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권리는 어떻게 발전했나?
여러분은 동물을 재미로 사냥하고 괴롭히며 배척하는 사람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당연히 화나고 잘못된 행동이라 말한다. 그럼 해당 모습이 약 100년 전 과거라면 어떤가? 오늘은 덤보와 밤비로 과거 인류가 동물을 포함한 자연에 가진 시선을 주제로 당시 시대상과 지금까지의 인식 개선을 소개하겠다.
덤보에 이어 밤비는 주인공이 동물임과 동시에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다. 바로 인간 때문에 고통받는 동물의 시점을 표현했다. 두 영화 모두 동물에게 호의적이고 선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당시 사람이 동물을 보는 인식을 보여준다. 동물은 놀이 대상, 오락거리다. 동물에겐 권리따윈 존재하지 않고 고통과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믿었다. 디즈니는 시대를 그대로 표현하는 재능이 있다는 걸 명심하자.
과거 인류는 인간만 고등 생물로 취급하며 인간의 권리만을 챙겼다. 현대에 보면 잘못됐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그게 나쁘다기 보단 당연했던 시절이다. 세종대왕님이 노비제도를 폐지하지 않았다 해서 세종대왕님이 나쁜 게 아니다. 현재는 과거엔 당연한 걸 잘못됐다 말하며 바꾼 모습이다. 모든 전통과 상식은 시간이라는 시험을 맞이한다. 미래에도 우리는 잘못이 아니라 여기는 걸 잘못이라 말할 것이다. 예시를 들면 미래에는 길을 걷다가 꽃을 꺾거나 밟으면 식물의 생명 권리를 침해했다고 법적 조치를 받을지도 모른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와서 과거는 먹고살기 바쁘고 힘든 시절인데 동물 권리까지 챙길 여력이 어디 있겠는가? 동물권리는 생각할 겨를도 알아낼 시기도 없었다. 위대한 역사 인물조차 똑같았다.
동물은 진정한 쾌락이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생물학적 로봇이다.
-데카르트-
동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지만 도덕적 사유능력이 없으므로
인격에게만 부여되는 권리는 없다.
-임마누엘 칸트-
고대로 돌어가면 동물의 권리가 적은 건 서양이 더 심했다. 이는 종교와 철학의 이유다. 해당 내용을 이해하려면 서양 철학 역사의 간단한 내용을 알아야 한다. 서양 철학의 기틀을 마련하며 다양한 사상에 영향을 준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다. 플라톤은 이데야론을 주장했다. 이데야론은 현실 세계는 완벽한 세상을 투영한 세상이기에 완벽한 세상인 이데야,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로 두 가지 세상이 있다며 이분법론을 만들었다. 이분법은 서양 철학의 큰 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분법을 인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여자, 남자, 노예 등으로 나누고 생명은 사람, 동물, 식물로 나누었다. 여기서 사람은 이성이 있기에 무엇보다 고귀하다고 말하며 인간 중심 사상을 만든다. 서양 철학은 이런 식으로 세상 모든 걸 나눠 계급 구조로 정의했다.
종교는 어떤가? 서양 종교는 구약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유대교, 기독교가 있다. 둘 다 유일신을 믿고 사람은 신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기에 가장 높은 존재라 칭한다. 서양의 종교 역시 인간이 가장 높은 종이며 동시에 이분법을 사용한다. 신계와 인간계, 신과 인간, 인간과 동물, 천국과 지옥, 악마와 천사, 여자와 남자 등으로 나누었다. 즉 중세까지 이어온 서양의 틀을 마련한 종교와 철학은 인간과 동물을 확실한 계급 선으로 나누어 동물의 계급은 낮추고 인간의 신분은 높다고 말했다.
