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의 재미에 빠진 이후 주변에 책을 읽으라고 종종 권한다. 반응은 두 가지다. 평소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말에 공감하고 최근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들에 대해 수다를 이어간다. 반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의 반응은 싸늘하다. 살짝 재수 없다는 반응이 포함되기도 한다. 독서도 부익부 빈익빈인 것 같다. 가끔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다.
"책을 읽는 이유는 지식의 습득인데, 매일매일 쏟아지는 책들 즉 지식은 아무리 읽어도 다 습득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런데도 굳이 열심히 책을 필요가 있을까요?”, "책을 읽지 않아도 지금처럼 잘 사는데 왜 굳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책을 읽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얻은 결론은 "즐거움"과 "성장"이다. 어느 활동보다 독서가 주는 즐거움과 이로 인한 이득이 크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나도 책을 읽지 않고도 참 잘 살고 있었다. 그러다 책을 읽기 시작했고, 왜 진작 책을 읽지 않고도 잘 산다고 생각했는지 그 시절의 거만함을 후회했다. 책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책을 한번 읽어보고 직접 경험해보라고 말하는 이유다.
( 순수한 기쁨, 사랑 )
책을 읽는 시간은 "기쁨의 시간"이다. 이는 말 그대로 읽기를 통해 순수한 기쁨의 감정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독서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궁극적인 답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 즐겁다. 활자를 읽어가며, 저자의 생각을 좇다 보면, 어느덧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고, 내 머릿속의 회로들은 번쩍번쩍 전기를 튀기며 무수히 많은 생각의 가지들을 활성화시킨다. 메모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적 쾌감과 희열을 느낀다. 속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이것이 내가 독서를 통해 얻는 즐거움이다. 이러한 즐거움이 없는 일상을 이제는 상상할 수가 없다.
우리가 읽는 이유는 읽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다. <다시, 책으로>에서 저자 메리언 울프는 "왜 읽는가?"라고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라 한다. 저자의 경우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세상을 사랑할 새로운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읽는다고 말한다. 그럼 나는 왜 읽을까? 나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읽는다. 아니 책을 읽다 보니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은 기쁨의 감정의 연장선이다. 책을 깊게 읽다 보니 나를 사랑할 많은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다음이 세상을 향한 사랑이다. 과거 나 자신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평가의 잣대를 들이밀고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던 내가 이제 점점 나를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을 따뜻함의 눈길로 바라보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또한 내가 점점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걸 느낀다. 매사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 되어 간다. 책에 대한 열정은 가지를 뻗고 그동안 억눌러 왔던 많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내 삶은 바쁘지만 열정 가득한 삶으로 변해간다. 이제는 책을 펼치기 전에 설렌다. 어떤 즐거움이 담겨 있을지. 그리고 이들이 내 생각과 행동에 어떤 변화와 재미를 선사해줄지 잔뜩 기대에 부푼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이란 ‘사람이 어떤 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한 집중력과 완전하게 몰두하며 즐기는 느낌에 완벽하게 빠져든 정신적 상태'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몰입의 상태에서 가장 행복함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몰입을 경험할 수 있는 많은 활동들이 있다. 일이 될 수도 있고 취미생활일 수도 있다. 나는 어느 것보다 책 읽기가 몰입으로 이르는 가장 손쉬운 방법, 그리고 다양한 몰입을 선택해서 경험할 수 있는 편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만 책 읽기를 따분한 것으로 생각한다. 책을 제대로 읽고 몰입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김영하의 표현에 십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테다. “어머니는 제가 방금 전까지 겪은 일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어떤 세계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격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저는 그냥 누워서 소설책을 보며 뒹굴거리는 아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 깨달음, 스스로에 대한 무지의 자각 )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겁니다. 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 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 - 김영하-
<책을 잘 읽는 방법>에서 작가 김봉진은 책을 읽는 것은 생각의 근육을 키우고,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 고정관념을 깨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기 위함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사고력의 증진이다. 배우지 않고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니체는 한술 더 뜬다. “자신의 앎과 반대로 말하는 자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무지를 무시하고 말하는 자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이웃과 만나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마저 기만하는 것이다.” 무지한 것은 기만이라고. 책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알고 채우고 깨달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단 하나는 나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 그것뿐이다"
한 권의 책을 통해서 나의 사고체계를 통째로 뒤흔드는 경험을 한다. 그런 경험은 일주일, 한 달, 1년 아니 평생 내 머릿속에서 강하게 나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 나에겐 그런 대표적인 책으로 조지 오웰의 <1984>가 있다. 다음은 외부 당원이면서 신어사전 편찬 위원으로 근무하는 인물인 사임이 윈스턴 스미스와 나누는 대화다.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네.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언어가 완성될 때 혁명도 완수될 것이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번개를 맞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철저한 좌뇌 성향인 나는 그동안 ‘언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표현의 다양성, 언어유희, 논증 등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져왔던 내 신념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 사고의 폭이 좁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거만했고 어리석었다. 이후로 나는 ‘언어’에 대한 다양한 배움을 좋아하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인간의 본성과 악함에 대해서 큰 깨달음을 준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누구나가 알고 있고 항상 마음속에 지녀야 하는 깨달음이다. 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이며,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예루살렘에서의 재판을 지켜보며 대중을 위해 쓰인 여러 개의 사설을 묶어서 만든 책이다. 출간 이후 "악의 보편성"에 대한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이기도 하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서로 긴밀히 연결된 세 가지의 무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그것이다. 세 번째 무능성은 곧 판단의 무능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판단 능력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을 의미한다.”
