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니애 Apr 05. 2024

환자 코드, A+의 비밀

 출근 4시간째, 적장이 오더라도 살려내야 할 병원에서 적이 아닌 적과 대치 중이다. 나의 상대는 50대 여성의 정형외과 환자. 스테이션에 바짝 다가온 환자는 휠체어에 앉아서 총 대신 깁스한 다리를 내게 겨누고 타오를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다. 평소보다 더 바쁜 척 뛰어다녀도 결국엔 기록을 남기고 noti를 하고 order를 확인하기 위해 데스크톱이 있는 스테이션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따끔, 따끔. 환자의 눈총이 닿는 곳마다 아주 불편해 죽을 지경이다.

  "주치의 대체 언제 와요? 전화 빨리 다시 해요."

 30분에 한 번씩 저렇게 간호사를 닦달하는 까닭은 아파서가 아니요 예후가 궁금해서도 아니요, 단지 '보험료 많이 나오는 진단서를 써 달라'는 것. 아 제발, 여기는 흉부외과 병동이라고. 정형외과 주치의가 오려면 구름다리 건너 건물을 옮겨와야 하는데 얼굴도 내비치기 힘든 주치의를 진단서 한 줄 고치라고 자꾸 부른다. 이미 주치의에게 온라인 노티는 이전 듀티 때부터 수 십장 날아갔다. 전화도 눈치껏 중간 중간 해보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내가 써 줄 수 있는 진단서는 그것뿐'이다.


 이 환자로 인해 이미 업무는 충분히 방해받고 있다. 다른 환자들 케어해야 할 에너지가 빼앗기는 중이었다. 하는 수 없이 또 원무과를 쪼으기 시작한다.

 "선생님, 여기는 CS 병동이잖아요, 교수님이 ICU 환자 병동 올릴지도 모른다고 세이브해놓으라셔요, 그리고 아무리 자리가 없지만 OS병동 신환 받기 전에 타 병동 있는 자기 환자부터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계속 주치의 찾아대는 환자를 저희한테 보내시면 어떡해요, 그것도 트리플 A 환자를!"


 그랬다, 그 환자에겐 자신이 모르는 표식이 찍혀있었다.

 AAA

 다른 병원의 시스템까지 다 꿰고 있는 건 아니라서 모두가 이렇습니다, 아는 체는 할 수 없다. 적어도 내가 근무했던 병원의 원무과에선, 응대하며 난항을 겪게 되거나 상식선에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주의 요망 환자'에겐 A 점수를 부여했다. A, AA, AAA, 정도가 좀 마않이 마아아않이 심할 땐 A+++++를 전산의 환자 이름 옆에 기록해 두어 추후 어느 진료소속으로 가더라도 조심스러운 응대로 접근해야 할 것을 미리 알리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중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역시, 어딜 가서도 좀 까다로워야 날 조심스럽게 응대해 주겠구나.'라고. 혹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평가질을 해 놓는 방법이 어디 있냐고. 마치 블랙리스트에 올라 따로 관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가능성도 있겠다. 사실 이 글을 쓰며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도 하고 스스로도 어떻게 행동해라 지침을 일러주기도 난해하다. 하지만 일단 제일 먼저, A라는 표식이 있어서 불친절해지거나 환자를 가려 받기를 하는 건 아니라는 걸 꼭 해명하고 넘어가야겠다.


 빈 병상을 두고 환자를 받지 않는 그런 짓거리는 장롱 속 면허를 걸고 맹세하건대 절대 하지 않는다. 결단코. 다른 과 환자라 할지라도. 대신 다른 과 환자를 꺼려 받는 이유는 있다. 해당 병동 간호사들이 익숙하지 않은 업무여서 새로운 order를 받을 때마다 본 병동 간호사들에게 일일이 물어보고 조언을 얻거나 장비를 구해와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주치의가 자주 들르지 않게 되니 피드백에 있어서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병동에 중증도가 높아 일에 치인다 해도, 환자 이름이 김 AA 씨여도 빈 병상엔 환자를 받기 마련이다. 그럼 병동으로 올려져서 간호사들끼리 서로 미루며 떠 안기기를 하느냐, 그것도 불가능하다. 어차피 업무는 3교대라서 돌아가면서 누군가는 다 돌보게 될뿐더러 어느 병실 파트를 맡게 될지 조차도 근무 때마다 일정하지 않아서 전담이 지속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A를 받은 환자들은 VIP대우를 받는 귀빈 집단인 것인가. 중환자실에서 집기를 던지며 의사와 싸웠다거나 원무과와 응급실에 오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갑질을 하지 않고서야 받기 힘든 점수인데, 무에 이뻐서 VIP 대우를 해드린단 말인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수식어를 무례하게도 붙일 수밖에 없었던 병원 측 입장도 좀 이해해 주길 바란다.