반대로 동양은 어떤가? 현재 동양은 개, 고양이를 먹고 서양보다 동물법이 약하다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종교가 강했던 고대 국가로 돌아가면 다르다. 동양의 종교는 힌두교와 불교다. 두 종교 특징은 모든 생명은 소중하기에 살생을 하면 안 된다 칭한다. 불교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니 채식을 하고 힌두교는 생명을 존중하고 웬만하면 동물을 해쳐선 안되고 특히 소는 절대 죽여선 안된다 말한다. 힌두교는 인간보다 소가 위인 역설 구조다. 참고로 힌두교와 불교의 뿌리는 '베다'라는 고대 인도 종교에서 나왔다. 베다는 서양 종교처럼 이분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건 하나의 세계이며 생명체라는 일원론 사상을 가졌다. 우주와 자아는 하나이기에 우주란 나이며 나는 우주이며 모든 생명은 특별하다는 구조를 지닌다. 이 뿌리는 불교, 힌두교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과거 동양 종교는 동물이 인간보다 하찮은 존재라 하지 않았고 낮게 보지 않았다. 인간끼리 신분제도는 있었지만 인간, 동물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게 여겼다.
시간이 지나 서양은 동물의 생명도 보호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동물보호법을 외친 장본인은 의외의 집단인데 바로 나치다. 1927년 나치는 동물의 생체 해부와 도살을 반대했고 1932년에는 생체 해부 금지령을 제시했다. 1년 뒤인 1933년에는 나치당 대표, 아돌프 히틀러가 법 제정 회의를 개최했고 11월 24일 동물보호법이 제정된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히틀러는 독일인제일주의라는 인종과 민족주의로 나치즘을 일으켜 독일인을 제외한 사람은 열등하다 말하며 세상을 청소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세계 2차 대전을 일으켰다. 약 5천5백만 명의 사망자를 만들고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이런 살인마가 동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 말한다. 동물은 보호하자면서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진 않았다. 타국 입장에선 우린 동물보다 못한 생명이라 말하는 태도다. 내 나라, 가족, 친구의 목숨을 빼앗은 존재가 동물은 소중하다 말하면 어떤 기분이 들 거 같은가?
히틀러의 주장을 듣고 '그래 동물을 보호하자'라는 생각을 당시 얼마나 했을까? '그래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켰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죽였고 우리 영토를 무참히 짓밟았지만 동물 생명이 중요한 건 맞으니 따라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당시 있었을까? 오히려 정신 나간 놈이라 욕하고 반발심이 더 했을 것이다. 전쟁으로 피폐해지며 서로 먹고살기 바쁜데 동물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 말하면 누가 따를까?
생존에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다. 피폐한 국가는 먼저 살아남는 걸 생각한다. 경제가 발전하면 그때부턴 국민의 권리와 자유, 평등을 외쳐 삶의 질을 올린다. 더 발전하면 국민의 영역을 넓혀 국가 내 동물, 식물 등 자연 생태계를 신경 쓴다. 국가 영역이 안정되면 타국과 다른 지역의 생태계를 돕는 식으로 이타심을 넓힌다. 세계 2차 대전인 한참이던 당시엔 세계는 인간을 제외한 존재에겐 신경 쓰는 게 불가했다. 자연을 위해 숲에 포탄을 쏘지 말라고 외칠 지휘관은 없다. 우리 역시 6.25 전쟁 당시 어르신들 이야기를 들으면 살아 움직이는 모든 동물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를 쉽게 듣는다. 개, 고양이, 쥐 상관없다. 생존이 먼저였으니 당연한 구조다.
