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이우환, 액션과 리액션의 사이에서

조응하고 거절하는 이우화니즘 !

‘관계 소믈리에’라는 직업은 없지만 우리 모두 얼마쯤 경력이 붙지 않았을까. 와인 말고 인간의 관계에도 각종 맛과 향, 풍미와 바디감, 산도와 탄닌감, 커피 향, 담배향, 나무향 등등 감별이 될 텐데. 처음 만난 사람, 더는 안 보게 된 사람, 평생을 좋은 친구로 지내는 사람들, 그 맛과 색은 온몸의 세포가 단결하여 반응하는 것이어서 한 병의 와인보다 더 뚜렷하고 다양할 텐데…

열 살쯤이었나. 퇴근한 아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차려주시는 늦은 밥상에서 하는 말이었지만 내 방에서도 들렸다. ‘쟤는 아무것도 신경 써 주지 않는데 뭐든 어깨너머로 보고 혼자서 따라오니까 참 이쁘다.’심지어 고모가 붙인 내 별명은 '어깨너머'였다. ‘별로 해 주는 것은 없어도 뭐든 알아서 다 할 수 있기’가 내 역할의 디폴트 값으로 굳혀지는 내성적인 꼬마잊지못할 순간이었으며 이후 있은 인간관계에서 늘상 발생한 각종 '버퍼링'불씨가 되었던 일이다.

쌍둥이 언니들과 남동생 사이에 태어난 가족 내 나의 위치는 매우 자유롭고 종종 서운한 자리였다. 가족에 속한 게 분명하긴 한데 언니들이나 동생보다는 분명 덜 속했고 그런 헐렁한 공간을 충분히 즐길 만큼 묘한 쾌감도 느꼈던 것 같다. ‘너는 위아래로 치여서 힘들겠다’ 말을 눈에 보이는대로 거름망없이 말하무신경한 친척어른들과 이웃들로부터 내내 들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해도 별반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고 그래도 대충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면 안 되는 것 같았다. 일요일 새벽에 다같이 동네 목욕탕에 가서 거국적으로 때를 밀고 성당을 간다든가 할때는 튀지 않게 집안관습을 따라주면서 몰래 딴짓하는 자유를 즐기는 법을 익혀나갔다. 한편, 뭔가 잘해도 언니들이나 동생이 잘한 것만큼 기뻐하지 않는 것은 서운했고 서운함을 표현하지 못할 만큼 소심하여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 입은 상처가 차곡차곡 모이는 것을 순간순간 스스로 지각다. 그 상채기들이 결코 무효가 될 수 없음을 그때 알았다해도 상처받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상처받지 않은 사람인 척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을 알기까지 혈연의 권력관계에서 벗어나기를 목표로 한 미련한 세월이 흘러갔다.

이렇게 내가 태어나 처음 만난 혈연관계들은 모두 그들만의 작은 세계 안에 있는 듯했고 나는 어느 누구와도 진정 어우러지지 못한 채 어정쩡하고 애매했다. 그리고 나는 그 애매함을 기본값으로 놓고 평생 누구와도 가족을 맺지 못/안 하고 그러나 어마어마한 자유의 구속을 받으며 아주 많은 종류의 관계를 통과하는 것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단독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어쩌면 아직도 필사적으로 ‘안전하고 단단한 관계’와 ‘위험하고 애매하지만 매력적인 관계’들 사이를 헤매고 있는 것도 같다. 어디에 속하고 싶을수록 속하지 말아야 오히려 맘이 편해지는 '아싸'적 이중성은 사주에 박제되어 있다는 역마살과 합을 이루며 번지수없는 정체성을 만들어갔고 '어디에도 백 프로 속하지 않기'는 생래적 어정쩡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살고 싶은 이해받기 어려운 내면을 가진 자로서의 방침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한국에서 20년을 산 뒤에 일본에서 40여 년을 산 후 유럽에서 30여 년 살고 그 이후 전 세계를 다니며 활동한 끝에 세계적으로 확고한 예술가적 정체성을 가진 이우환 선생님에게도 어정쩡함이라는 포지션이 가당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 활동시에는 일본냄새난다는 평가를 받았었고 일본에서는 한국인이라서 끼워주지 않는 일들이 있었유럽 주류들은 동양냄새난다고 은근 밀어내싶어하는 분위기를 감지했다는 것. 사람을 어떤 납작한 단어 몇마디로 축소하고 싶은 심리는 어쩌면 진짜로 그사람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는 거리가 먼, 고장난 라디오처럼 자동으로 오작동하는 뇌의 분류시스템 같다는 생각이 또 한번 드는 대목이다. 또한 그러므로 나로서는 당연하게도 이래저래 어디에서도 내부자가 아닌 무소속성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단독자로서의 고유성’을 애정하는 편으로 마음이 기울어진다.

