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소리 내 말하지 못한 사람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무성한 은행 푸른 이파리가 가지마다 빼곡하게 피어있었다. 찌르는 듯한 햇볕이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나무 그늘 밑에는 흰 빛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세동 짜리 빌라 사이에 있는 나무는 이 집을 지을 때 심어져 빌라와 나이가 같았다. 삼십 년이 넘은 빌라촌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다. 저녁이 되면 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나고 여느 골목에는 사소한 일로 싸우는 거친 고함소리로 가득 찼다.
긴 모직 옷을 입은 여자가 빌라 지하에서 계단을 올라왔다. 체격이 크고 얼굴이 까맣고 둥글었다. 양볼이 격자무늬로 빨갛게 터 있었다. 모직 원피스 위로 점퍼를 입고 오른쪽 팔에는 봉지가 세 개, 왼쪽 팔에는 시장바구니가 두 개, 오른쪽 어깨에는 가방이 두 개, 왼쪽 어깨에는 농구공이 들어갈 만한 가방 두 개가 매달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흔들렸다. 살짝 저는 걸음, 검은 양말에 굽이 높은 검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여자는 추워 보였다. 흰머리가 반 검은 머리가 반인 단발머리는 언제 빗었는지 모를 정도로 헝클어져 있었다. 여자의 발걸음이 바빠 보였다. 나도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렸다. 소도시의 버스 간격은 일정치 않아서 어느 때는 빨리 오고 어느 때는 늦었다. 여자를 다시 만났다. 여자는 소리도 없이 도로를 등지고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잠시 버스가 오는 쪽으로 한 눈을 판 사이 여자가 내 옆에 있었다. 여자는 지나가는 행인은 바라보는 듯 보였다. 그때 여자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누구와 아주 진지한 대화를 하고 있는 듯, 누구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듯 보였다. 여자와 나 둘만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쉴 새 없이 수다를 떠는 여자. 여자는 버스를 기다리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가 낮췄다.
햇빛이 정수리를 뜨겁게 데웠다. 여자의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볼을 지나 턱으로 무릎으로 떨어졌다. 여자는 어깨를 움츠리면서 땀이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언쟁은 점점 격해지고 여자는 발을 굴렀다. 억울한 몹시 억울한, 두려운 몹시 두려운 모습이었다.
버스를 타러 나온 사람들 서넛이 버스정류장으로 모여들었다. 여자는 슬그머니 일어나 상가 앞 도로를 절뚝이며 걸어갔다. 왼쪽 어깨에서 쓸려 내려가는 가방을 추켜올리자 두 개의 시장바구니가 묵직하게 흔들렸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들이 여자를 피해 양쪽으로 갈라졌다. 가는 내내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옆얼굴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어두운 방안에 혼자 있는 사람은 안다. 간절히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걸.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어 본 사람들은 안다. 상처를 소리 내 말하지 않으면 그 상처는 계속 자신을 상처 내며 따라온다는 걸. 살아내기 위해 혼잣말이라도 해야 하는 슬픔. 두려움을 짊어지고, 살아내야 하는 여자는 오늘도 보따리를 지고 버스정류장에 앉아 자신과 끝나지 않는 대화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