물론 독일 이후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국가가 나왔다.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세계 2차 대전 덕분에 공장을 가동하고 전쟁물품을 팔며 많은 돈을 벌어 경제대공황을 해결하고 세계 1위가 되었다. 세계 1위가 되며 풍족해지자 국민의 인권을 넘어 동식물에게까지 권리를 확대한다. 위에서 말했듯 국가는 생존과 삶의 질이 해결되면 이타심의 영역을 넓힌다. 1940년대부터 미국인도주의협회인 AHA는 동물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안전한 촬영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개, 고양이, 말, 새, 어류, 파충류, 영장류 등 각각 상세한 촬영 기준이 생겼다.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는 동물 보호법과 권리를 이야기한다. 전쟁으로 피폐한 국가가 재건하고 국민이 다시 일어서며 더 멀리 내다보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정치 이야기로 가면 동물 보호법은 보통 진보당이 주장한다. 진보당은 경제가 풍족한 선진국에나 가진 개념이다.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은 나라 경제를 살리는 게 우선이기에 자국민을 우선하는 보수 정치만 하는 게 대부분이고 보수도 진보도 아닌 정당, 폭정, 폭군도 많다. 경제가 살아나면 이익을 나눠 국민의 불평등을 해결하는 진보 정치가 나오며 국민의 삶의 질이 일정 수준으로 올라가면 동물과 식물에게까지 시선을 넓힌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동물보호법을 말하는 국가는 먼저 국민이 일정 수준의 삶의 행복을 얻어야 나오는 말이라는 걸 잊지 말자. 대한민국도 동물보호법이 있고 꾸준히 생태계 보호를 이야기하는데 그만큼 선진국에 들어갔다는 증거다.
세계 2차 대전은 1939년부터 개전해 1945년 8월 14일에 끝났고 밤비는 1942년에 제작했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다음 날 1945년 8월 15일 해방하며 광복을 맞이한다.) 즉 밤비가 나온 1942년에 인간은 같은 인간 밖에 신경 쓰지 못하던 시절이고 자연, 동물의 권리나 고통은 모르며 신경 쓰지 않던 시절이다. 이 모습을 디즈니는 덤보와 밤비로 보여준다. 디즈니는 당시 미국인이 동물에게 가진 시선과 인식이 얼마나 동물에겐 잔인하고 부정했는지 알길 바랐다. 때문에 두 편 연속 동물의 입장에서 말한다. 물론 환타지아 실패로 재정난에 시달린 디즈니는 덤보의 성공을 보고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번 더 연장한 걸지도 모른다. 모험보다 안전을 택해 밤비를 그린걸수도 있지만 의도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이 든다. 미국은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했지만 전쟁 장소가 미국이 아니었다. 덕분에 재건할 것도 없고 바로 경제 1위가 된다. 경제 대공황이긴 했으나 다른 나라에 비하면 삶이 충분히 풍족한 덕에 덤보와 밤비가 미국인의 가슴을 울린 게 아닐까? 만약 미국도 전쟁으로 피폐하고 경제 1위가 안되었다면 덤보와 밤비를 보면서도 미국인은 감동을 받았을까? 감동을 받을지언정 그게 동물 보호법의 탄생으로 이어졌을까? 나라와 국민의 삶을 재건하는 게 목적이니 동물의 권리는 잠시 내려놓지 않았을까?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 의문이며 질문이다. 해당 영화는 미국인은 물론 많은 사람이 동물 입장을 생각하게 해 준 건 맞지만 미국은 당시 삶의 질이 높아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충분했다는 사실도 부정하진 못한다. 이런 풍족함 덕에 미국은 생태계와 많은 나라를 지원하는 게 가능했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동양의 작은 국가를 돕는 이타적 행위도 가능했다. 덕분에 우리나라가 6.25 전쟁 당시 지원받아 지금의 대한민국을 수복했고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발전하며 동물 보호권과 생태계 보호를 외친다. 인간이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 배려를 베풀려면 그만큼 발전하고 삶의 질이 높아야 한다는 걸 잊지 말자.
그러니 우리의 역할은 지금의 평온을 유지하며 과거의 인식과 행동이 현재로 돌아오지 않게 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 동시에 아직 과거에 머무른 국가를 도와 인식을 변화시키게 도우며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가게 해야 한다. 그게 선진국의 의무이며 디즈니가 밤비와 덤보 같은 작품으로 말하고 싶던 교훈일 것이다.
오늘은 이렇게 해서 밤비에 나온 동물의 입장과 인간의 시선을 소개했다. 내용이 유익하고 더 영화를 폭넓게 감상하는 계기가 되었길 바라며 글 마친다. 다음에도 밤비 관련 글로 돌아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