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먹은 밥그릇 수를 세어 본 적이 있다. 밥을 굶은 날이 별로 없으니 하루 세끼로 치고 365일 곱하기 3 곱하기 나이. 학교에 싸 간 도시락들, 남의 회사에 다니며 먹은 밥, 내 회사를 하며 먹은 밥, 좋은 사람들과 먹은 밥, 불편한 사람과의 밥, 내가 차린 밥, 혼밥, 사 먹은 밥, 남이 차려준 밥. 밥과 밥 사이 무엇을 하다가 여기까지 왔나 돌아본다. 가로 세로 2미터가 훨씬 넘는 김환기의 <우주>를 보고 서 있자니 그 모든 파란 점들이 내가 먹은 밥인가 싶기도 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촘촘히 찍은 점이 밥이라고 생각하니 잠깐 아득하다. 전면이 점으로 구성된 그의 작품은 작은 점들이 얼마나 큰 우주가 될 수 있는 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파란점들이 바다가 되고 장마가 되기도 하고 은하수도 되고 회오리가 된다는 것을 시간차 없이 한 화면에 보여주고 있다.
김환기의 인생 중에서 가장 감명 깊은 대목은 변동림 여사와 결혼을 단행한 일 같다. 아버지 몰래 간 동경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를 기다린 것은 집안에서 정해놓은 배필이었다. 이튿날 바로 식을 올려야 했다.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을까. 결국 그는 집 안팎의 통념과 눈치와 반대에 맞섬으로써 먹을 욕을 대가로 지불하고 영혼을 나눌 수 있는 반려와 함께 하는 삶을 택했다. 시작점부터 남달랐던 신남성 김환기의 인생은 그가 섞어낸 컬러만큼 쨍하고 아름답다. 스스로를 키 크고 싱거운 사람이라고 평 했지만 어지간히 배포가 없다면 할 수 없는 큰 선택을 한 사람이다.
변동림 여사는 김환기의 아호인 향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성도 바꾸어 김향안이라는 이름으로 사셨다. 김환기의 분신이라는 듯이. 연인이자 아내이자 동료작가이자 매니저쯤의 모든 역할을 자청함으로써 훗날 환기미술관까지 매듭을 짓고 여생을 마치셨다. 좌우대칭의 두 폭을 이어놓은 그의 추상화는 두 명의 김환기가 이루어 낸 세상처럼 보인다.
추상화는 좌우대칭이었지만 그가 애호해 마지않던 달항아리는 그와 반대로 상하의 두 짝을 포개어 붙여 완성된다. 위아래가 대칭인 듯 살짝 비대칭이면서 다양한 종류의 흰색과 패턴과 질감을 가진 달항아리를 아껴 보면서 달밤에 마루에 앉아 대포를 한잔 했을 그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친구처럼 정겹고 다정하다.
이렇게 한 점 한 점 그는 동경과 서울, 파리와 뉴욕에서 자신만의 점을 찍으면서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부산 피난시절 박서보의 재능을 발견했고 서울대 스승으로서 김창열을 도왔고 이중섭의 화풍을 극찬하는 글을 썼다. 이중섭이 이미 사망한 시점에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중섭이 형'의 건강을 염려하는 그의 파리시절 편지 한 줄이 마음 아프다. 알고 나서 많이 울었겠지. 김창열이 뉴욕에서 파리로 떠나는 날, 뉴욕 공항에도 어김없이 김환기가 있었다. 또한 그의 기록에 언급된 제자 '윤군'(윤형근)은 오늘날 방탄소년단 알엠의 싱글앨범 첫 번째 곡, Yun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근현대 미술사에서 김환기가 있어서 생겨난 별들이 많다.
홍콩 경매에서 135억 원에 낙찰. 수수료 포함하면 150억 원 넘음. 경매가 최고가 1등부터 10등까지 중 김환기 작품이 9개. 2023년 1월 현재, 그를 수식하는 말들이 주로 이러하다. 세계최고의 도시, 뉴욕이란 데서 생애 가장 궁핍한 시기를 보냈던 그의 야윈 모습과 대비되는 천정부지의 숫자들이 다 무언가 싶다. 장시간 서서 점들을 찍으며 중병에 걸린 사람은 가고 숫자들은야속하게도 지각을 했다.젠장 돈의 시차...그안타까운엇박자여...
그는 또 하나의 우주에서 잘 살고 있겠지. 술 한잔 하면 천재가 된다고 그는 연거푸 주장했다. 그가 찍은 수많은 점들 속에 나와의 인연을 찾아내고 싶어졌다. 연도별로 가지런히 쓴 그의 기록을 뒤져보니 내가 태어난 날에 그는 롱 아일랜드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해 뒤, 그는 우주로 환원했다. 그와 내가 지구에서 함께 한 시간은 2년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가까운 인연이라고 주장해 본다.
오늘 내가 찍은 점이 그에게 보이기를~
나는 오늘 천재가 된다.
P/S. 당신이 말한 대로 서울에는 지하철이 생겼고 덕수궁 돌담은 아직도 그대로이고 한강에는 수많은 다리들이 생겼고 당신의 그림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