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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PD May 06. 2024

전쟁과 평화


뇌를 쓰는 새로운 방법     


 요즘 사람들은 뇌의 일부분을 외주를 주며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타보면 알게 된다. 사람들은 거의 전부 단 한시도 쉬지 않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재미난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한다. 궁금한 것을 검색하고 지인들과 텍스트로 대화를 나눈다. 혼자 생각을 한다거나 주위를 둘러보며 관찰을 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우주의 먼지보다 작은 몸뚱이를 가진 인간이지만, 머릿속으로 무한대를 그려내는 것 또한 인간이다. 상상력의 크기는 생각을 즐겨 하는 사람일수록 커지는 법이다. 하지만 요즘은 즐거움, 정보, 인맥 모두 폰 안에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능동적으로 머리를 써서 무언가를 하기보다 스마트폰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새로운 자극을 찾는 것이 더 익숙해지고 있는 모양이다. 원래 뇌가 하던 일들, 그러니까 정보의 기억이나 창출, 감정이나 사실의 가치판단 등 대부분의 것들을 스마트한 전화기가 대신 해주는 느낌이다. TV에서 한 뇌과학자가 이것은 쇠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뇌를 쓰는 방법이 달라진 것일 뿐이란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폰을 통해 전달되니까. 그 많은 것들을 결합해서 변증법적인 발전을 만들어 낼 수도 있으니까.     



연결된 세상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아직 386 컴퓨터에 플로피디스크를 꽂아서 쓰던 시절이었다. 당시 내 하숙집에는 괴짜 친구가 하나 있었다. 점성술이 궁금하다고 히브리어를 독학하고 달달한 진로포도주만 병째 마시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컴퓨터를 전공하는 선배들이 그가 천재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 시절 내게 컴퓨터란 워드프로세서이거나 게임기 정도였지만, 그는 전공도 아니면서 PC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하루는 중세영어로 적혀 있는 문서를 몇 장 들고 온 적이 있다. 사람을 개구리로 만드는 주문과 준비물이 적혀 있다고 했다.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을 때, 그 녀석은 단호하게 된다고 말했다. 단지 달빛 아래 피는 어떤 꽃에 맺힌 이슬을 구할 수가 없어서 하지 못 할 뿐이라나. 대체 그런 이상한 주술서는 어디서 구했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어떻게 설명할지 잠시 생각하더니 말해줬다. 미국에 있는 연구실 PC에 전화 같은 걸 연결한 후 거기 있는 정보를 찾아 온 거라고 했다. 미국에 가지도 않고 사람을 통하지도 않고 원하는 정보를 찾아오다니, 이게 뭔 소리란 말인가. 아주 놀랐지만 난 그게 초기 인터넷이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 했다. 그래서 무식하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국제 전화인데 돈이 많이 들진 않는 거냐?”

 이렇게 일부 사람들이 알고 있던 인터넷은 월드와이드웹(www)이라는 무료 프로토콜로 보급되며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세상이 뒤집어졌다. 그 발전의 속도가 너무 빨라 어느새 손바닥 위에 얹을 수 있는 작은 물건 하나로 전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라고 부르는 TV, 라디오, 신문은 말 그대로 과거의 유산으로 그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다. 이런 매스미디어가 선택해 준 정보만을 한정적으로 받아들였던 때엔 세상 돌아가는 것이 궁금해도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웹 기반의 미디어가 세계를 연결하고, PC와 모바일기기에 손가락을 놀리는 노력만으로 내가 원하는 정보를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난 궁금한 것이 많은 편이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엔 사전이며 책을 뒤져 필요한 정보를 찾아야 했다. 그러려면 도서관을 가든 책방을 가든 해야 한다. 거기서 다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들여야 했다. 지금은 궁금증을 해결하는데 몇 초만 들이면 된다. 폰을 꺼낸다. 검색창을 연다. 키워드를 넣는다. 이 세 단계를 거쳐 나온 결과들에서 필요한 것을 취하면 된다. 한국에 필요한 것이 없으면 해외를 찾아보면 된다. 외국어가 어려우면 번역기를 돌려 검색해도 된다. 이젠 생성형 AI가 등장해 적절한 검색결과를 골라 말해주기까지 한다.     



