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저, 저놈, 또, 또, 또. 주어 목적어 없이 서술어만 구술해 놓은 자의 당당한 세모 눈깔이 나왔다. 10대의 권리인 마냥 이 세상 다 아는 체 하는 녀석은 엄마를 다 식은 꼰대라떼 취급하는 표정이다. 어처구니가 없다.
꼰대에 라떼에. 기성세대의 경직된 수직문화와 관습을 비꼬기 위해 쓰이게 된 단어. 덕분에 유교적 사고가 뿌리 깊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수평적인 소통의 시도가 확산되었다. 젊은 세대의 의견에 적극적인 경청을 함으로써 피차가 존중하고 신선한 발상으로 생산성이 높아지는 기업 문화가 정착되니 당연히 고무적인 흐름이 맞고말고.
그러나 언제부터일까, 어쩐지 이 단어들이 갈수록 본디의 쓰임새보다 낭비되고 있는 느낌이다.존중과 소통을 해보자고 만들어 낸 어휘가 아니었던가? 그저 비아냥의 수단으로 끝나고 마는 행태를 보면 자못 안타깝다.
이러한 패턴은 주로 각종 온라인 사이트들의 댓글에서 도드라져 보이는데, 윗 세대에 대한 반항심과 불만을 뭉뚱그려 표적 없는 화살처럼 중구난방 날리는 모양새다. 특히 인스타그램과 같은 결을 가지는 어떠한 콘텐츠들은 젊은 세대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잔소리가 시작된다 싶으면 공격이 시작되는 것이다.
필자도 윗 세대와 대화할 때 적지 않은 고초를 겪어본 바. 오랜 세월 고착된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을 쉬이 바꾸기란 어렵고 말고. 친정아버지랑 대화하며 가슴을 텅텅 치지 않았겠냐고. 모든 세대마다 자기 기준의 꼰대며 라떼가 존재하기는 하지. 젊은 시절의 나도 적잖이 어른들의 말이 귀에 도통 먹히지 않았기에 그 심정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단지 오늘의 잔소리를 해보자면, 꼰대와 라떼가 보여도 애초에 소통이 목적이었다는 걸 잊지 말아 보자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예절을 지킨다는 것은 당장은 타인에게 이득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본인의 품격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인다 싶어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이 문제는 이러한 것이 인因 이요 그리하여 과果가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정도의 피드백을 제시하는 것이 어떨는지. 여기 또 틀딱이 왔네 하는 조롱은 삼가보세.
또한 소통을 하려는 것은 역지사지의 과정을 거치는 것인데, 가슴이 턱턱 막혀도 어쩌다 이 세대가 이런 사고를 갖게 되었나 한 번 들여다보고 이해해 보려 조금이라도 노력하면 그러려니 하는 여유가 뇌에 틈을 비집고 생긴다.
사실 한 물 간 세대들이 퇴물처럼 여겨지겠지만 알고 보면 이들은 퇴적물이다. 흘러간 세월 속에서 그 격랑을 맞았을 때 침식과 풍화를 견뎌낸 그 시절의 유의미한 알맹이들만 가라앉혀 남겨놓은 것이다. 삶의 호흡을 내리누르는 압박감에 그것들을 단층, 단층, 켜켜이 쌓을 때 이것저것 따라 들어온 불순물도 흔적으로 남겨졌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루살이도 힘겨운 시간들을 오래 견딘 것만으로 단단해진 그들의 삶이다. 꼰대든 라떼라는 두 글자만으로 한정을 짓지는 말자 이거다.
딸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엄마가 생각보다 아는 것이 많은 이유는 '너보다 많이 살아서'가 아니다.
자슥아. 내가 너보단 숏츠 더 많이 보거든. 딸내미 핸드폰 사용 가능 시간을 하루에 단 1시간으로 제한해놓는 몰인정한 이 엄마는 사실 무제한이다 이거야. 밈 몇 개 안다고 다 아는 척하지 말아 줄래.
새 브런치 북 첫번째 글. 워뗘. 잔소리 듣기 거 참 골이 따분허지? 참고 들어줘서 고맙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