“은아는 아빠가 미국에 있어요. 얼마 있으면 떠나요.”

옆에 있던 한 아이가 말했다. “그래? 미국? 미국에 아빠가 계시니?” 그런데 왜 이곳에 아이를 맡긴 것일까. “네. 오빠들도 있어요. 다섯 명이나 돼요.” 은아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번져갔다. 무표정한 희야와 너무나 대조되는 밝은 아이. 가족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선유는 은아의 사정이 궁금해졌지만, 더 꼬치꼬치 물어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얼마 후에야 은아가 입양 진행 중이라던 그 아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 사는 한국 목사 가정에서 은아를 입양하려고 오래전부터 준비해오고 있었고, 몇 달 후 입양 허가가 나면 은아가 떠나게 된다는 것도. ‘희야는 친구를 잃게 되겠구나.’ 선유는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에게 헤어짐이 얼마나 익숙한 것인지, 계절이 바뀌는 게 당연하듯이 아이들이 떠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계절의 변화는 예측할 수 있지만, 아이가 떠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 다르다는 것도. 그때 선유는 희야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예고 없이 떠나게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희야에게도, 남은 아이들에게도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줘야겠다고.

  희야의 방 친구들, 언니들, 또래 남자아이들, 오빠들, 마당을 한 바퀴 돌면서 만난 아이들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제 희야 방으로 가보자.” 따라오던 몇 명의 아이들과 함께 벽이 하늘색 페인트로 칠해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장에는 운동화와 슬리퍼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희야는 선유와 호진의 손을 놓고 재빠르게 아이들과 오른쪽 복도로 내달렸다. 복도 오른쪽으로 문 위에 ‘펭귄 방’, 왼쪽으로는 ‘오리 방’이라고 쓰인 방 두 개가 나타났다. 문에는 커다란 펭귄과 오리 그림이 오려 붙여져 있었고, 생활계획표와 아이들의 이름, 생일이 적힌 종이가 복도 벽에 붙어있었다. 펭귄 방에서 놀고 있던 남자아이들이 선유와 호진을 보자 “어, 후원자님이다”라며 오리 방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선유는 벽에 붙은 종이를 눈여겨보았다. 여자아이들이 일곱 명, 남자아이들은 여덟 명이었다. 여자아이들은 일곱 살이 네 명, 여덟 살이 두 명, 아홉 살이 한 명이었다. 선유는 남자아이 중에서 눈에 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소영이의 앨범에서 보았던, 늘 소영이 옆에 있던 그 아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하얀 살결과 유난히 큰 눈 덕분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마치 사진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네 이름이 뭐니?”

“지운이요.”

“아, 맞다. 지운이. 지운아, 소영이 알아?”

“몰라요.”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지운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선유의 무릎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후원자들이 오면 늘 그랬던 것 같았다. “저희 소영이 알아요. 후원자님이 어떻게 소영이를 아세요?” 더 큰 남자아이들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응, 얼마 전에 우리 집에 왔었거든.”

“왜요?”

“그냥 잠깐 놀러 왔었어.”

“다음에 소영이랑 놀러 오세요.”

