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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PD May 02. 2024

집이란 무엇인가


마당 넓은 집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은 넓은 마당이 있는 곳이었다. 겨울이 지나면 개나리가 피며 봄을 알려주고, 따뜻해지는 날씨에 살구꽃, 라일락이 흐드러졌다. 수국이 필 때쯤이면 몇날며칠 내리는 장대비를 구경했다. 가을엔 꽃밭 가장자리를 따라 피는 국화 향기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날아다니는 벌을 잡다가 쏘이기도 하고, 땅을 파서 온갖 장난을 치기도 했다. 동네 친구들을 불러 마당을 헤집고 뛰어다니는 것이 즐거움이고 일상이었다. 윗집과 마주한 축대 밑에는 어머니가 키우시는 배추가 자랐다. 장독대 한편에는 매년 호박씨를 심어 덩굴이 자랐다. 블록 벽에 석면 슬레이트를 얹은 허름한 창고에는 노란 호박꽃이 피고 달착지근한 호박이 열렸다. 호박을 따는 역할은 가족에서 가장 어리고 몸집이 작은 내 몫이었다. 창고 지붕에 열린 호박을 따러 올라가 혹여나 슬레이트가 깨지면 낭패가 벌어질 일이었다. 다른 구석에는 쓰지 않는 우물이 있었다. 옆집과 반반 걸쳐 있어서 아마도 옛날에는 같이 식수로 썼을 법했지만, 두레박 없이 닫혀 있었다. 얼마나 깊은지, 물은 있는지 늘 궁금했다. 나무 뚜껑을 조금 열고 소리를 질러보면 작은 메아리가 돌아왔다. 모래를 한 줌 떨어뜨리면 멀리 물에 닿는 소리도 들렸다. 으스스한 상상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곳이었다.

 물론 이렇게 좋은 것만 있지는 않았다. 지금은 헐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집은 일본인들이 만든 단층 적산가옥이었던 것 같다. 넓은 마당에 비해 좁게 지은 집에 여섯 식구가 오골오골 모여 살았다. 낡은 집은 추위를 지켜주기엔 힘이 벅찼다. 겨울엔 두터운 양말을 신지 않고서는 마루를 지나기가 어려웠다. 잠을 자려 누우면 천정 위를 달리는 쥐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욕실에 받아 놓은 물이 모두 얼어있었다. 게을렀던 나는 물이 얼었다는 핑계로 씻지 않고 학교를 간다고 떼쓰기도 했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지붕이 새는지 천정 벽지가 볼록하게 커졌다. 점점 볼록해져 언젠간 터질라 쪼그리고 앉아 쳐다보고 있었던 적도 있다. 보도블럭도 잔디도 없던 마당은 장마엔 온통 진창이 되어 연탄재를 깨 길을 만들고야 다닐 수 있었다. 일본식으로 지어 실내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던 집이었는데, 비가 유독 많이 오면 어머니가 그것부터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화장실이 집안으로 넘치면 큰일이 아니겠는가. 주말 아침에는 아버지의 불호령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온 가족이 마당에 집합했다. 마당 구석구석 나오는 잡초를 뽑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 그게 얼마나 싫었던지.   


  

<꽃밭에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절 기억은 다 아름답다. 나이가 들어 기억이 윤색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번거로운 집안일은 다 어른들의 몫이어서 좋은 것만 더 기억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에 더 즐거운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 소소한 일상들은 결핍의 연속이었다. 문만 열고 들어가면 따뜻한 요즘 집들에 비하면 그때 겨울 집안은 시베리아 벌판 수준이었다. 아무 때나 온수가 나오는 수도꼭지도 없고, 에어컨이란 건 들어본 적도 없던 때였다. 그래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뜨거운 해가 지고 마당의 평상에 누우면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기향을 하나 피우고 엎어져서 그림을 그려 아빠 엄마에게 보여주며 자랑하고 행복해했다. 비가 온종일 내리는 날 젖는 줄도 모르고 마당으로 모험을 떠난다. 질척이는 흙에서 맹꽁이를 발견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기도 했다. 손이 꽁꽁 얼도록 밖에서 놀다가 장판이 까맣게 탄 아랫목 이불 안으로 뛰어들었을 때의 따뜻함은 어디에 비할 수 없었다. 장난감은 없어도 세상 모든 것들이 놀거리였다. 자연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 했지만 그 모든 것을 친구로 가지고 있었다.

 모두 다 그렇게 살던 시절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의 집들은 대개 그런 단층 주택으로 되어 있었다. 지방 도시에서 아파트라는 건 특별한 주거형태였다. 집이라고 하면 지붕이 있고 마당도 있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꼬맹이 시절을 보내고 고교시절 이사 간 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붕이 있고 마당이 있는 집. 다른 점이라면 2층이 있어서 방이 하나 늘어났다는 정도였다. 그때 내가 꿈꿨던 행복한 나의 미래 모습은 자연스레 동요 ‘꽃밭에서’같은 것이었다. 꽃이 피어있는 정원과 잘 지은 집에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이었다.    