 예시 하나, 초진 환자 등록을 위해 주민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개인정보를 함부로 캐묻냐고 얼굴을 붉힌다.

 예시 둘, 창가 자리가 아니면 입실하지 않겠다고 좋은 자리를 알아달라고 한다.

 예시 셋, 응급실에 와도 원무과 수속을 밟아야 치료가 가능한데 환자부터 빨리 봐달라고 고성을 지른다.

 예시 넷, 모든 검사와 처방이 본인이 기대하는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의료인들에게 폭언을 퍼붓거나 될 때까지 콜벨을 수 차례 누른다.

 예시 다섯, 모든 치료와 처치 과정은 의심에 의심을 담아 대응한다.

 이보다 더한 사례들이 있겠지만 각설하고.


 이유야 어떻게 됐든 누군가 나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의미를 부여한다는 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A를 달게 되는 것은 피차 간에 발생할 수 있는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라 한다면 유익한 설명이 될 수 있을까. A학점 환자들에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된다. 그래야 시간 싸움을 벌이는 대학병원에서 다른 환자의 치료에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고 의료 서비스 제공자 입장에서도 마음의 상처를 덜 입을 것이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A학점을 받은 본인도 환자라는 점이다. A든 B든 F든 제발 나아서 건강하게 퇴원을 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의료진과 소통이 잘 되어서 나쁠 일이 없다. 마찰을 줄이고 유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병원이든 아니든 삐걱대고 빡빡한 사회생활에 기름 한 방울이 되어 주리.


 그렇지만 A학점을 받았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화낼 일도 아니고 색안경을 쓰고 볼 일도 아니다. 한국의 의료 접근성과 수준이 높아짐과 동시에 병원은 환자 치료를 넘어 포괄적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으로 이미지 관리에 적극적이다. 불만을 토로하는 환자나 보호자가 발생하면 고객관리팀에서 단정한 옷을 입고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와 경청한다. 그렇게 까다로운 고객을 응대하다 보면 생각지도 않게 되려 교훈을 얻게 되는 경우도 많다. 막무가내 억지가 아닌 다음에야 민원을 제기한다는 건 불편을 느꼈다는 것이고, 불편이란 건 개선점이기 때문에 해당 부분만 수정이 되면 병원은 한 걸음 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대충 넘어가지 않고 본인의 시간과 에너지를 써서 민원이라는 수고로움을 감당할 때엔 적어도 발전하는 사회와 구조를 기대하고 싶은 열정을 지녔으리라.


 병원에서 A+ 실컷 받아봤자 장학금은 못 받는다. 어디 가서 자랑하지는 말자. 아차, 본인 점수는 모르겠지. 정정한다. 내가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 입네, 알아서 잘들 모시게 하는 기운을 언행으로 풍기는 것만 좀 삼가자. 선하고 옳은 일에 의분을 품되 상대방에게는 여유와 존중을 건넬 줄 아는 매너가 흘러넘치는 어른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

 

 언젠가 A옆에 뫼비우스의 띠가 찍힌 환자가 올라왔다. A ∞ 라니. 병동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13년 차 선생님도 이런 건 처음 봤다며 각별히 조심하라는 인계가 전해졌다. 바늘로 찔러대는 가해자는 우리인데 가슴은 또 잔뜩 쫄려 있다. A가 벼슬이냐, 그래서 어쩌라고의 기 센 간호사도 있지만 보통은 천냥 빚 탕감받을 각오의 처세로 병실에 입장했다.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그 뫼비우스 환자의 재원기간 동안 아무런 이벤트는 발생하지 않았다. 조용히 치료받았고 순조롭게 퇴원했다.

 어쨌거나 진심이 통한다면 무한대의 까다로움도 이따금 쉬어가는 구간이 생기지 않을까.

이전 09화 벤츠 아니면 '태우지' 맙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