지운이는 너무 어려서 소영이를 잊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선유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빙긋이 웃고 말았다. 지운이는 선유의 무릎에 앉아 떠날 생각을 안 하더니 느닷없이 선유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라고? 누군가 선유를 엄마라고 부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선유는 묘한 감정이 일렁이는 것을 느끼며 지운이의 왕방울 같은 눈을 쳐다보았다. 이 아이는 왜 입양이 안 되는 걸까. 할 수만 있다면 이 아이도 입양하고 싶다. 나중에 국장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선유를 빙 둘러쌌다. 어디서 오셨어요, 아이는 왜 안 데리고 오셨어요, 저도 후원자 있어요. 폰 보여주세요. 선유가 폰을 내어주자 아이들은 폰을 쥔 아이 옆에 바짝 다가앉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아이 옆에서 침을 삼키듯이 폰과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이제 내 차례야.” 기다리던 아이가 폰을 낚아채자 빼앗긴 아이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아이들은 호진에게 달라붙었다. “업어주세요.” 호진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양쪽에서 손을 잡아끌자 당황했다. 그러나 곧 한 아이씩 번쩍 들어 어깨 위에 태우고 방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나도요, 나도요.” 아이들이 손을 뻗치며 호진의 뒤를 따라다녔다. 선유는 아이들이 호진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 신나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호진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미래의 아빠가 된 호진의 모습을 상상하니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선유와 호진이 다른 아이들의 차지가 되어 있는 동안 희야는 방 한구석에서 혼자 종이접기를 하고 있었다. 선유의 눈길은 자꾸만 희야 쪽으로 향했다. ‘성격이 조용한 아이인가 봐. 다른 아이들하고 많이 달라. 아무것도 요구하는 게 없어. 낯을 가리나?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야겠어.’ 선유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조용하고 위축되어있는 것 같은 희야의 모습에 더 마음이 끌렸다.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아이라고 했다. 그래서 작년에 입양이 실패했다고. 그럴수록 선유는 해 보고 싶은 마음과 자신은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선유는 아이들을 좋아했고 자신이 아이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선유는 다시 찬찬히 희야의 모습을 관찰했다. 비뚤비뚤한 앞머리, 진한 분홍색 티에 회색 운동복 바지. 엄마의 정성 어린 손길이 전혀 가지 않았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건 희야뿐만이 아니고 그 방에 있는 아이들 모두가 비슷했다. ‘촌스럽긴 한데 뭔지 모르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아이야. 좀 신비로운 느낌이 들기도 해.’ 선유는 눈앞에 있는 희야가 현실에 존재하는 아이 같지 않았다. 오뚝하지도 뭉툭하지도 않은 코는 약간 이국적인 인상마저 풍겼다. 특히 아몬드처럼 가장자리가 좁아진 희야의 두 눈에서 선유는 누군가에 대한 강한 그리움을 읽었다. ‘희야는 엄마를 원하고 있어. 난 그게 보여.’ 선유는 희야의 갈망을 자신이 채워주고 싶다는 소망이 속에서 꿈틀대는 것을 감지했다. 호진이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사이 선유는 혼자 떨어져 있는 희야에게 다가갔다. 선유의 질문에 희야는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귀찮거나 싫어서라기보다는 수줍어하는 것 같았다.

  “희야야, 노래 한번 불러볼까?” 어느새 방에 들어온 오리 방 선생님은 희야에게 다가와 말했다. 단발머리에 선한 인상의 젊은 여자 선생님이었다. 정말 희야가 노래를 부를까? 선유는 기대에 찬 눈으로 희야를 바라봤다. 그런데 선생님이 말을 하자마자 희야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제법 넓은 방 안에는 가구라고는 피아노 한 대와 책상 몇 개, 서랍장, 책장 하나가 전부였다. 방 한쪽 벽에 창고 같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안에 이불과 아이들의 가방, 학용품, 장난감 정리함이 들어차 있었다. 선유는 방을 둘러볼수록 이곳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 곳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지는 낡았고 낙서로 더럽혀 있었다. 가구도 아이들 것이라고 하기엔 투박하고 오래된 것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화사한 벽지로 교체하고 가구도 새로 마련해 주고 싶었다. ‘내가 너무 오지랖인가? 그래도 환경이 너무 열악해.’ 선유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희야는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가 책을 한 권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노래책이었다. 아이들이 희야 곁으로 모여 둥그렇게 앉았다.

  희야는 책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를 들어보니 유치원 원가인 것 같았다. 아이들이 따라 불렀는데, 희야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우렁찼다. ‘이건 의외의 모습인데.’ 희야가 정말 노래를 부를지 궁금했던 선유는 서슴없이 목청을 높여 노래하는 희야의 모습을 신기해하며 쳐다보았다. 볼이 발그레해지고 수줍은 듯, 자랑스러운 듯 눈을 살짝 내리깔고 노래하는 희야를 보며 감동으로 심장이 떨렸다. 우리를 위해 희야가 노래를 부르고 있어. 희야도 우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야. 그런데 노래를 듣다 말고 선유는 갑자기 피식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희야는 음치였다.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데 음정이 제멋대로였다. 선유는 호진에게 고개를 기울여 “노래 가르쳐 줘야겠다.”라고 작게 속삭였다. 호진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치라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노래를 많이 부르다 보면 저절로 고쳐질 것이다. 게다가 호진은 사람들이 성악가냐고 물을 정도로 노래 실력이 좋았다.