유혹하는 정보들     


 오히려 정보가 넘쳐나 과잉상태가 되었다. 정보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쓰레기 정보를 가려내는 것이 더 중요한 능력이 되었다. 겉이 번지르르하게 포장된 정보들이 우리의 눈을 속이고 있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50여년 전 소비는 대중매체가 좋은 것이라고 전달해 주는 이미지, 즉 행복이라는 기호를 사는 것이라고 간파한 바 있다. 인간의 욕망은 쾌락을 쫓아가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물건을 소비할 때 쾌락을 쫓아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대중매체는 이런 죄책감을 합리화 할 수 있는 가상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저 물건을 사는 것은 당신의 행복한 인생에 보탬이 되는 것이라고. 필요한 것만 소비하는 시대는 끝났다. 필요를 떠나 저것을 가져야 좋은 인생이라는 ‘행복의 기호’를 구매하도록 만든다. 매체에 나오는 연예인의 모습이 실제생활에서 똑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이미지를 ‘행복의 기호’로 포장해 동경하게 만든다. 좋은 TV나 비싼 차가 행복과 동의어는 아니지만, 그걸 사면 잘 사는 인생이라고 믿게 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매체는 우리의 인식을 조작해 허구의 이미지를 실제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매체는 지금 레거시 미디어라고 부르는 것들이었다. 시대가 변한 현재엔 소셜미디어가 그 역할을 더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매스미디어는 노출시킬 정보의 중요성을 판단하고 고르는 데스킹이라는 과정이 존재한다. 하지만 소셜미디어는 그것을 운영하는 개인이 원하는 대로 정보를 올릴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채널을 통해 ‘있어 보이는’ 물건들, ‘행복해 보이는’ 일상들이 업로드 된다. 그리고 모바일 기기를 통해 접속이 가능한 우리를 시도 때도 없이 자극한다. 맘속으로는 저게 저 사람의 진짜 일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정보가 본질이 아니라고 이성을 끌어올려 봐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허상을 부러워하게 된다.

 난 소셜미디어를 운영하지 않는다. 시사프로그램을 하면서 개인 정보를 웹에 공개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절감했다. 아무리 포장을 잘 해도 사생활이 드러난다. 나중에 그것을 지우고 싶을 때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다. 소셜미디어를 멀리 해서 그나마 허상의 이미지들에 굴복할 일은 적다. 그렇다고 유혹이 없는 것은 아니다. 관심 있는 것을 검색하고 쇼핑사이트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면 귀신같이 알고 광고가 뜬다. 내가 생각지도 못 한 내 취향의 물건을 눈앞에 딱 대령해준다. 자제심이 흔들린다. 언제든 정보를 찾을 수 있는 환경이 소비를 가속시킨다. 가끔 TV에 나온 출연자가 맘에 쏙 드는 옷을 입고 나올 때가 있다. 손이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제게 뭘까 답을 찾을 때까지 검색을 한다. 결과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는 즐거움이 드는 순간 어느새 카드번호를 입력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역시 보드리야르는 천재다.     



세계가 손잡고 만든 스웨터     


 내겐 복슬복슬한 양이 규칙적인 문양으로 뜨개질 된 스웨터가 하나 있다. 감히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끼는 물건이다. 해외 유튜버의 영상을 보다 거기 출연자가 입은 옷에 꽂혔다. 저건 뭐지.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그 스웨터는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입어서 인기를 끌었던 디자인이었다. 차이라면, 황태자비의 옷은 선홍빛 레드였고, 유튜버의 것은 약간 어두운 파랑이었다는 정도이다. 맘에 들었다. 바로 물건을 찾기 시작했지만, 유튜버가 입었던 옷은 이미 품절 상태였다. 다이애나비가 유행시킨 지 30년 가까이 지나서인지 어디를 뒤져도 파는 곳이 없었다.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다. 뭔가가 찾아질 때까지 검색을 했다. 스웨터에 들어가는 양 한 마리가 몇 코씩 뜨개질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패턴 설명서만 찾을 수 있었다. 더 이상은 한계라는 생각이 들 때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핸드메이드 공예품 전문인 Etsy라는 온라인샵에서 스웨터를 구매한 적이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판매자였는데, 본인이 디자인한 니트류를 직접 만들어서 보내주는 곳이었다. 고급스런 느낌은 아니었지만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났다. 직접 니트를 짜는 곳, 여기에 한번 의뢰를 해보자. 우크라이나의 샵에 메시지를 넣었다. 내가 본 영상의 스웨터 이미지와 검색으로 찾은 패턴 설명서를 함께 붙여서 구매 가격을 제안했다. 바로 다음날 회신이 왔다. 해주겠다고. 나의 쓸데없는 끈기가 결실을 맺은 것이다. 환호성을 질렀다. 직접 볼 일은 없겠지만, 유라시아대륙 반대편에 있는 한 사람과 손 붙잡고 함께 일을 하는 것 같은 친밀감이 생겨났다.

