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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니애 Mar 30. 2024

벤츠 아니면 '태우지' 맙시다

 결국 일은 터졌다. 데이와 이브닝 인계 타임이 곧 시작인데 A가 출근을 하지 않는다. 병동 전화기로 발신을 계속 걸어도 수신자는 없고 입사 전부터 친구였던 내가 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해 보았으나 묵묵부답이다. 어제 신나게 A를 태우던 B선생님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간다.


 A는 전국연합형 기독교 의료봉사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였다. 타 전공자였다가 늦깎이로 들어온 나보다 1년 일찍 졸업했는데 웨이팅*이 길어서 정작 병동에 배치받은 건 3개월 앞이었다. 같은 병동에 배정받은 사실을 알게 되고 둘은 손을 맞잡고 반가워했다. 마침 계약한 자취방도 가까워 얼마나 의지했던지. 대학 때 섬으로 의료캠프를 다니며 함께 심었던 박애와 헌신의 마음가짐을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마주한 얼굴만 보아도 상기시킬 수 있는 우리는 서로의 사명을 일깨워주는 존재였다.

 한창 *프리셉티 교육을 받으며 트레이닝 중이던 A는 근무 시간 내내 비쩍 마른 장작이었다. 그녀의 오류를 고의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어쩐지 모든 것은 오답이 되어 걸핏하면 혼이 났고 A의 얼굴과 눈시울은 수시로 붉어지며 화르륵 태워지는 것이었다. 150cm을 겨우 넘는 왜소한 몸집은 더 가냘파, 프리셉터의 잉걸불에 휙 던져 넣으면 그대로 화르륵 타버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일로 만난 사이여서 그렇지 밖에서 만나면 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윗 연차 선생님들을 감싸 안으려던 그녀. 자잘한 실수 연타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자신의 쓸모를 상실해 버린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격려하던 그녀는 돌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설마 위험한 생각을 품은 건 아니겠지?

  "OO야, OO야, 집에 있니? 문 좀 열어 봐!"

 다음 날, A의 자취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며 그녀의 이름을 하염없이 불러보았으나 돌아오는 건 태움에 타버린 재의 침묵이었다.




 간호사 세계에서 '태우다'라는 표현은 더 이상 우리들만의 은어가 아니다. 병동 태움 문화가 부른 간호사들의 자살 사건이 잊을만하면 뉴스에 실리면서, 숨기고 싶었던 '우리들이 사는 세상'의 치부를 들키고 말았다. 백의의 천사가 실은 독하디 독한 여자 교관들이었단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태움의 증거들을 기사로 접하며 혀를 끌끌 찬다. 간호부에서 관리 들어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또라이들은 존재하는구나.

 그러나 기사에 달린 경악과 비난에 찬 댓글 물결에 쉽게 휩쓸려갈 수만은 없었다. 뿌연 안개가 울적한 가슴 아래 자욱이 깔린다.


 첫 번째 이유는 여전히 여자의 적은 여자인 암투 가득한 임상이 떠올라서일 테다. 알코올, 향수, 새 린넨, 주사약들의 뒤섞인 내음이 인계 때마다 스테이션을 가득 메우던 숨 막히는 긴장감 가득한 공기 속에 녹아들어 훅 끼쳐왔다. 나를 다시 업무 데스크 앞으로 끌어다 앉혀놓고 화형을 위한 점화를 시작하는 착각이 든다.

 나도 장작의 시절이 있었다. 태워지고 태워지다 못해 스스로 내 몸을 망가뜨리는 건 어떨까 몹쓸 충동도 일었다. 왜 내 맹장은 터지지도 않고 멀쩡한 것인지, 속도를 줄이고 있는 차에 부딪쳐서 아주 살짝, 정말 사알짝만  다리 한쪽 정도 골절되는 건? 출근시간이 다가오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이 덜덜 떨리던 사시나무 장작이었는데 태움 당한 간호사들의 사연을 듣고서 어찌 동정으로 끝을 내랴.


 울적함의 두 번째 이유는 사시나무 장작도 그사세의 가랑비에 젖어들어 땔감신세를 면했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고 싶어서 간호사가 되는 사이코는 없다.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고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맹세하는 나이팅게일의 선서에 엄숙한 마음으로 손을 들었던 이들이다. 그랬던 이들이 왜 태우는 교관이 되었는고 그사세의 썰을 잠시 하나만 풀어보겠다.

 필자가 병동에 배치되기 전 악명 높은 신규가 하나 있었단다. 지켜보다 못해 권고사직을 당했다는 그녀는 일처리가 늦고 눈치 없고 일의 융통성이 없는 데다가 실수가 빈번했다. 투약 오류의 정점을 찍은 그날, 그녀는 수술을 앞두고 절대금식 중이던 당뇨환자의 수액에 인슐린(주사제 당뇨약) 용량을 잘못 재서 mix 하였고 환자는 수술실 앞에서 대기 중에 저혈당 쇼크에 빠져 정신을 잃게 되었다. 결국 수술은 미뤄졌고 환자의 상태는 급히 처치하여 회복이 되었지만 질책을 피해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권고사직이 결정되었다고.

