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쓸데없는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서성였던 시간을 다 합치면
지구를 몇 바퀴 도는 시간일까. 그러나 다 알면서도 여전히 무슨 일에 돌입하기 전에 충분한 사전 준비의 시간을 갖고 싶고 이런저런 고민의 경로를 하나씩 가보며 게으름을 피우고 만다. 인생 2막에서는 이런 습성을 고치고 중요한 일 이외의 상념들을 조금씩 떨구어 나가려고 한다. 내가 온 신경을 집중하고 마음을 보내는 곳이 곧 나의 삶이 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
문신의 전시회에 가게 된 것은 운명의 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의 인생을 조망하며 그 안에 나의
방황과 고민을 비추어 볼 기회를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는 이런저런 인생의 파도를
다 받아들이며 다만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을 계속한 사람이었다. 그의 별명은 25시라고 한다. 쉬지 못
하는 습성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그는 누구도 쓸 수 없는 이력서를 몸에 새기며 살았다. 일제치하 일본의 탄광촌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일본인 여인과 사랑을 하여 문신이 세상에 나왔다. 아비의 고향인 마산으로 와 다섯 살이 되자 부모는 문신을 할머니의 손에 맡기고 일본으로 떠났고 일곱 살이 되자 할머니도 돌아가시면서 문신은 삼촌이 하시는 전기상에서 직공으로 일을 하고, 술배달도 하지만 일이 다 끝나면 그림을 그렸고 마산시내 영화간판도 그리게 되었다. 잘 그린다는 소문이 나 통영이나 진주 등 모든 영화간판을 혼자서 다 그리고 돈을 마련해 일본으로 밀항해 엄마를 찾아가지만 버림받는다.
일본에서 영화 엑스트라, 영화간판 화가, 시체를 꿰매는 일까지 하며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마산으로 왔다가 서울로 가서 모던한 그림을 그리며 각종 전시회를 하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당시 모든 예술의 본거지 프랑스로 가지만 환전사기를 당해 50불을 손에 쥐고 센강에 투신하려다 동료화가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구한다. 이때 정말 생뚱맞게도 프랑스 외곽 미술학교의 건물 리모델링 작업에 노동자로 참여하게 된다. 돌과 목재를 깎고 다듬고, 마루를 깔고 큰 돌들을 쌓아 올리고, 벽을 가르기도 하고 미장이도 하면서 그는 이미 조각가가 될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발카레스 해변의 <태양의 인간>을 비롯해 <1988년 올림픽 기념 조각상>까지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독특한 조형물들을 세상에 내놓으며 그는 시위가 당겨진 화살처럼 마산의 노 젓는 어부처럼 힘줄을 보이며 깎고 다듬는 연장들과 전기톱을 들고 손이 시키는 대로 일을 계속했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치면 침대에 누워서 채색화를 그렸다.
문신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200점의 알찬 작품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느라 다리가 아팠다. 돌아서면서 한번 더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생의 궤적을 훑는 것만으로 숨이 찬다. 드로잉만 5천 개를 그리고 피카소와 비견되는 대단한 회화를 남긴 것만도 힘든 일인데 세계적인 조각가로 거듭난 목재, 철제의 작품들은 그 작업과정의 사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같은 사피엔스로서 감탄스럽다. 게다가, 눈물을 쏙 빼는 인생스토리를 알고 나니 이제야 알게 되어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어쩌면 그는 달랠 수 없는 영혼을 가졌었는지 모른다. 버려지고 계속 떠나오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목재나 스테인리스를 조각하면서 일그러지고 구겨진 자신의 마음을 다듬고 문질렀는 지도 모르겠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디쯤일까.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세계속으로 겁없이 파고들어가 소우주 하나쯤 추가한 일, 예술이라는 노동으로 이뤄낸 그의 발자국들에 무한한 경배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