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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PD May 02. 2024

언제나 더 예쁜 것은 존재한다

이재용은 만수르가 부럽지 않을까?


주당의 고민     


 술을 좋아한다. 그냥 먹어도 될 쌀과 포도를 응축해서 청주와 와인을 만든다. 그것도 모자라 불을 지펴 수증기를 방울방울 모아 증류주를 만든다. 서양 사람들이 증류주를 spirit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곡물의(또는 그 과일의) 영혼만을 모아서 그러한 것이 아닐까. 그만큼 술은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사치스러운 음식이다. 맛있는 술과 딱 맞는 음식을 찾아 즐기는 것 만한 호사가 또 어디 있을까? 술은 부족한 맛은 지워주고 즐기고 싶은 맛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준다. 그뿐인가. 내가 닫아 두었던 감각과 감정들을 해방시켜 평소라면 느끼지 못 했을 것들을 끌어내주기까지 한다. 술잔을 앞에 두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도 술술 풀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맨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일상에서 마음대로 술을 마실 수는 없는 법. 사치를 즐기다가 대낮에 개가 되어 인간 사회를 망칠 수는 없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술이 주는 만족감을 대신해줄 것은 무엇일까.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만큼 사람 몸에 좋은 것이 없다고. 하지만 물은 심심하다. ‘술에 물 탄 듯하다’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커피를 취미로 가져보라고도 했다. 다양한 원두를 취향에 맞게 골라 에스프레소로 뽑아낼지 드립으로 내릴지 고민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커피를 두 잔만 마셔도 잠을 못 자는 몸이라 술보다 즐길 수 있는 한계량이 너무도 적었다.     



마리아주프레르 마르코폴로     


 게으른 고민의 시간을 오랫동안 보내다 병원에서 피가 끈적해졌다는 통보를 받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 때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마리아주프레르 마르코폴로를 선물로 받았다. 홍차라면 회사 탕비실에서 손님 맞을 때 담가 먹는 립톤 티백 정도로 생각하던 때였다. ‘적당히 향이 나고 적당히 떫은맛이 나는 붉으스레한 음료’가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홍차의 이미지였다. 마르코폴로는 달랐다. 선물 받은 패키지를 열자마자 공간을 채우는 화려한 꽃향기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의당 홍차란 것은 하얀 부직포로 네모나게 만든 주머니에 홍차 가루를 담아 명주실을 스테플러로 콕 찍어 연결해서 만드는 것인 줄만 알았었다. 마르코폴로는 이것도 달랐다. 표백하지 않아 베이지색을 띤 성긴 모슬린백에 적당한 크기의 잎차를 넣는다. 이것을 조그만 복주머니 모양으로 만들어서 손으로 꼼꼼히 실을 감아 마무리한 탐스런 모양이었다. 후각과 시각으로 받은 충격은 미각으로 이어졌다. 처음 맡았던 화려한 향기는 따뜻한 물에 녹아 더 강렬하게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목을 따뜻하게 넘어간 후 기분 좋은 깔끔함이 길게 남았다.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지금까지 홍차라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이거다. 술만큼 오감과 정서를 자극할 만한 것은 홍차다, 그때부터 차의 끝 모를 매력에 빠져버렸다.

 홍차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점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르코폴로는 홍차잎에 가향을 한 프랑스 제품이었고 내가 받은 것은 잎차가 아니라 티백으로 가공된 것이었다. 당연히도 잎차를 따로 사서 즐기는 것이 내가 한 첫 번째 일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홍차들을 마셔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홍차를 만들어내는 세계적 브랜드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홍차를 재배한 지역에 따라, 가지에 달린 잎을 어디까지 채취했는지에 따라, 또 그 잎을 따낸 시즌에 따라 맛에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궁금증은 또 다른 궁금증을 낳는 법이다. 다즐링, 우바, 기문이라는 세계 3대 홍차의 맛은 어떨까? 다즐링 퍼스트 플러쉬와 세컨드 플러쉬의 맛 차이는 어느 정도일까? 한 지역을 대표하는 싱글오리진에서 더 들어가면 다원마다 다른 맛이 나지 않을까? 블렌드 홍차와 가향 홍차에서 내게 잘 맞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문화그리고 아비투스     