  

아파트라는 것


 대학에 진학을 하고 처음으로 집을 떠났다. 서울에 홀로 올라와 짧은 하숙생활을 했다. 병역을 마치고 복학할 때 결혼하고 자리를 잡은 형에게 얹혀살게 되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게 된 것이다. 신혼부부가 시작할 때 가장 흔히 사는 그런 구조의 아파트였다. 복도식 아파트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옆에 작은 방이 하나 있고 안쪽으로 거실 겸 안방이 있는 조그만 집이었다. 아파트는 듣던 대로 살기 편했다. 일 년 내내 큰 변동 없는 실내 환경이 유지되었다. 작은 집이었지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었다. 집근처의 편의시설들도 쉽게 이용이 가능했다. 십여 분 걸어 나가면 전철역이 있어 시내 어디든 쉽게 오고 갈 수 있었다. 집이 가져야 하는 효율성을 집약하여 만든 아주 합리적인 주거형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서울에 오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를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했었다. ‘집은 기계가 되어야 한다’며 모더니즘 건축을 열어젖힌 그는 건축의 합리적 효율성을 강조했다. 이런 그가 생각했던 도시의 모습에 서울이 가장 가깝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르코르뷔지에가 2차 대전 후 도시 재건을 위해 설계한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s d'habitation)’은 현대 아파트의 효시로 여겨진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들어진 이 건축계획은 1600명이 살 수 있는 아파트가 340여 채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주거 공간 외에도 쇼핑가와 편의시설을 갖춘 내부 공간이나 옥상의 유치원, 체육시설 등 하나의 작은 도시가 되도록 만들어졌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아파트 단지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 주거단지가 들어섰을 때 프랑스사람들은 멋대가리 없는 ‘미치광이 집’이라고 욕했다고 한다. 자연과 함께 하는 주거형태에 익숙한 사람들 눈에 실용성을 극대화한 집은 사람 사는 곳으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국도 한창 아파트가 새로 들어서던 시절에는 그 삭막함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꽤 많이 들렸다. 하지만 먹고 사는 일이 너무도 바쁜 이곳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낭만은 사치일 뿐, 지금은 가장 효율적인 아파트가 주거의 표준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말 그대로 ‘사는 기계로서의 집’이 가장 보편적인 나라에 살고 있다.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집은 살기 위한 것만이 아니게 되었다. 집은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 인생을 걸고 가져야 하는 목표가 되었다. 직업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파트 한 채를 사기 위해 전력질주 한다. 한강의 기적을 보이며 고도로 성장하던 시절 부동산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서울과 인근의 땅들은 개발이 되며 수많은 부자들을 만들어냈다. 그곳에 들어선 아파트들은 수십 년간 불패신화를 써나갔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증식하는 자산이라니, 그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쓸 데가 어디인지 모를 주식도 아니고, 들어가 살고 있기만 하면 돈이 불어나는 신통방통한 물건이 바로 아파트였다. 돈을 모을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점점 외곽으로 밀려났다. 밖으로 밀려나 파김치가 되도록 출퇴근을 하면서 ‘내 언젠가는 인서울 아파트를 사리라’ 다짐한다. 그렇게 ‘인서울 아파트’를 사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박수 소릴 듣게 된다. 그 아파트가 사는데 어떻게 편하고 좋은지는 그 다음에 물어볼 질문이다.      



레이스를 뛰고 허들을 넘어     


 나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집을 향해 달렸다. 직장을 가지고 처음 마련한 집은 11평 반지하 전세방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밤을 새고 일이 좀 없는 날엔 밤새 술을 마시는 PD생활이 지속되던 때였다. 회사에서 멀리 살다가는 길거리에서 불귀의 객이 될, 정신없던 시절이었다. 잠을 자는 것 외에는 별 여유가 없던 때라 집에 필요한 것이 많지 않았다. 정신이 오락가락 해도 찾아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면 됐다. 습한 공기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래도 칙칙한 빛이 드는 창을 술이 덜 깬 눈으로 쳐다보며 ‘아파트로 가야한다’라는 생각이 든 건 당연한 사회적 학습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렇게 쳇바퀴를 돌려 돈을 모으고 아파트를 샀다. 회사에서 너무 멀어 들어가 살기엔 어려운 집이었지만, 저거라도 사놓아야 다음을 도모할 수 있겠단 판단으로 처음 내 집이란 걸 장만했다. 그렇게 내 집엔 세입자를 놓고 나는 세입자로 남의 집에 사는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남들과 함께 아파트 레이스를 뛰었지만, 내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꽃밭에서’의 집은 지워지지 않았다. 근교에 놀러 갈 때 전원주택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 했다. 식사를 하러 시내에 나가도 근처에 남아 있는 주택지가 있으면 산책하며 구경하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산 아파트는 내게 ‘집’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파트는 수단이고 정말 가지고 싶은 집은 어릴 적 뛰어 놀던 마당이 있는 공간이었나 보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전세로 살던 아파트 계약이 끝나갈 때였다. 또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택을 덜컥 사서 들어갈 여력도 없었다. 길바닥에 나앉을 수는 없으니 결정을 해야 했다. 주택 전세를 찾아보자. 내가 주택에 살 수 있는 인간인지 시험에 들어가 보자. 부동산 사이트에서 내가 가진 여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주택들을 찾아서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차례로 순방을 하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그렇게 몇 주를 들여 내 눈엔 적당한 (하지만 아내의 눈에는 맘에 들지 않았던) 주택을 계약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무식해서 용감했던 결정이었다. 집주인이 살지 않아 관리가 안 된 주택은 정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하나부터 백까지 직접 손을 대지 않고는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일 외에 남는 시간은 거의 모두 집을 관리하는데 들였다. 어릴 때 느꼈던 주택의 불편함은 세월이 지나도 완전히 고쳐질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난 즐거웠다. 주택에 사는 것이란 이런 느낌이구나. 난 정원이 있는 집에 살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렇다. 난 시험에 통과한 것이다.     