소속감이 너무 강한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입장’ 같은 것을 기본값으로 가져가게 마련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에 대한 탐구의 기회가 적을 뿐더러 그로인해 진실성도 부족하기 쉽다며 소심하게 내 입장의 정당성도 항변해본다.

소속의 애매함을 부정하지 않은 채 살아온 이우환은 관계 탐구자랄지 공기 감별사랄지 작용 통역사 쯤 되는 '전지적 외지자 시점'을 바탕으로 마치 나를 위해 세상 모든 만남과 매개를 연구한 철학자마냥 점과 선만으로 얼마나 큰 울림을  수 있는 지를 증명해 주었다.  

캔버스와 이우환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그의 추상화로부터 기묘한 우아함을 느꼈던 것일까. 흐린 레몬색 바탕 위에 별처럼 수놓아진 파란색 네모들이 존재하고 있다. 가로로 줄지은 네모들은 백 퍼센트의 블루에서 점점 옅어지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에너지가 빠지는 것 같다. 네모 행렬이 수십 줄 늘어서 있는데 파란 물감이 닿은 면들과 그렇지 않은 면들 사이에 예민한 긴장감이 배어 나온다.

점으로 된 줄이 다른 줄들과 조응하면서 리듬이 생긴다. 갈수록 옅어지는 모습은 인간이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가는 걸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옅어진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님을 반복해서 말해주는 걸까. 계속 존재하고 있지만 다만 저마다 다른 텐션으로 흐려질 뿐인 것일까. 어느새, 그림이 기도가 된다. 나의 타고난 고독감도 지금쯤 저렇게 허옇게 바래져 본바탕의 노랑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기를 바라게 된다.

혼자 있는 공간에 누가 들어오면 공기의 흐름이 달라진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얼마나 자극적인가. 어떤 만남조금 맵고, 어떤 만남조금 싱거울 뿐. 공간  어떤 관계로 제시되냐에 따라 동일인과만남이 매번 같지도 않으니 모든 관계란 예민하고 매혹적이다. 같은 점과 선과 바람이어도 혹은 같은 존재와 삶인데도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선과 점과 바람들이 우리들의 휘청거리는 사소한 마음 섞여 달라 보이듯이 말이다.


이우환 선생님이 세상에 온전하고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만 보시지 않았다는 점에 마음이 많이 흔들린다.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흐리고 어지럽게 존재하여 모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도 섬세하게 보여주시고 심지어 누가 보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여백에게도 눈길을 주도록 제시해주니까  살뜰한 관점 나조차 외면했던 묵은 상처들달래지고 증발되는 것만 같다. 캔버스를 본인의 냄새로  뒤덮지 않고 최소한의 터치하신다는데도 그 작은 붓질은 세상 모든 컬러와 싸워도 이길 듯 단정하게 공간을 장악한다. 작품 앞에서 서성이면서 캔버스 안에 존재하는 절제된 붓질이 공간의 흐름을 바꾸고 이것저것 사이를 관계시키며 저며든다는 게 무슨 말인지 눈을 감았다 떠본다. 얕은 마음이 그의 깊은 세계와 페어링은 잘 안되지만 와인처럼 음악처럼 그윽한 느낌이 실내 가득 흩어지는 것도 같다.


무런 연고도 없는 나와 이우환의 사이를 선과 점과 바람들이 계속해서 연결해준다. 점점 무디어지는 신경줄을 단련하기 위해 그가 만드는 새로운 자극들을 언제나 기다려야겠다. 데이터와 프로그래밍과 애플리케이션으로 침침해진 눈과 딱딱해진 공기를 갈라줄 동일해 보이지만 조금씩 다른 붓질들을.  


그래서 이우환은 오롯이 이우환에게 나 또한 나에게 속하면 그뿐이다. 누구의 점도 아닌 각자의 점들이 평화로이 선을 긋는 오늘들 속에 가끔 이쁘게 포개지는 라인들을 오매불망 기다린다.

이전 14화 상처의 화양연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