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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를 졸업한 수양자

박서보와 우리 아빠와 나 그리고 박승숙 작가님

박서보를 공부하면서 참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세계적인 갤러리 페로탕과 전속계약을 한 이 시점에도 그에 관한 설명을 가장 정성스럽게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신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가 성실히 쌓아온 삶을 의심하지 않는데 티끌만 한 오해의 여지도 주지 않으려는 듯 자신의 여정을 낱낱이 설명하는 그의 긴긴 입담은 관찰자의 야릇한 선망도 오묘한 두려움도 삽시간에 꺼트리며 1인칭 시점의 공유자가 되게 만든다. 한낱 평범한 X세대인 내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획을 그은 거장으로부터  이토록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집에서 봤던 그 누군가와 너무 비슷해서 그런 듯 싶다.

묘법 시리즈의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연필심이 닳는 속도와 특유의 리듬감, 힘의 균질함 뒤에 웅크리고 있는 형형색색의 다채롭고 역동적인 삶의 궤적을 나는 끝내 가늠해 보고 만다. 중간에 집중을 놓쳐서 부러진 연필은 몇 개쯤이나 될까. 그 그림은 버려졌을까. 요론 것들이 궁금한 나야말로 수양이라는 말은 어쩐지 갑갑하다.

흔들리고 풀어지고 끓어 타올랐다가 식는 피가 뜨거운 작가의 대표작품이 묘법이라니 인물과 작품의 대비가 기묘하다. 한국 미술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앞장서기 시작하면서 싸울 사람과는 싸우고 그러나 끊임없이 모색하고 추진하고 누구도 못할 일들을 해낸 분이 종국에 수양이라는 답을 얻었다고 하니 오히려 그 여정의 고단함이 와닿는다. 예술이란 종교와 과학의 중간쯤에 있는 우주의 섭리 같기도 하다.


박서보는 청년시절부터 자신만의 에지를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잘 알고 있었고 총알받이로 징집되지 않기 위해 개명을 할 만큼 대담하고 총명했다. 사람 하나쯤 홀리고도 남을 말솜씨에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밑 빠진 독 같은 가난한 집안사정을 슬쩍 속이고 아름다운 부인을 얻을 만큼 과감하고 용감한 사내이기도 했다. 출발부터 남보다 앞서는 뛰어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범인들에 대한 이해가 애초에 어렵다는 점이다. 그가 미술계의 리더로서 추진하고자 한 일들은 과감하였고 그가 돌진할수록 불필요한 구설 또한 따라붙었다. 자신을 굽힐 줄도 아는 처세 같은 것은 그에게는 여의치 않았던 듯하다. 이기고도 지는 이상한 싸움... 그러나 뭐 어떤가. 혼탁하고 어지러운 근현대 한국사회의 한가운데에서 무어라도 얻으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국으로 있는 것이 시대의 분위기인 시절에도 그는 한번 생각한 것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반드시 밀어붙였다. 변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자의 엔진은 그저 몸뚱이 하나의 배짱이었으니 그는 스스로 또 다른 의미의 총알받이가 된 것이라고 나는 이해하기로 했다. 원하는 행동을 했고 성취했고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많은 첨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상한 첨언을 반복하다 보니 오히려 결국은 수양이라는 평화에 이른 것일까. 백 프로의 에너지를 다 쓴 작가의 단색화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격동의 시기에 매 순간 죽지 않고 살아있었던 선배 사피엔스의 고단한 경로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실은 이 글을 쓰려고 박서보에 대한 삶의 기록과 각종 도록 사이를 휘젓고 다녀도 캔버스 바깥의 자연인 박서보에 대해 아무런 실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 결국, 박승숙 작가가 아버지 박서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집필한 책을 읽고 인간 박서보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대를 비슷한 열정으로 살아낸 돌아가신 아빠에 대한 이해도 할 수 있었으니 못 풀던 수학문제의 뒤늦은 정답을 낸 기분이다.

 

두 아버지 모두 딸에게 많은 말을 했지만 그럼으로써 더욱 멀어진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실제로, 아빠를 보면서 자신을 많이 설명하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이해하자면, 전쟁통에 가장을 잃고 할머니와 가족들이 모두 존재했지만 그중 누구도 누구의 버팀목이 될 만큼 온전치 못한 가운데 중학생 나이부터 줄곧 생존모드라는 빨간 불이 켜진 채로 도망치듯 달려온 인생을 산 사람이 우리 아빠다. 어린 나이부터 크고 작은 모든 결정도 혼자 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결정에 확신이 있지도 않았을뿐더러 확신을 가지고 달라붙었다가 뒤늦게 후회한 경우도 있었으리라. 두 아버지는 겉으로는 외강내유라는 공통점도 있다. 말이 길어지는 만큼 상대로부터 깊은 이해를 받으리라는 가정은 틀렸다는 것을 아빠 앞에서 긴긴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았었는데 이 또한 비슷한 아버지를 둔 딸의 공통된 소회임을 알아차리고 내심 민망하면서도 반가웠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평생 무관심하던 그 오랜 일방통행 이야기보따리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골똘해지는 순간들이 생겼는데 박서보가 생산해 낸 극강의 아름다움 앞에서 얼핏 흩어져있던 아빠의 마음조각들을 헤아려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형식적으로는 구구절절 수미쌍관식 꼰대형, 주입식 말투이지만 겹겹이 쌓인 포장을 뜯고 또 뜯어 들어가면 그 속에는 제발 나를 이해하고 알아달라고 하는 두 어린 아빠가 이제는 눈에 들어오는 나이가 되었다. 한지를 겹겹이 쌓고 적셔 밭 갈듯이 파 놓은 고랑들을 보며 한 고랑 한 고랑이 수많은 아버지들의 인생처럼 보였다.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으나 같은 경로를 가는 평행선들이다.    

박서보의 삶과 우리 아빠의 삶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자니 태어남과 전쟁과 파란과 분투와 결핍과 성공과 욕심과 갈등과 화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로 나긋나긋해진 영혼에 이르기까지의 심리상태가 마치 차창 밖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과 다르다. 어쩌면 매우 적극적인 정신노동이다.

박서보를 경유하여 아빠를 이해하려 한 것인지 그 반대인지 모를 글을 하나 더 얹고 나니 이제 다른 쪽으로 가볍게 걸어보아도 좋을 심산이 난다. 내 숙제를 그녀가 대신해 준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시험지를 내가 커닝한 것인지 모를 일이나 지금 이 시점을 기쁘게 맞고 언젠가 박승숙 작가님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흐트러지지 않는 3인칭 태도로 일관한 그녀의 문장들 사이사이에서 많이 울었고 위로받았다.  


2023년 새해를 맞아 책상 앞에 좋은 말 하나를 베껴 놓았다.

“지금은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았다. 다만 너무 좋은 시간들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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