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인생이란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다"
"잘 사는 것은 잘 소통하는 것이다.” 나의 인생 모토다. 남편과 대화가 잘 되고, 아이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직장에서 동료들과 소통이 잘 될 때 나는 잘 살고 있구나 느낀다. 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나와의 소통이 좋을 때, 나는 정말 잘 살아가고 있구나 생각한다. 이 문장은 장석주의 책을 통해 만났다. 이 문장을 만난 순간은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잘 소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족과 소통하고, 아이들과 소통하고, 동료들과 소통하고, 일과 소통하고... 우리는 잘 소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나 사이의 공감대를 찾고 내 안의 감성을 열어젖혀야 해요. 만약 회사원이라면 회사 업무만 하고 사는 게 아니라 가끔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즐기다 보면 팍팍하고 건조해진 삶에 조금씩 물기가 생깁니다. 거기에 더해 항상 책과 가까이하는 생활을 하면 좋겠지요.” <내가 읽은 책이 나의 우주다> -장석주-
인생을 사는 지혜는 거창하지 않다. 너무도 당연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들이지만 내가 잘 실천하지 못하는 진리들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잘 사는 것은 잘 소통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온몸으로 이해했다.
세상과의 소통은 쉽지 않았다. 아니 나는 소통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효율성으로 무장된 삶을 살았다. 소통에 필요한 시간은 비효율적인 시간이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시간을 보내며 대화하는 것도 싫었다. 두리뭉실함을 싫어했다. 명료함이 최고였다. 그러다 보니 내면으로 침참해 들어갔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마음도 편하고 좋았다. 편안했다.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애써 수고할 필요도 없고, 쓸모없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죽일 필요도 없었다. 그런 시간들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소통이 없어지면 외롭고 즐겁지가 않았다. 직장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직장에서 일할 때면 뿌듯하다가도 퇴근길 지하철을 타고 내려 혼자 집으로 걸어가는 길엔 가끔 외로움이 찾아왔다.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하다가, 각자의 노트북을 가지고 자기만의 공간으로 들어가고 나면 몸은 자유롭지만 뭔가 허전했다. 아이들 친구들 그리고 엄마들과 키즈카페서 놀고 수다를 떨다가 혼자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아쉬움이 밀려왔다. 이런 감정들이 쌓이고 쌓인 상태였을 때, 장석주의 문장이 나의 가슴을 때렸으리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젊은 시절 내가 왜 소통에 서툴렀는지. 나는 철저하게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에 길들여진 사람이었다. ‘공부’만 알아주는 세상. 나는 공부야 말로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보내는 방법이라고 굳게 믿었다.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공부하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좋은 결과를 얻고, 내 삶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친구들과의 어울림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시간을 적극적으로 가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시간에 공부하고 하나라도 더 습득하는 게 바람직하게 느껴졌다. 그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는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나의 그 믿음이 이제는 틀렸다는 사실을. 나는 세상과 소통을 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어릴 적 때부터 배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너무도 당연해서 별 감흥이 없는 문장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에 대한 네이버 두산백과의 정의를 빌려온다.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어도 홀로 살 수 없으며, 사회를 형성하여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어울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동물이라는 의미의 용어”
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전까지 나는 인간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이유가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욕구의 해결을 위해 서로 협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어린이였을 때 가졌던 순수한 생각을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같은 문장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바뀌었다. ‘상호작용’이라는 단어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동물’이라는 문구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그래! 인간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존재다. 함께 어울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동물이다.
늦은 나이에 상호작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습관이 참 무섭다. 이제까지 적극적으로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소통하려고 시도를 해보지 않았더니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보고 싶은 사람, 목소리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 나의 호감을 어떻게 표현할지 막막했다. 그러다 어느 날 <언어의 온도>를 읽으며 좋은 방법을 찾았다. ‘그냥’이라고 얘기하는 거다.
“‘그냥’이란 말은 대게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의 의미로 “그냥”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그냥’은 정말이지 ‘그냥’이 아니다.”