 1ml가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하는 곳이 병원이다. 근무하는 내내 온 신경을 곧 세우고 예민하면서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간호사들이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히 자리에 앉아 커피 한 모금 마시며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느냐, 그건 또 아니란 말이다.  변수와 예측 불가능과 동시다발이 바로 임상의 진정한 매력 포인트. 신속한 의사결정과 정확한 투약 및 판단에 의해 사람의 생명이 오가는 곳에서 조금의 실수라든가 잠시의 태만이 용서받기란 어렵지 않겠는가. 채근하고 일깨우고 재차 확인하며 까다롭지 않으면 책임져야 하는 일이 금전이 아니라 생명인 곳. 따끔하게 혼이 나는 것이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보다 낫다.

 그런 이유로 간호사들은 왜 사람을 태우는 악습을 못 버리냐고 비난하는 화살을 그대로 다 맞고 있을 수가 없게 된다. 가르치다 보니 본인의 기질이 좀 나왔을 뿐인 것도 있다. 왜 부모도 내 자식 수학 가르치다 보면 용암 한 두 번쯤 뿜게 되지 않는가. 그렇다고 공과 사의 구분 없이 인신공격을 일삼는 못된 무리들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걔들은 좀 많이 혼나야지.(아직 다 기억하고 있다, 나 괴롭힌 너네들)


 세 번째 이유는 좀 복잡 미묘한데, 역 태움이라고 들어봤는지?

 잦은 퇴사와 태움 호소 민원 때문에 간호부는 사실 신규 챙기기 프로젝트에 들어선 지 오래다. 입사 백일을 축하해주기도 하고 병동에 잘 적응하는지 수시로 안부를 확인한다. 배려를 잊지 말아라고 윗 연차 선생님들께 당부도 잊지 않는다. 그럼에도 언제부턴가의 신규들은 참지 않는다고들 한다. 본인이 부당하다 여기면 바로 간호부로 달려가 고발을 해버려서 프리셉터 하기 무섭다고 병원에 남은 동기들이 소식을 전해준다. 적확한 가르침조차 태움의 범주에 들어가 버려 선배들은 자신도 모르게 악역을 맡게 되었단다. 권리는 당연하고 손해는 보지 않는, 감탄고토의 세대가 밀물처럼 들어오니 도리어 눈치를 보고 행동거지 조심하는 건 신규가 아니라 '라떼들'이라고.


 인계 노쇼를 했던 A는 며칠 뒤 수선생님께 퇴사 의사를 밝히려 전화를 했고 그렇게  병동을 떠났다.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한동안 바빴고, A를 태우던 선배는 며칠간만 얌전해졌으며 빈자리는 새 마른 장작으로 채워졌을 뿐이었다.  A는 생각보다 씩씩하게 새 일자리를 금방 구했는데 의지할 데 없이 남은 딱 한 사람만 그 빈자리를 쓰다듬으며 조금 더 슬퍼했다. 정말, 딱 그뿐이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날, 미치광이 그 여인이 불조절에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그 앤 계속 다니고 있었을까. 어느덧 중간 연차가 되고 나랑 같은 근무가 마치면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쭉쭉 들이키면서 힘들었지만 뿌듯했다 말하고, 그렇게 깔깔거리면서 누구의 자취방에 함께 돌아와 밥이든 야식이든 한 술 뜨며 혼자가 아닌 서울살이를 살아내고 있었을까. A가 사라지고 다음 타깃이 된 나도 한동안은 울며 다니는 출근이었다. 많이 혼나기도 했고 가끔 또라이짓 하는 선배의 태움에 휴일도 반납하는 날이 잦았지만, 그때를 지나갈 수 있게 해 준 건 역설적이게도 떠난 그 애의 한 마디였다.

 "일로 만난 사이여서 그렇지 밖에서 만났더라면 다 좋은 사람들이야."

 태움이든 역 태움이사람 그 안의 진심을 바라본다면 감히 한 인간을 땔감 취급 할 수 있을까. 태움은, 벤츠라든지 비행기라든지 뭐든 퍼스트클래스로만 모시는걸로 하자. 간호의 현장에 서며 피차 보건의료인과 협조하며 성심을 다하기로 선서했다면, 그 보건의료인이 의사나 치료사같은 타 직종뿐만 아니라 같은 간호사도 포함이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 주기를. 더 이상 백의의 천사가 타락했다는 뉴스는 들리지 않기를.






나이팅게일 선서문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하나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웨이팅: 대학병원 정규채용 시 합격이 되더라도 모두가 바로 부서 배치를 받는 것은 아니다. 여유 인원을 남겨두었다가 부서에 퇴사자가 생기면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순차적으로 호출한다. 예고 없는 웨이팅은 1년이 될 수도 있다. 간호사의 이직률과 퇴사율이 높은 것을 반증해주기도 하는 시스템이다.


*프리셉티: 단순 투약업무 등을 넘어선 독립된 간호사 1인으로서 근무할 수 있도록 훈련받는 연수간호사. 의사의 오더를 직접 받아서 환자에게 적용하도록 하고 배정받은 병실 안에서의 간호 일과를 총책임지는 업무를 가능하게 한다. 보통 근무 시간 내에 프리셉터(멘토) 1인이 전속 배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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