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니애 Apr 19. 2024

의사도 제 병은 못 고치나요

 가슴에 철을 품고 사는 라 할지라도 지인의 시한부 소식을 듣는 일엔 냉정할 수 없다. 그 생이 한창 청춘이라면 더욱 그렇다.


 외과 레지던트 J선생님이 위암 선고를 받았다. 병동이 뒤숭숭하다. 살려주세요 인턴, 병원 지박령 레지던트 1,2년 차를 드디어 끝내고 조금 살만 한 3년 차가 되었는데 위암이라니. J 선생님은 성격도 서글서글하여 간호사들과 마찰이 없었고 오더도 군더더기 없는 '일 잘하는 의사'였다. 키도 크고 훤칠하니 인물도 좋은데 성격도 좋아, 의사야, 넌 다 가졌구나, 부모님이 여간 행복하신 게 아니겠다 싶었던 그는 한창 깨 볶는 새신랑이었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흘러가는 인생이었다.

 위암 진단이 나오자마자 외과는 발칵 뒤집히며 급하게 수술 일정이 잡혔다. 본인이 어시 하던 수술실 테이블 위에 본인이 눕게 되었구나. 무영등을 쏘며 아래로 파내려 가던 시선을 이젠 본인이 받게 되었구나. J 선생님의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병동에선 숨죽여 그 수술 진행을 지켜보았다. 수술실에 갈 수는 없지만 병원 온라인 시스템에서 환자 처방과 기록을 추적하는 것이다. 데스크에 화면을 띄워놓고 주시하던 한 선생님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유 어떡해, 많이 안 좋은가 봐, 방금 케모* 처방 엄청 냈어."

간혹 복강 내에 다발성으로 암세포가 퍼져 있고 복막까지 잡아먹혔을 땐 일일이 다 절제할 수 없어서  항암제를 직접  들이부어 도포 겸 세척을 하게 된다. 말기였던 것이다.

 30을 갓 넘긴 청년이 암을 선고받은 것보다 더 기가 막힐 슬픔은, 헛된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본인의 전문지식이었을 것이다. 병리진단서가 의미하는 숫자와 의학용어 하나하나 모를 수가 없다. 언제든 열람이 가능한 영상의학 자료들. 수술실에서 단련된 침묵 속 눈빛이 전하는 언어. J선생님의 암은 , 한창 하늘을 향해 뻗는 중인 푸른 가지를 베어내는 도끼날처럼 시퍼렇게 잔인다.

 수술 후 진행된 적극적인 항암치료에도 불구하고 J선생님은 모두에게서 떠나버렸다.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환자들 수 백 명을  CT검사 진행시킬 때 자신도 그 순서 어디쯤 집어넣었더라면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조금 더 지켜볼 수 있지 않았을까.


 타인의 생명을 살리고자 의료인 면허를 받았지만 정작 제 건강 지키기 어려운 케이스들은 자잘하니 흔했다. 암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우리 병동만 해도 뚜렷한 원인 없이 겪어야 했던 에피소드를 풀자면, 전신 두드러기, 조기유산,  AIDS환자를 침습했던 바늘에 찔리기, 출산한 아기의 백혈구 저하 등등. 항생제와 기타 약물들을 맨손으로 만지고 사는 것이 우리 일인 데다가 매일 에탄올 향을 들이마시고 심지어 독하디 독한 항암제에도 노출이 되니 어쩌면 놀랍지가 않은 일이다. 차근차근, 약물 한 방울 흘리지 않도록 천천히, 항암제를 다룰 땐 장갑을 꼭 착용하고, 이렇게 하고 싶지만.

 어쩌나. 바쁜데.

의료인들이야 증상의 경중을 판별할 수 있지만 해당 지식이 없는 환자와 보호자에겐 모든 것이 두려움이다. 이러다 큰 일 나는 것이 아닐까 싶고 내 가족을 지키겠다는 걱정과 책임이 앞서 두려운 마음이 바쁜 마음으로 바뀌어 의사며 간호사들이 뛰게 된다. 모두가 뛰어다니는 급박함 속에서 나 하나 편하자고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의료인도 사실 두렵다. 환자들이 물어보는 걱정 어린 질문 하나하나에 친절히 답할 수가 없고, 무서운 병명과 수치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줄줄 읊어대는 모습이 철인 같아 보여도 지금 읊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두렵다. 제 일 아니라서 쉽게 이야기하네 보여도 우리가 멈추는 순간, 늑장을 부리는 순간, 다음 일이 어떨지 알기 때문에 두렵고 상념에 빠져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때로는 내 능력을 벗어나는 중증도를 만날까봐 두렵고, 상처주는 컴플레인을 상대하게 될까봐 두렵고, 과로와 화학약품에 몸이 상할까 두렵다.

 결국 의료인도 제 한 몸 온전히 지키기 어려운 사람인데 환자를 지켜보겠다고 최선을 다해 뛰어보는 마음, 이 진심이 또옥-똑 떨어지는 수액을 타고서라도 전해질 수 있다면 좋겠다.


 어쩌다 보니 이 글의 마지막 문단을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쓰고 있다. 시아버님의 병환으로 삼 남매 등교 후 바로 달려와 언제 올지 모르는 의사를 기다리며 데이와 이브닝의 삶을 훔쳐보고 있는 중이다.

 두렵지만 의료진을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운 마음, 그렇지만 또 기댈 곳은 여기밖에 없는 환자. 감기 바이러스도 작정하고 덤비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냥 사람, 그래도 물 한 모금 마실 시간 아껴가며 사명을 다해보는 의료진. 거기에다 반나절이고 한나절이고 생업을 뒤로한 채 달려와 병상을 지키는 보호자들, 모두가 기대어 이곳 풍경을 이루어낸다.

 내가 돌보는 환자는 아니지만 여기 누워 신음하는 이들마다 다시금 안녕이 찾아오기를. 주말을 맞이하는 응급실 스텝들도 평안하기를.

 중도 제 머리는 못 깎는댔다. 자신을 스스로 돌보기 어렵고 힘겨울 땐, 그게 누가 됐든 먼저 살펴봐 줄 소중한 이가 모두의 곁에 하나씩은 있기를 원한다. 기대고 손잡고 연대하며, 까짓 말기암도 청춘을 일찍 밟지 못하도록.



*케모: chemo therapy 준말, 화학적 항암치료, 혹은 치료제를 지칭

이전 10화 환자 코드, A+의 비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