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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루한 현실을 화려하게 감추다

피카소와 경쟁하여 대상을 수상한 영광의 한국작가, 남관

할머니는 ‘바느질 대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20세기 초에 태어나신 할머니가 대학을 가셨을 리가 없다는 것을 자라면서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가지고 노는 ‘마론 인형’들의 옷을 정교하게 만들어주셨고 평소에도 할아버지가 생전에 사주셨다는 재봉틀로 헝겊을 재료로 만들어질 수 있는 오만가지 것들을 척척 만들어내셨다. 할머니의 보물상자에는 오색빛깔 뜨개질 실과 동대문에서 사 오신 옷감들이 있었고 상품제작과정을 용이하게 해 줄 할머니만의 수제도구들이 있었다. 한국전쟁 후 어려운 시절에도 아빠랑 고모들이 엄청난 부잣집 자제들인 줄 모두가 착각할 정도로 할머니의 옷은 사람을 고급스럽게 보이게 했다.

할머니는 냉장고에 소고기가 한 줌 정도만 있어도 두부와 다른 재료를 섞어서 어마어마한 양의 동그랑땡을 만들 수 있었다. 할머니가 끓이는 된장찌개 육수는 멸치 몇 마리만 넣는데도 이상하게 구수한 국물이 우러나왔고 밀가루를 밀어 손수 만드시는 만두피는 매우 얇고도 절대 찢어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있던 자리마다 늘 작다란 개다리반상이 따라다녔는데 거기서 고모들한테 편지도 쓰고 바느질이나 뜨개질도 하고 한글을 깨친 다음에는 성경을 무던히도 읽으시고 때가 되면 봉숭아물을 개어서 우리 손톱에 발라주셨다. 할머니의 살림살이는 온갖 요긴한 것들로 이루어져 하루하루 당신의 즐거운 노동에 쓰였다. 손바닥만 한 마당에도 꽃씨들을 얻어오셔서 사시사철 다채로운 색깔의 꽃구경을 시켜주셨고 할머니 방에는 먼지가 앉아 놀려지는 물건이 없이 모든 물건들이 돌아가며 제 몫을 했다. 풍족하지 않아도 인간이 지력과 지혜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최고로 좋은 방법들을 할머니는 동원해내고 있었다. 전쟁을 겪어내며 할머니가 자동으로 연마해 온 각종 기술들은 아름답고 정갈한 의식주 생활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남다른 기술들의 원료는 다름 아닌 수많은 궁핍한 날들임을 어찌 모르랴.  

남관은 파리의 ‘살롱 드매’에 초대된 최초의 한국인 화가였다. 당시에 그림에 인생을 건 세상 모든 화가들이 큰 결심을 하고 예술의 본거지인 파리로 모여들었는데 김환기보다도 훨씬 먼저 파리에 정착한 분이다. 어느 소장자의 커다란 남관 그림들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실내의 공기를 환하게 만드는 화려하고 세련된 화풍이었다. 문자형태의 구상성과 당시 화풍에 맞는 추상성을 한데 구현하여 프랑스 국립미술관에서도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화백인데 김환기나 유영국에 비해 별로 인지도가 없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후대가 없어서 그런지 남관의 일생에 대한 기록은 본인이 기고한 글들과 당시 활동한 이일 등 평론가가 기록하고 보도한 것 정도에 그친다. 14세 때 일본에 건너간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여하튼 부모를 따라갔고 일본 미술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김환기보다 먼저 파리에 갔던 1911년생의 패기 있는 개척자시다. 이미 한국에서 중견작가였던 그가 40 하고도 중반에 세계적인 화가가 되어 오겠다며 감행한 도불. 그의 궁핍한 파리 생활에 대한 짧은 소회의 글들은 할머니의 피난시절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신라시대쯤 떠올리게 만드는 화려한 색감과 화풍 뒤에 숨겨진 작고 어두운 작업실의 공기를 짐작해 본다.

그가 전 생애를 가난하게 살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미 한국에서 오른 위치를 뒤로하고 파리에 간 초기시절에 한낱 무명작가인 남관은 남루한 의식주를 영위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중년의 싱글로 눈앞에 가까운 숨 막히는 벽을 마주한 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식량을 먹으며 작업을 하던 시절의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의식주 어느 하나도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작업에만 충실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우리 할머니와의 공통점은 밖에서 보기엔 그럭저럭 괜찮아 보인다는 것이다.

“몽파르나스의 빈민 아파트에서 굶주리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토굴처럼 컴컴한 방 안에서 귀신처럼 말라가는 중년의 사내가 국제적 화가가 되겠다며 앉아있었다."라고 그는 파리생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싼 우유와 빵, 30년 된 양복 등으로 대변되던 파리시절은 그의 그림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1958년 살롱 드 메의 초청으로 파리 화단에 데뷔한 일과 1966년 망통 비엔날레에서 무려 '대상' 수상이라는 치적이 있었지만 한국에서 남관을 아는 분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후손은 없고 그의 이름을 기리는 고향 청송의 플래카드만이 가끔 인터넷 여기저기 눈에 들어올 뿐이다.  

인생에는 반드시 혼자서 건너야만 하는 강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가 부산피난시절에 남편 없이 홀로 겪었던 난처하고 당황스러운 날들도 남관의 궁핍하고 남루한 시절도 절망을 견디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닥친 눈물의 시간이었다. 또렷이 닥치는 생의 문제들 앞에 도망치지 않고 하루하루 넘어온 20세기의 한국인들이 존경스럽다. 할 수 없는 것들을 상상하며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다 보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두 분이 가르쳐주시고 가셨다. 할머니는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종교에 마음을 여셨고 남관은 동양의 정화된 체험들을 서양화에 새겨 넣었다.

할머니는 꿈에 나와서도 한 숨도 안 쉬고 끊임없이 뭔가를 하신다. 남관은 누구의 꿈에 나올지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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