목소리 듣고 싶은 사람에게 전화해서 ‘그냥’ 전화했다고 해본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전화해서 만나자고 한다. 밥 사 주겠으니 나오라고 한다. 왜냐고? ‘그냥’ 참 좋은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과 소통을 시도하면서 ‘그냥’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소통’이 나에게 인생 화두가 된 순간부터는 온통 내 주변엔 ‘소통’에 관한 통찰들로 넘쳐난다. 읽는 책들이 모두 ‘소통’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다. 내 일상이 다양한 소통들로 채워지면서 삶이 풍요로워졌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었다. 그의 삶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왜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토록 온몸으로 몸부림치고 주변 사람들을 증오했을까. 그의 삶에는 '소통'이 빠져있었다. 부인과 소통하지 않았고, 딸과 아들과는 대화가 없었다. 그는 적당히 혼자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고 시선은 항상 자신을 향해 있었다. 동료나 가족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가지 않았고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은 좋은 인생, 죽을 때 후회 없는 인생이란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상기한다. 이반 일리치가 법원에서 승진과 좋은 자리를 욕심내기에 앞서, 부인이 짜증 내는 이유가 뭔지 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등을 평소에 함께 나누었다면, 죽음 앞에서 부인과 딸에게 그토록 화가 치밀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에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면,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와서 손을 잡아준 사랑스러운 아들을 보며 안타까움과 후회가 그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 생각게 하는 책으로 유명하다. 이는 '삶'에 대한 생각으로 이끈다. 죽기 직전에 자기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는 내용면에서 또 한 권의 책이 떠오른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이다! 스토너가 죽으며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
"난 지금의 삶에서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의 실패한 결혼생활은 결국 그가 야기한 삶이다. 그의 시점으로 묘사되는 부인의 모습을 보면서, 결혼생활의 파탄을 괴이한 행동을 보이는 부인의 탓으로 볼 수 있겠다 생각하지만 대화 자체를 시도해 보지 않은 스토너이기에 그 또한 파탄의 원인 제공자일 수밖에 없다. 그는 말한다. “그런 걸 배운 적 없으니까..” 소통하지 않으면서 수등적인 자세를 보이는 그에게서 우리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과 겹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음을 서서히 맞이하며 그는 분명 가족들과 소통하지 않았던 자신의 삶을 후회했을 것이다.
최근에 읽은 <불편한 편의점>의 마지막 문구도 빠뜨릴 수 없는 명문장이다.
"결국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결국 행복하게 사는 최고의 방법이다. 다시 한번 잘 소통하며 아름다움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겠다는 나의 다짐을 확인한다.
니체의 가르침에도 ‘소통’은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몸을 통해 삶을 체험하고 느끼며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살아가야 한다. 굳건한 땅 위에 튼튼한 발로 다시 서야 한다. “
잘 소통하는 것이 잘 산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렇다면 잘 소통한 다는 것은 뭘까? 소통이란 진솔한 대화라고 생각한다. 그냥 의미 없는 수다는 소통이라 보기 힘들다. 제대로 된 소통은 진정성을 가진 진솔한 대화에서 시작한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주변부만 맴도는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피상적인 말이 아니라 근본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상대방과 소통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통해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질문은 “당신은 어디에 미쳐 있나요?”이다. 이는 열정을 가지고 탐닉하는 대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말이다. 열정을 가지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와 목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인생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질문은 그런 열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뜨끔한 질문이다. 그는 지금부터라도 인생에 열정을 가지고 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시작하게 된다. 이런 대화는 충만한 대화로 연결되고 나는 상대방과 인생에 대한 가치를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깊게 연결되었다는 감정을 느낀다.
또한 “100세 시대에 남은 인생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면서 살 거야?”라는 질문도 좋은 질문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누구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이름을 당당히 불릴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나 김형주는 책 읽는 것은 좋아하니 평생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그런 내 이야기를 끊임없이 글로 표현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대화하며 유쾌한 삶을 살겠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작은 모임에서 만나 각자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도 좋다. “나의 꿈은?” 꿈이란 아이들과 청년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인생이 끝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누구나가 다 꿈을 가지고 있다. 지미 카터의 말이 떠오른다. "후회가 꿈을 대신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늙기 시작한다.” 이 문구를 함께 곁들여 얘기한다면 우리의 대화는 더욱 충만해질 수 있다. “에잇 이 나이에 무슨 꿈”이라거나 “내 아이가 좋은 대학 가는 거”라고 답하는 사람과 함께 앉아 있다면 다음 모임에서는 멤버를 바꿔 보는 건 어떨지. 진정한 대화가 가능한 상대방으로…
결국은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뭘 할 때 내가 가장 행복한지를 타인과 공유할 때 진정성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취미, 여행, 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주제일 수 있다. 주식 이야기, 아이 시험 이야기, 쇼핑 이야기도 가볍게 나누기 좋겠지만 진정한 소통은 각자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나눌 수 있는 주제로 하는 대화다. 진정한 자아를 표출해 보자. 가끔은 이러한 시도가 엄청나게 어렵게 느껴진다. 자신이 바보 같아 보일 거라는 두려움, 사람들이 나를 비웃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런 두려움의 극복은 쉽지 않다. 하지만 한번 하면 두 번째, 세 번째는 어렵지 않다. 한번 해보자. 내 인생이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소통하는 것이고, 진정성 있는 대화를 통해서 잘 소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