  “야, 희야 목소리가 아주 매력적이네.” 희야가 허스키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이미 눈치챘지만, 노래를 부르니 훨씬 심했다. 목소리는 바뀌지 않겠지. 여자아이치고 허스키가 심했지만, 선유에게는 그것도 매력으로 생각되었다. 희야의 뒤를 이어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아이들의 노래가 이어졌다. 희야도 열심히 함께 불렀는데, 음치인 아이는 희야가 유일했다.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이 참새들처럼 쪼르르 모여앉아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자니 선유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 아저씨 노래 들어볼래? 아저씨 노래 진짜 잘해.” 선유가 분위기를 띄웠다. “네, 노래 불러 주세요.”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호진은 아이들 앞에 서서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오, 솔레미오’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호진의 손놀림과 표정을 보며 하하거리며 웃었다. 선유는 희야의 표정을 힐끗 훔쳐보았다. 어쩌면 아빠가 될지도 모르는데 희야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했다. 희야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노래를 마치고 남자아이들은 펭귄 방으로 돌아갔다. 한바탕 넘실대던 파도 같은 흥분이 가라앉고 차분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가까이 다가오질 않았던 희야가 슬그머니 선유 쪽으로 왔다.

“언제 가실 거예요?”

“응? 네 시쯤 가려고 하는데.”

“저녁 먹고 가세요.”

응? 선유는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하던 희야가 저녁을 먹고 가란다. 가슴이 찡해졌다. “그래, 그럴게.” 뭘 더 해야 하나 막막했는데 희야와 시간을 더 보낼 수 있다는 게, 희야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는 게 희망의 불씨같이 선유의 마음을 덥혀 주었다.

“다음에 언제 오실 거예요?”

“응, 두 주 지나고 올 거야. 희야, 우리 기다릴 거야?”

희야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우리가 희야 마음에 들었나 봐. “두 주 지나고는 언제예요?” 선유는 희야의 손을 잡고 벽에 걸린 달력 쪽으로 갔다. “오늘이 14일이거든. 두 주 지나면 28일이야. 이날. 희야, 알겠어?” 끄덕끄덕. 희야가 다시 만나는 데 관심을 보였다는 건 분명 긍정적인 신호였다. 보육원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떠나기 전에 희야의 사진을 찍었다. 희야는 두 손을 양쪽 볼에 대고 살포시 입을 벌렸다. 검은 눈동자 안에 위로 올라간 흰색 반점이 뚜렷이 사진에 찍혔다. 그 흰 반점은 희야의 그리움이 응축된 자리였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선유와 호진을 배웅했다. “또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희야도 아이들 틈에 끼어 정문까지 나왔다가 선유와 호진이 손을 흔들자 냉큼 몸을 돌려 건물 쪽으로 내달렸다. 어둠이 살짝 대기에 내려앉고 있었다. 쌀쌀해진 저녁 공기가 뺨에 닿는 것을 선유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선유는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져 곧 터질듯한 풍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비단 희야를 만나서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보육원 아이들을 찾아가 후원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주변에 비슷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이렇게 쉬운 걸 그동안 뭘 그리 망설이느라 시간을 허비했을까. 후회보다는 마침내 막연했던 꿈이 이뤄졌다는 감격이 압도했다. 지운이, 은아, 소망이, 다연이, 영은, 진주, 솔이, 그리고 이름을 외우지 못한 펭귄 방 아이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물론 그 중심에는 희야가 있었다.

  “여보, 나 지금 너무 행복해. 내 꿈이 이뤄졌어. 우리 나중에 큰 차 사서 아이들 데리고 놀러 다녔으면 좋겠어. 우리 아이들 후원자 돼 주자.” 선유는 쉴 새 없이 가슴에서 솟아나는 말을 쏟아냈다. 호진은 들떠있는 선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 입양 때문에 온 건데.”

“그건 그렇지. 근데 나 아이들 후원도 하고 싶어. 어떻게 한 아이만 쏙 입양하고 다른 애들은 모른 척해? 난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호진은 선유의 말이 그저 허공에 맴도는 의미 없는 소리로만 들렸다.

“여보, 난 희야가 마음에 들었는데 당신은 어땠어?”

“글쎄, 난 아직 모르겠는데. 별 느낌이 없는 것 같아.”

호진은 선유가 로봇이라고 말할 정도로 감정에 무뎠다. 지나치게 이성적이어서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감정도 억누르기 일쑤였다. 호진은 감정을 무서워했다. 지금처럼 중요한 결정 앞에서는 더욱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그런 호진의 성향을 잘 알기에 선유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호진과 함께 나눌 수 없어도 자신에게 찾아온 이 과분한 선물에 감사하고 감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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