사람 사는 집, 그리고 인연     


 주택은 불편한 점이 너무 많다. 공동으로 살며 관리인이 있는 아파트와는 너무도 다르다.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사고파는 것도 너무 불편하다. 아파트가 규격화된 제품이라면 주택은 개별적으로 너무 다른 상품이다. 그만큼 내놓아도 잘 팔리지 않는다. 주택담보 대출도 아파트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돈만 가능하다. 하지만,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머릿속에 ‘집’을 떠올려보자. 무엇이 떠오르는가? 태어나서부터 평생을 아파트를 집으로 알고 살았던 아이들에게 집을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아직도 세모난 지붕에 네모난 창이 달린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마당에 꽃이 있고 가족이 뛰어 노는 행복한 모습을 공유하는 것이 아직도 이상적인 집의 모습이다. 집의 본질이 무엇인지 잠시만 생각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현실이라는 전쟁터에서 잠시 벗어나 내가 가장 평화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곳이 집이다. 주거의 효율성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집의 역할이 있다. 주말마다 캠핑을 가고 펜션을 찾는 것은 아파트에서 느끼기 어려운 집의 감성을 채우기 위해서는 아닐까. 집이 자산으로서 가지는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주택에 산다고 집값이 떨어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리는 없다. 하지만, 주택은 평균가격이라는 것이 없어서 아파트만큼은 가격 변동에 민감하기 어렵다.

 가진 자산을 모두 정리하고 정원이 있는 집을 샀다. 가진 돈이 주는 현실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는 법, 가능한 수준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였다. 모든 집은 주인과 인연이 있다는 말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경험도 많이 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원래 예산보다 살짝 초과하여 아쉽지만 후보에서 제외했던 곳이었다. 다른 집을 사기로 하고 도장을 찍기 이틀 전이었다. 해괴한 꿈을 꿨다. 꿈을 잘 기억하지 못 하는 편인데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이 흩날렸던 그날 오후 부동산에서 급하게 전화가 왔다. 계약하려던 주인이 마음을 바꿨다고, 다른 집이라도 얼른 보자고. 그렇게 보게 된 것이 리스트에서 제외했던 지금 집이다. 시간이 늦어 어두웠지만, 집을 구경하자마자 우리 부부 모두 ‘아 이 집이구나’하는 느낌을 공유했다. 설명하기 어려운 포근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집값도 협상이 되어서 무사히 계약을 마칠 수 있었다.     



心閑齋     


 정원관리가 취미생활이 될 정도로 많은 시간을 집에 할애하고 산다. 그래도 철따라 날리는 꽃잎을 볼 수 있고, 일하다 그늘에 쉬며 맞는 상쾌한 바람에서 행복을 느낀다. 아파트라는 주거형태를 최초로 구현한 르코르뷔지에는 말년에 조그마한 통나무오두막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가 생각한 주거의 합리성은 자연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었나보다 하고 짐작해본다. 효율적으로 사는 것은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실천하고 최소한의 것만을 갖춘 오두막집으로 들어갔다. 난 집이 가지는 여러 의미에서 다른 것은 잠시 접고 내가 고른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 집중하며 살고 있다. 지금 나는 어릴 적 꿈에 아주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심한재(心閑齋), 마음이 한가로운 집. 내가 지어준 이름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따왔다.      


     問余何事棲碧山     왜 푸른 산에 사는가 내게 물으면

     笑而不答心自閑     웃으며 답하지 않아도 마음은 저절로 한가롭기만 하다

     桃花流水杳然去     복숭아꽃 물 따라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     이곳은 별천지, 인간세상이 아니라네.     


 내가 산속에 사는 것도, 복숭아꽃 흐르는 별천지에 사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난 바란다.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가로워지는 공간, 그것이 내가 바라는 가장 행복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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