 차를 사들이고 관련 책들을 읽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차에 대한 역사가 만만치 않았다. 내가 전공 공부를 하며 배웠던 많은 문화현상이 차와 관련되어 있었다. 유럽의 귀족문화를 얘기할 때 차와 관련된 것을 빼고는 설명이 어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영국에서 벌어진 teetotal 운동을 알게 되었을 때는 세상 다르지 않구나 하며 혼자 피식 웃게 되었다. teetotal은 사전적 의미로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것을 말한다. 19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스트레스를 받은 노동자들이 술에 절어 살게 되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네덜란드에서 값싼 진(gin)이 네덜란드에서 수입되면서 낮이고 밤이고 술을 취해 제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영국 정부는 1830년 금주협회를 설립하고 ‘절대 금주’라는 의미인 teetotal을 슬로건으로 금주운동을 벌인다. 여기서 tee와 발음이 같은 tea를 술 대신 마시기를 권장하기 시작한다. 19세기 영국 노동자의 문제가 21세기의 나와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차에 대한 탐구는 여기서 멈춰지지 않았다. 차를 마시는 것에서 빠지지 않는 영혼의 단짝이 있다. 바로 찻잔이다.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애초에 차는 재배법을 철저히 산업비밀로 보호한 중국에서만 어렵게 구할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당연히 비싼 값을 낼 수 있는 귀족계층만이 마실 수 있는 음료였다. 이렇게 귀한 것을 아무 대접에나 마실 수 있었겠는가? 당연히 당시 중국 특제 럭셔리 명품이었던 도자기잔에 마시는 것이 마땅한 대우였다. 차를 마시는 행위가 사교모임으로 발전하면서 차와 찻잔에 대한 심미안이 더 중요해졌다. 귀한 것을 가려내는 취향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그토록 말하지 않았던가. 개인의 취향은 그가 평생 겪은 배경, 가치관, 계급,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지도, 내 마음대로 가지기도 어렵다고. 이렇게 만들어진 아비투스(habitus)는 계급을 과시하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라고. 당시 귀족들은 자신이 가진 금전적, 문화적 권력을 차와 찻잔에 투영해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더 아름다운 찻잔을 구해서 대접하고, 그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차를 마시는 행위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아가 사회적인 네트워크와 예술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고차원의 활동이었다. 자연스레 본인의 아비투스가 드러나는 곳이었을 것이다. 갈증을 해소하는 가장 본능적인 행동이 당대 가장 고급한 문화를 생산해내는 기반이 되는 기묘한 매력, 이것이 홍차의 힘이다.     



나만의 찻잔을 찾아라     


 찻잔의 세계는 홍차의 세계만큼이나 복잡하다. 좋은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은 중국과 그 동쪽에 자리 잡은 한국, 일본이 독점하고 있었다. 조용한 은둔의 나라였던 한반도는 유럽세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는 그야말로 특상품의 대우를 받았다. china라는 말이 도자기를 뜻하기도 하는 것에서 그 깊은 연원을 발견할 수 있다. 유럽의 귀족들은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장인들은 동양 자기의 색과 모양, 문양을 따라잡기 위해 수세기에 걸쳐 노력을 했다. 도자기의 원료인 고령토가 나지 않는 유럽에서는 동양의 도자기가 가지는 신비한 매력을 완전히 구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점토에 골회를 섞어 본차이나를 만들어 내고, 무늬를 찍어내는 전사기법을 발전시켜 자기의 보급을 가능하게 했다. 몇 줄로 정리된 이 이야기는 책 한권으로도 설명이 모자란 방대한 노력의 역사이다.

 이렇게 넓은 도자기의 세계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잔을 하나 고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찻잔의 브랜드며 구성 같은 것을 많이 알지 못 할 때였다. 그냥 내 눈에 예뻐 보이는 것을 무작정 찾아보기 시작했다. 백화점에 늘어선 찻잔들을 구경했다. 동네 인근 도자기 아울렛을 들러 살펴봤다. 알만한 메이커들을 다 둘러봤는데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온라인으로 눈을 돌려 뒤지기 시작했다. 국내 사이트는 성에 차지 않아 해외 자기 사이트, 앤티크 사이트, 경매 사이트 등 시간 나는 대로 쳐다보았다. 적당한 가격대에 예쁜 찻잔 하나 고르는 게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찻잔이 없는 것인지 내가 이상한 사람인지 헷갈릴 무렵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발견되었다. 와일만 폴리(Wileman Foley)의 앤티크 찻잔이었다. 찻잔, 소서(찻잔 받침), 디저트접시로 이루어진 세트로 100년도 더 된 물건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이거다. 바로 주문을 넣었고, 비행기를 타고 오다 깨지면 어쩌지 하며 안절부절 하는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받을 수 있었다. 

