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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니애 Apr 26. 2024

간호사 아내의 쓸모

 우리 솔직히 까보자. 제복 판타지, 있는가 없는가?

 필자부터 밝히자면 이미 로망은 충만하고 충만하여 차고 넘친다. 절제한 생활습관에서 우러난 건장한 신체와 그걸 감싸고 있는 각진 슈트. 정복이 주는  약간의 긴장감에서 흘러나오는 정제된 동작. 곧은 허리에 어깨를 펴면 단정함이 갑절 상승하는 멋진 남성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모자를 고쳐 쓰며 비트는 고개에 어딘가 냉소적인 눈빛마저 서려 있다면 쓰러지고도 남지. 정작 본인에겐 아찔한 각선미가 없어서 송구하지만 양해 바란다. 주책이지만 판타지는 확실히 주체적인 아줌마라 그러니.

 그래서 남성들의 제복 판타지도 존중한다. 승무원, 간호사, 메이드(아, 이건 아닌가?), 군더더기 없는 라인이 북돋아주는 여성미, 친절하고 화사한 미소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들이 나만을 위해 그 다정함을 보여준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물론 그들의 기준, 예쁘다는 전제 하에.


 또 사설이 길었군, 아무튼 남편에게도 판타지가 있었다. 한 올 한 올 빠짐없이 긴 머리칼을 쓸어 올려 검은 머리망 안에 틀어넣고, 순백의 가운을 착복하여 자애로운 미소로 이마를 짚어주는 상냥한 간호사 와이프를.

 "콜록콜록, 여보, 나 열이 나는 것 같아,  온몸이 으슬으슬 춥고 힘이 없어."

 라고 말하면

 "어머, 어떡하지? 이리 와 봐, 간호사 아내가 아프지 않게 호~간호해 주겠어요."

 이마를 짚어주고 찬 수건을 다소곳하게 올려주고 손도 주물러주고 몸에 좋다는 각종 건강즙을 짜 주고 난리법석을 떠는 온갖 서비스를 기대했겠지.

 그러나 웬 걸, 그 남자. TJ 여자를 만났잖은가.


신혼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은 회사 셔틀버스를 타고 귀가할 시간이었고 나는 한창 이브닝 근무의 막바지를 달려가고 있을 시점이었다. 업무 중에는 핸드폰은 사물함에 두고 나온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어서 근무에 들어가면 개인 연락은 불가였다. 병동 전화기로 연락이 가능하긴 하지만 정말로 웬만해선 그럴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 웬만한 그럴 일이 나에게 찾아왔다.

 "쓰니애 선생님, 남편한테 전화 왔어, 큰 일 생긴 거 아니야?"

 뭘까, 이 남자에게 생긴 이벤트는, 혹은 날 위한 이벤트는.

 "여보세요?"

 "어, 난데,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 나 지금 응급실이야."

 목소리가 사뭇 진지하고 살짝은 떨리는 그의 목소리는 응급실 신환의 히스토리 인계를 이어갔다.

 "회사 셔틀이 고장 나서 고속도로에 잠시 정차했는데 뒤에서 화물 트럭이 그대로 와서 박았어, 크게 다친 건 없는데 지금 일단 근처 큰 병원으로 와서 사진 찍고 집으로 가면 좀 늦을 것 같아."

 와이프가 놀랄까 봐 애써 차분하게 브리핑을 마치며 다시 한번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걸 잊지 않는다.


 남편이 사고를 당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몸이 다쳤다는데 간호사 와이프의 쓸모를 보여줄 순간이 제대로 찾아왔다. 명색이 의료인인데 남편의 건강에 관여를 안 할 수가.

 "피 나?"

 "아니."

 "뼈 부러진 데 있어?"

 "아니."

 "목 돌릴 수 있어?"

 "응."

 "알았어, 그럼 이따 집에서 봐."

 "어? 어, 어어어... 응."


 어라, 이게 아닌데, 당혹감을 감출 수 없는 남편의 대답을 듣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통화를 하는 동안 궁금증을 숨기지 못하던 선생님들이 걱정하며 일찍 퇴근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어본다. 아니에요, 증상이 대충 이러저러하니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라며 안심시켜 놓고 나이트 인계를 준비했다. 어차피 남편은 검사를 끝내고 나면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올 테고 내가 일찍 퇴근해 봤자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갈 방법도 없다. 집에 가서 먼저 한 시간 기다린들 무슨 뾰족한 도움이 될 거라고. 당장 병동에 흉곽으로 튜브를 세 개나 달고 있는 환자들 돌보는 게 우선이다. 사실 선생님들 눈치를 보니 그들의 생각도 나와 다르지 않다. 어휴, 눈치 없이 먼저 갔으면 내일 또 돌려 씹힐 뻔.

 정상적으로 퇴근을 한 뒤 만난 남편은 어딘가 서운한 눈치다. 혹은 환상이 와르르 무너진 실망감과 절망감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남성의 춘몽이다.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어. 예상치 못한 결혼생활의 국면을 맞이한 그는, 동네 정형외과에서 입원하는 일주일 간 별거 아닌 별거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겪은 이 배신감을 온 동네에 광고를 하고 다녔다. 아파? 피나? 움직여? 그러더니 씨 유 어게인을 날린 채 전화를 끊어버린 무정한 아내에 관하여.

 이 사건을 겪고 나서도 신혼 시절의 그는 간호사 아내가 줄 법한 로망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감기가 찾아오면 다리를 다친 노루처럼 측은한 모양새로 침대에 누워 쿨럭거리고 이마를 짚는 아내의 손을 기다렸다. 이마를 왜 짚니? 체온계가 있는데. 삐익. 이 정도 열은 고열도 아냐, 몸도 싸워야 항체를 만들지. 갖은 보양식을 기대했지만 아내가 주는 것은 타이레놀 두 알이다.

 "아니, 내가 필요한 건 네 관심이라고! 약은 먹기 싫어."

 간절히 몸부림치지만 그래 봤자 TJ여인의 손바닥 위다. 아 좀, 그럼 가만있어봐. 아내라서 가능한 당당히 끌어내릴 수 있는 그의 바지춤. 사명 없이도 깔 수 있는 엉덩이에 사심을 가득 담아 찰싹찰싹. 자, 따끄으음. 망설임 없이 내리꽂는 주사 바늘. 이게 끝이냐, 간호사 선생님의 서비스가 이래서야 되겠냐 고객항의가 들어오지만. 마, 이게 죽을병은 아니다.


 간호사 아내나 애인에 로망이 있는 남성분들에게 안타까운 말씀을 드리자면, 본인이 아플 때 다정한 간호를 받을 기대는 미리 접는 것을 조심스레 권한다. 피 콸콸 에 고열에 임종에, 온갖 극한 케이스는 다 접한 그들이다. 장기가 온전치 못한 이들을 간호하다가 살짝 긁힌 상처나 감기는 좀 귀여워 보이는 걸 어떡하겠는가. 기대했던 서비스에 다소 못 미치긴 하겠지만 보호자로서 제법 든든한 것은 사실이니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실리를 추구하자면 제복 판타지라도 건져보시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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