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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선과 면과 색채를 위한 유영국의 사투

다섯 살 때, 오래간만에 차려입고 동창회에 나가려던 엄마는 말도 안 되는 지시를 하고 나가셨다. 엄마가 없는 동안에 다락에 있는 설탕과자를 먹지 말라는 지시였다. 우리 엄마는 네 명의 호기심 많은 조무래기들을 통제하기 위해 ‘옥상의 전깃줄에 손을 대면 톰과 제리의 톰처럼 죽는다’든지 지금 생각하면 코미디급의 극약처방을 남발하기 일쑤였다. 우리는 엄마가 외출하는 순간, 소파 위에서 뛰기 등 금지된 모든 것을 다 해보는 환희를 맛보았다. 엄마가 나가자마자 나보다 몸집이 큰 일곱살 쌍둥이 언니들이 안방에 있는 다락문을 열고 다락장 벽에 꽤 큰 간격으로 붙여진 나무토막 계단들을 밟고 올라가서 설탕과자를 가지고 내려왔다. 조그만 아이들에게는 암벽등반의 운동효과가 있는 옛날식 다락장 이어서 올라가자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고 심장도 덩달아 후들거리는 짓을 과감히 해낸 것이었다. 언니들은 내게도 설탕과자를 나눠줬고 저녁이 되어 엄마가 돌아왔을 때 언니들이 내가 올라갔다고 고자질을 해 나만 호되게 혼났다. 언니들은 입을 싹 닦았고 내 입에만 설탕이 잔뜩 묻어있었다. 죄지은 사람이 더 오래 기억한다고 우리 모두 성인이 되었을 때 언니들이 이실직고해 줘서 깔깔거리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공소시효가 다 지나고 나면 범인은 자백을 하기 마련이다. 나도 먹었기때문에 당당할 건 아니나 억울해야 마땅한 명백한 '배신'이다.    

유영국의 반듯하고 진실한 성품은 사춘기 때부터 유난했는데 울진에서 서울로 올라와 강압적 식민제국주의의 교육을 참을 수 없어한 것은 장욱진과 마찬가지였다. 공부도 잘하고 키도 컸던 유영국은 자연스레 반장이 되었는데 일본인 담임이 매일 오후마다 유영국을 불러 오늘은 누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대라며 캐물었다. 유영국은 매일 아무도 잘못한 학생이 없다고 대답하고 함구하다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담임이 괘씸히 여겨 그를 매일 구타하기 시작했고 억울한 유영국은 구타를 참다가 자퇴를 선택했다. 유영국의 반에서 ‘잘못’을 했던 급우들은 기분이 어땠을까. 이때부터 2002년 별세할 때까지 쭈욱, 혼란스럽고 변화무쌍한 시대 속에서도 타고난 좋은 심성을 잃지 않고 흔들림 없이 걸어 나간 그의 인생을 따라가 보며 거인의 뒤를 밟는 난쟁이처럼 나 자신이 작게 느껴졌다.  

일제치하에서 부자였던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라는 선입견을 나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부잣집 아들에 일본유학파’라는 선입견이 단단히 입력된 채로 그를 만났으니 '과연 이 사람에게서 받을 감동이 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책들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읽는 내내 굴하지 않는 정신력과 선량함에 감동했고 여느 자기 계발서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기적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생업전선에 있어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에너지는 그 시대 어느 화백도 따라갈 수 없었다. 평생의 업으로 예술이라는 길을 택했지만 그림을 돈으로 바꿀 수 없다는 뚜렷한 현실인식과 생계에 대한 책임으로 그는 그때 그때 변하는 상황에 맞게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해 나갔다. 허망하게 붓을 놓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여러 번 일어났다. 그림에 대한 그의 마음이 좋아하는 일을 비틀고 쥐어짜서 돈으로 바꾸 려고 하지는 않도록 단도리했다. 미술을 생계와 연관 지었다면 일어났을 잠시의 영광보다 더 크고 맑은 영광을 위해 나아간 현실적인 대책들이 매우 마음이 아팠고 열정의 순도가 그만큼 높다는 공감으로 더 맘이 쓰였다.

시궁창 같은 시대의 현실을 원망 않고 남의 이목도 신경 쓰지 않고 그는 사진작가, 숯장사, 옷장사, 술장사 등을 해서 가계를 책임지며 마음 한구석의 선과 면과 바다와 산을 소중히 지켜나갔다.

일본 유학생활 중 태평양 전쟁으로 집에서의 송금이 끊겼을 때 침략전쟁을 고무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그는 사진찍는 기술을 배워 전시회에 출품하여 밥을 먹었고 일본이 승리하면 붓을 놓겠다는 생각으로 현해탄을 건넜다. 그는 고급지고 화려한 미술계를 뒤로 하고 지역 최고의 어획고를 올리는 어부가 되었다. 마음 한구석 선과 면들의 근원을 찾아 헤매었던 그는 해방 후 김환기의 초청으로 서울대 미대 교수가 되고 약수동 조그만 화실에서 수백 호짜리 큰 그림을 그려나갔지만 한편으로 좌우를 가르고 편 먹는 예술계에 환멸 하던 중 전쟁을 맞는다. 하루는 인민군이 다음날은 국군이 점령하는 구간에서 그는 숯장사, 옷장사 등 생계를 위해 무엇이든 했고 전쟁 후에 양조장 사업이 번창하기도 했다. 돈을 너무 적게 벌어도 너무 많이 벌어도 그림에는 해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적당한 선에서 뒤로 물러날 줄 알았기에 그의 그림들은 그림들로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전쟁의 불안도 생계의 처절함도 캔버스안으로 침범하지 못하게 조심하고 세간의 평가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오로지 순수한 완성을 위해서만 할애된 공간에 현대적인 세계가 굳건히 세워졌다. 그게 산이든 꽃이든 계절이든 그의 심성처럼 진실되고 성실하고 진지한 기운이 산맥의 척추인듯 쇄골인듯 힘차게 존재하기 위해 화가가 얼마나 많은 고기를 잡았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평생 그림을 그렸건만 환갑의 나이에 유영국은 생애 처음으로 그림을 판매했다. 애초부터 그가 그림으로 돈을 버는 것은 그자신도 가족도 기대하지 않았다. 한국 근현대작가 중에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 없이 화업을 계속 이어나가면서 이렇게나 많은 직업을 전전한 사람도 없지만 이렇게나 늦은 나이에 그림을 판 사람 또한 없다.


장욱진은 연락할 ‘친구’ 란에 유영국이라고 적었다. 한 분은 세속적 대책이 없기로 유명했고 한 분은 언제나 차선책을 마련하신 분이나 두 분의 마음 한편에는 같은 등불이 켜져 있음을 다. 하늘나라 한 구석에서 두 분이 한 잔씩 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별다른 대화가 없는 심심하고 헐렁한 장면이지 싶다.  인민군도 국군도 일본 제국주의도 없는 자유로운 곳에서 한껏 취하시기를 빌며 나도 한잔을 해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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