 내게 우크라이나는 인연이 없는 나라였다. 옛날 소비에트 연방에 있던 나라,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터진 나라라는 정도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물건을 주문하고 나니 구호로만 생각했던 ‘지구촌’이란 것이 현실이구나 하고 체감되었다. 해외에서 만들어진 영상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영국의 30여년 전 유행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 (미국으로 생각되는) 중년 여성이 올린 패턴을 알게 된다. 한때는 서방세계의 적이었던 우크라이나 공방에 제작을 의뢰한다. 그리고 그 물건은 하늘을 지나 여기 한국으로 온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 했을 일이다. 나는 평소 살던 일상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전 세계 사람들의 역량을 연결했다. 한 걸음이 무슨 말인가, 내 손놀림만으로 모든 것을 다 해낸 것이다. 주문 후 받은 스웨터는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고급스런 소재도 아니고 쫀쫀하게 밀도 높은 짜임새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 조그마한 아이디어를 전세계의 도움을 받아 구현된 결과물이라는 것에서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느껴졌다.     



전쟁, 행복의 기호를 깨다     


 ‘스웨터는 주인의 사랑을 오래오래 받았습니다’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았겠다.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되지 않는다. 아직 코로나가 다 물러가지 않았던 2022년 2월, 우크라이나가 침공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스웨터를 아껴가며 입은 지 몇 년 지난 때였다. 처음 뉴스를 접했을 땐 에이 잠깐 저러고 말겠지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가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문득 스웨터를 만들어줬던 분이 떠올랐다.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프로필 사진을 보면 판매자는 3, 40대 정도의 여성이었다. 그 이상의 정보는 알 수도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었다. 그렇지만 전쟁이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번지고 있던 그때서야 난 한 인간으로서의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손재주가 좋은 분이었을 것이다. 장사 수완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계를 상대로 장사를 할 준비를 했을 것이다. 자신의 디자인을 직조해 주는 기계 같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가족이 함께 사는지는 몰라도 소소히 장사를 하며 일상을 영위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났으니 그 모든 것들을 버려야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구매했던 온라인샵을 찾아가 보았다.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Sorry, the member you are looking for does not exist.” 가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 협업을 하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난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우연히 촉발된 나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허구의 기호를 좇아 만든 행복에 안주하고 있었구나. 모든 것을 찾아 낼 수 있고 만들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인터넷 속의 세상도 현실의 기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손안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정작 현실은 그 너머에 있다. 직접 보고도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사람을 직접 만나도 그 사람의 삶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웹을 통해 보는 세상은 어떻겠는가. 그 이미지들은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골라 편집한 모습들일 뿐 굳건한 실재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극단적으로 비이성적인 사건인 전쟁이 나의 이성을 일깨우는 아이러니라니...     



평화를 지켜라     


 옛날방식대로 머리를 쓴다거나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아도 즐겁게 살 수 있다. 모바일 매체를 통해 뇌를 쓰는 새로운 방법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간은 현실이라는 토양 위에 발을 딛고 서야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 모두가 매트릭스 속의 인간처럼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현실로 구현할 수 없는 허상을 쫓아다니다 보면 내 존재는 방향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할 삶이 보이지도 않는 이미지에 끌려 다니면 허무하지 않겠는가. 또, 우리의 평화는 당연하지 않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마음이 모이면 의도치 않게 집단 이성이 무너지고 한순간 평화가 사라질 수 있다. 평화를 지켜야 한다. 너무 거창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간간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면 된다. 이 평화로운 현실이 계속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과 공감해 보면 된다. 가끔씩이라도 해보면 된다. 어떤가? 밑져야 본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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