충격적인 사실은 아이히만은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판단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이히만은 나치 정권의 장교로서 그의 진두지휘 하에 유대인 문제 해결이 3단계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해결책은 추방이었고, 추방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두 번째 해결책인 이주가 시도되었다. 하지만 이주도 여의치 않자 최종 해결책이 시행된다. 아이히만에게는 그저 '최종 해결책'이었지만 이는 '학살'이었다. 하지만 '학살'이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는 재판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언어를 통제함으로써 인간의 사고능력을 말살한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상기시켜 주었고 이는 내 삶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다. 첫째는 올바른 판단, 정확한 사고를 위해서 보다 정교하고 세밀한 언어 사용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말하기->생각->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은 바로 언어다! 두 번째는 우리의 행동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너무도 중요한 삶의 진리다. 이 책은 앞에서 말했듯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저지른 흉악한 악행이 고의이거나 사전에 고안되지 않았다는 사실, 즉 범죄의 의도를 미리 갖고 있거나 고려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무지 혹은 생각 없음이 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의 입술에서는 '아.....'라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 인생에 대한 해답 )
“지금 우리를 동요시키고 혼란시키고 현혹시키는 문제들은 일찍이 모든 현인들에게도 일어났던 것들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저마다 능력에 따라 말과 삶으로 그 문제들에 해답을 주었다. 게다가 우리는 그들의 지혜와 함께 관용도 배우게 될 것이다” -월든-
우리의 인생은 리바이벌이 안된다. 내가 사는 이 삶은 난생처음 겪는 일이다. 그래서 좌충우돌한다. 실수를 반복하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고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한다. 아니 어떤 길과 선택이 옳은지 정답은 없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은 이미 많이 살아본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얻을 수 있다. 특히나 현인으로부터는 보다 근사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을 읽고 위인들의 작품과 평전을 읽는다.
또한 ‘죽음’을 연구하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인생의 지혜도 진실되게 다가온다. 젊은 사람들과 가치관이 일부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인생을 살아본 선배 혹은 죽음을 연구하는 정신 심리학자나 의사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제대로 된 지혜를 얻었다. 김형석 교수님의 <백 년을 살아보니>,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데이비드 케슬러의 <인생 수업>, 의사 김범석의 <어떤 죽음이 나에게 말했다>와 같은 책들이 그러하다. 죽음이 들려주는 지혜는 우리가 어떻게 잘 살아갈지에 대한 지혜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담을 책들을 좋아한다. 그런 책들은 나에겐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좋지만 좋은 책을 읽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
책을 읽는 이유와 함께 나는 항상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한다. 1일 1권 읽기, 1년 365권 읽기와 같은 과도한 양을 목표로 하는 독서는 지양한다. 내 인생 책 <코스모스>를 정독하는데 한 달이 걸렸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관련 해설 책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연이어 읽길 한 달이 걸렸으니 권수를 채우려고 했다면 읽지 말았어야 할 책이다. 하지만 두 달 동안 읽은 이 3권의 책은 여느 60권의 에세이보다 더 가치 있는 책이었고 나에게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1000페이지가 넘는 <돈키호테>를 짬짬이 읽어 완독 하는데 6개월이 걸렸으나, 돈키호테는 내 인생의 책이 되었다. 그래서 항상 명심한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에서는 너무 많이 읽는 세태에 대해 비판한다. 뜨끔하긴 했지만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더욱 좋은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다들 너무 많이 읽는다. 전혀 감동이 없으면서도 다른 일에 비해 시간과 노력을 지나치게 바친다... 책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뚜렷한 자기주장이 없이 수동적이고 어영부영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사업을 그런 식으로 하면 금방 망할 텐데 말이다.”
평소에 좋은 책을 읽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좋은 책이란 누가 정해주는 건 아니다. 나에게 좋은 책은 결국 내가 선택하고 판단해야 한다. 만약 마음에 끌려 읽는 책에서 크게 의미를 발견하기 힘들다면 중간에 멈출 수도 있다. 책을 읽으며 그 책을 통해 나에게 의미 있는 생각이나 문장이나 깨달음을 하나 씩 발견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을 한다면 나에게 좋은 책이 될 수도 있다. 결론은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독서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의식적으로 좋은 책을 읽은 것을 염두하되, 어느 정도의 양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좋은 책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얘기니까. 뭐.. 책을 진정으로 좋아하게 된다면 많이 읽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