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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블루'에게

슬프고 아름다운 윤형근의 천지문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와서 무수한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지만 또한 무섭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자판기처럼 자동으로 발사되는 번지르르한 치레의 멘트들과  뺀닥뺀닥하게 입꼬리를 찢는 웃음들 뒤에 매번 능글능글한 속셈과 뒤통수가 있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조금이라도 희석시켜야만 가능한 집단적 어울림 속에는 속세의 혼탁한 피로가 공기처럼 흘렀다. 가끔씩 보석같이 빛나는 '순도 높은 사람'들은 내게 너무 소중했고 이러한 심정이 방탄소년단을 알게되고나서 대폭 충족되었다. 어느새, 나는 아미가 되어 있었다.

RM이라고 쓰고 남준이라고 읽는 우리의 리더는 'UN연설자'라는 어마어마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여섯 멤버의 입장에서 늘 뒤가 불안한 ‘파괴몬스터’이자 멤버 중에 가장 센티한 사람이다.  넘사벽 지능에도 불구하고 손에 닿는 물건마다 부서트리고 깨뜨리는 조심성 없는 코믹한 움직임의 몸을 가졌고 ‘방탄에서 가장 춤 못 추는 양 날개’에다 ‘고음불가’의 가창력 등읕  팬들을 웃기는 데에 아낌없이 소진하는 그이다. 

하지만, 순탄한 출세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높은 학과성적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응원하지 않는 본인만의 길을 가고 ‘뜻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약속을 지켜나간 점에서 그는 사회적으로도 매우 유의미한 청년 리더의 삶을 살아왔다. 그가 갈아 넣은 시간 속에 100%의 진심으로 세상을 대하는 한 청년의 고군분투가 오롯이 엿보인다. 적어도 내게는, 현실에서 만나기 힘든 ‘깨끗하고 당당한 성공’의 표본이 바로 김남준이다.

최근 그는 방탄에서 떨어져 나와 솔로 김남준의 길을 모색 중에 그 앨범 첫 곡의 제목을 무려 윤형근의 YUN으로 정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김남준의 백지와 상처받고 분노한 윤형근의 캔버스가 과거와 현재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만나고 진실한 두 영혼의 연결이 이루어지다니 그 기묘한 만남이 신기할 따름이다.


한국 근현대 작가 중에 윤형근만큼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은 사람이 없다. 식민지 한국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유신시절을 살아오며 포레스트 검프의 ‘불운 버전’을 살아오신 분이다. 인민군이 입성한 서울에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공산주의 지도자 그림을 그렸다가 국군이 승전한 날에 끌려가 추궁당하기도 하고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을 위기를 맞거나 모택동 모자랑 비슷한 모자를 썼다고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등 다른 화가들은 겪지 않은 중대사건에 연루되어 세 번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윤형근의 기록>이라는 그의 일기에는 옥살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절친한 최종태에게도 자신에게 일어난 혹독한 일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의 그림만큼은 그가 하지 못한 말들을 꾸준히 반복적으로 이어나갔다.

김남준과 윤형근의 공통점은 세상이 요구하는 사람이 되려고하지 않고 자기자신으로 살고자 한 것이다. 말없는 것들의 말을 찾아내어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을 서술하고 시대의 공기를 전달하려함이 두 예술가의 본업인 것이다. 덕분에, 실제 삶과 언어 사이, 실제 삶과 그림 사이에 끈들을 묶었다 풀었다 하는 두 영혼덩어리의 숨소리를 듣자면 가슴이 시원해지고 맑아지는 효험을 보는 것이다. 윤형근이 지금의 윤형근이 되게 만든 작품들은 오일을 섞은 블루든 엄버든 먹색이든 한지나 면이나 마 위에 가차 없이 내리긋고 다시 한번 더 긋고 여러 번 더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그 사이의 공간에 대해 말하고자 한 일종의 추상표현화다.

수그러지지 않는 절망과 슬픔으로 가장자리가 번져진 색과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은 기둥의 형태를 보자면 누구라도 가슴속 슬픈 기억들을 마음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 듯하다. 함께 흐르고 스미다가 번질 수 있다면 짙은 슬픔도 얼마쯤 달래질 게 아닌가.

‘슬픔이 깊어 소리 내 울지 못하는 정도인 것’이 한이라는 한국말에 대한 영어적 정의라고 한다. 그걸 이렇게나 많이 그려 놓으셨다.  가끔, 우리에게 서구적이고 밝고 명랑한 것들이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면 아마도 마음속 깊은 바닥에 있는 슬픔을 외면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땅에서 불과 수십년전에 아버지 세대에 일어났던 일들과 우리가 어떻게 무관하다 할까. 그리하여, 현대인의 정신건강 필수 아이템은 바로 윤형근인 것이다.  역시, 진선미 중 최고는 진이다. 진실한 것은 착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모두 아우른다고 하셨다.  알엠의 엄버는 무엇일까.  김남준이 지금보다 더 진짜 김남준이 되는 장면을 응원하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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