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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튕겨내다

그림 그린 죄 밖에 없는 결백한 아티스트, 장욱진

우리 집은 강북 ‘응팔동네’에 자그만 언덕 위 슬라브 주택이었다. 부모님은 같은 동네 더 작은 집에서 시작해 우리들이 태어나면서 조금씩 칸을 늘려갔고 우리가 어른이 되고 나서도 산 밑에 옥상도 있는 예쁜 집에서 사이좋게 늙어가셨다. 장독대와 강아지가 있고 집 바로 앞에 전봇대가 있는 고향 같은 집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맘속에 따뜻하게 있다.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는 동네 어느 집이 강남으로 이사 갔는지가 화젯거리였고 친한 이웃들이 하나둘씩 모조리 다 강남 아파트로 떠나도록 우리 아빠는 ‘닭장 같은 곳에서 어떻게 사냐’며 안 가시겠다는 입장을 유지하셨다. 그때 아빠가 다니시던 직장에서 논현동 00 아파트를 임직원가로 싸게 주는 일도 있었는데 땅 밟는 주택이 좋다며 마다하셔서 강남아파트값이 우리 집을 초라하게 만든 후에는 두고두고 엄마가 속상해하셨다.

아빠는 월급을 주는 직장에 충실히 나가서 버는 근로소득이 가장 당당한 돈이라고 믿는 듯했고 자본의 증식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신세계에 절대 가담하지 않고 일요일마다 성당 새벽미사에 가시며 전쟁생존자의 방어적인 태세를 고수하셨다. 그 대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 이 집으로부터 많은 걸 받았다. 상징적으로 우리 가족만의 분위기와 추억이 깃들어 삶이 팍팍할 때 큰길에서 집까지 뻗은 길을 걸어오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위로가 골목 가득히 퍼져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집이 보이는 골목어귀에서는 해가 떠도 더 또렷이 뜨고 노을이 져도 더 깊은 색깔로 지는 것 같았다. 해외출장을 갔다 오면 공항에서 내 집으로 가지 않고 부모님이 있는 그 집으로 가서 된장찌개를 먹어야 여독이 풀리는 것 같았다.

장욱진은 학문을 중요시하는 부잣집에 태어났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화가라는 직업에 극심하게 반대하는 엄격한 이모님 밑에서 자랐다. 하지만, 다락방에 숨어서라도 몰래 그림을 그려나갔고 화가가 되지 말라고 두들겨 맞아도 고집을 피울 정도로 업에 대한 의지가 굳었고 순하고 착한 심성과 불심으로 평생 모든 이에게 무해한 사람으로 사신 분이다.

다만, 돈에 대한 욕심을 경계한 만큼 평생 가족에 대한 애정을 돈으로 환산해 베풀 수 있는 처지도 되지 못했다. 그러나 약간의 돈이 생기면 자녀들 한 명 한 명에게 필요한 것들을 살뜰히 기억하고 있다가 베풀어주는 따사롭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그림 값을 올리려고 하는 각종 마케팅도 못마땅해했고 도시가 싫어 수도도 안 들어오는 시골 냉골에서 쭈그리고 앉아서도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 서울대학교 미대 교수직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일자리도 오래 못 다니고 그만 둘 정도로 세속적인 명예욕도 전혀 없는 분이었고 그의 장녀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에도 잠깐 들렀다가 바로 귀국할 정도로 부녀간 끈끈한 정까지도 경계하시는 정갈한 어른이셨다.

작고 소박하고 따뜻한 장욱진의 집들은 그저 밥을 해 먹고 도란도란 모여서 떠들고 노는 초가집들이 대부분이다. 부동산적인 가치는 응팔동네 못지않게 낮아 보이나 가족들에게 평생 인출하고도 남을 만큼의 액수가 찍힌 정서통장 하나쯤 마련해 주었을 것 같은 집들이다. 화백이 저 집 한구석 바닥에 주저앉아 캔버스를 포옹하듯이 싸안고 붓과 물감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동안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자라고 화가의 몸은 소진되어 갔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집 앞에 자전거가 놓이기도 하고 자동차가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무와 소가 자동차로 바뀐다고 해도 집이라는 다정한 네모는 겉에 그려진 스케치만으로도 그 속 안의 온기를 가늠케 해 준다.  

이렇게 구름모자를 쓴 ‘산할아버지’ 같은 장욱진은 그림을 그릴 뿐이지 그림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관심도 없이 오직 가난하고 청렴한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다가 20세기말에 하늘나라로 훨훨 날아가셨다.    

돈과 명예를 갖고 싶어 친일도 하고 재산 증식도 하고 후세에 물려줄 돈도 마련하는 사람들이 천지삐까리이던 시절, 중학교 일본 선생의 왜곡된 역사교육에 분노해 걸상을 집어던질 정도의 뚜렷한 주관을 지키며 평생 선비로 살기란 얼마나 고달팠을까. 왜정과 군정, 사이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혼탁한 길을 외면한 채 언제나 항상 갓길을 택했던 화백의 속마음을 감히 헤아리다 보니 아름다운 그림들 속에 숨겨진 가장의 비애가 느껴지기도 한다.     

‘당신은 무엇을 가졌나요?’ ‘그것을 가지기 위해 무슨 일을 했습니까?’ ‘ 그 돈과 힘을 어디에 썼습니까?’  이 질문이 자본주의에서 하루하루 소비하며 살아온 우리들에게 언젠가 만기가 차면 도래할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빠처럼 돈을 많이 필요로 하면서도 결코 돈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의 딸로서 우리나라의 특수하고 묘한 세상에서 매번 어리석은 판단을 반복하며 살아온 지도 꽤 오래되었다. 자본주의와 나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든 메우며 이 땅에서 먹고 자고 숨 쉬다 보니 돈에 대해 초연하고픈 사람일수록 오히려 돈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슬픈 결론에 이른 적도 많았다.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화백 중 돈과 사람 사이에서 결사적으로 반자본적 선택을 고집해 온 유일무이한 작가님 의 평화정신을 마음 깊이 모셔본다. 까치와 나무와 새와 아이를 그리면서 하늘나라에서도 붓을 놓지 않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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