 꼼꼼히 싸여 있는 포장을 벗기고 꺼내본 찻잔은 첫 눈에도 대만족이었다. 아름다운 문양, 유려한 모양, 그리고 빛이 비칠 정도로 얇은 본차이나의 질감까지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차를 내려 마실 때 꽃처럼 펼쳐진 기형(器形)은 입술에 닿는 느낌을 부드럽게 했다. 얇게 빚은 컵은 차가 입안에 들어올 때 오직 차 맛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찻잔을 내려놓고 옅게 김이 올라오는 아름다운 모습과 달달한 디저트가 놓인 접시를 보고 있는 것도 좋았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찻잔은 와일만의 엠파이어(Empire) 셰이프였고, 블루아이비 문양은 1894년에서 1910년까지만 생산된 것이었다. 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고 살아남은 나의 할아버지뻘 물건이었다. 찻잔, 소서, 접시로 이루어진 것을 트리오라고 부르며 가장 기본적인 구성으로 본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욕망의 사다리한 스텝 위로     


 너무도 만족한 구매였기 때문에 이 이후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은 욕망으로 뭉쳐진 존재이고, 이 세상은 그 욕망의 사다리로 움직이는 자본주의가 득세한 곳 아닌가. 다시 다른 도자기를 찾기 시작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손님들이 올 때를 대비해서 최소 6인 세트는 구비해 놓아야 않을까. 토끼 모양의 티포트가 너무도 귀여운데 저게 세트로 들어오면 좋지 않을까... 시간이 좀 지나자 내 욕망을 읽은 컴퓨터가 알고리즘이란 것을 돌려 내게 추천을 하기 시작했다. 딴 일을 하다가도 눈이 돌아갈 예쁜 것들을 턱턱 보여주었다. 손으로 직접 그린 찻잔, 금박을 일일이 찍어 놓은 주전자 등등 끝이 없었다. 심지어 지금이 특가 할인 판매란다. 정신이 온전할 때는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겪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도 모르게 저런 아름다운 것들을 주워 담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이게 욕망의 구현인 것인가 심미안의 고양이란 말인가.

 세상의 예쁜 물건은 끝이 없었다. 이 정도면 제일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 바로 옆에 더 좋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역사를 통해 인간은 똑같은 욕망의 법칙을 따라 움직였을 것이고, 장인들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귀족의 문화로 정착한 홍차의 세계에서 더 비싸고 더 좋은 것은 언제나 존재해 왔을 것이다. 영리한 인터넷은 결국 내게 마이센, 세브르 같은 최고급 브랜드를 추천하는 단계까지 가고 있었다. 왕실에서 직접 관리를 한 역사를 가진 곳으로 당연히도 최고급, 최고가를 자랑한다. 눈이 돌아갈 정도의 아름다운 작품들이고, 눈이 돌아가고 남을 정도의 가격을 가지고 있다. 나의 미감(이라고 쓰고 욕망이라고 읽는)에 따르면 저 찻잔을 하나라도 들이는 게 맞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난 왕족도 귀족도 아닌 사람인데, 뭘 하고 있나 싶어진다. 내가 신라시대를 살고 있다면 성골 진골은커녕 잘 해봐야 육두품 언저리만 가도 다행인데 과욕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또, 내가 마이센 최고급 찻잔을 산다 하더라도 거기서 그칠 수 있을 것인가? 그보다 더 예쁜 것이 또 발견되지 않을까? 어느 순간 멈춰야 한다. 어쩌면, 브랜드 같은 것을 잘 모를 때 샀던 와일만 찻잔이 내 미감의 가장 적극적인 반영이었을 것이다. 미감을 핑계로 물욕을 충족하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도록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이재용과 만수르     


 솔직히 내가 귀족의 아비투스를 가지고 싶어 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맛있는 차를 예쁜 잔에 마시고 싶은 욕망은 너무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좋아하는 것을 더 아름답게 하고 싶은 것이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홍차 맛을 더 좋게 하기 위해서만 든 생각 또한 아니었다. 홍차를 마시는 문화를 즐기는 ‘있어 보이는 행위’를 하고 싶은 속물근성이 분명히 기저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이 속에서 심미적 안목과 물건에 대한 욕망을 구분하긴 쉽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두 가지 감정 속에서 욕망을 심미안으로 정당화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더 예쁘고 좋은 것이 존재한다. 루이비통 백을 사고 나면 에르메스가 보이기 마련이다. 또, 에르메스 벌킨을 사고 나면 벌킨 한정판을 사고 싶기 마련이다. 욕망의 사다리는 정교하게 놓여 있고, 수많은 핑계거리를 제공하며 유혹한다. 강남에 널찍한 아파트를 가진다고 욕망이 끝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 사다리 하나 위를 쳐다보는 것이 인간이다. 이재용 회장은 만수르를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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