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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탈

걷는 사내

by 빨강

산비탈에는 서너 평 짜리 도시농장이 구획을 나눠 조각보처럼 펼쳐져 있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긴 파란 장화를 신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모종을 심거나 씨를 뿌리고, 비가 올 때 받아놓은 큰 드럼통 안의 빗물을 밭에 주었다.


가을배추를 심기 전 아저씨들이 퇴비를 내리고 땅을 고르고 퇴비를 뿌렸다. 퇴비 냄새가 동네에 진동했다. 코를 찌르는 식물과 동물의 썩은 내가 동네에 퍼졌다. 한동안 동네 주민들은 농장 앞길로 다니지 않았다.


쿵쿵쿵, 사내가 그 길로 걸어왔다. 두 무릎을 곳곳이 펴고 걷는 사내의 앞꿈치가 들려 있었다. 사내는 뒤꿈치로 바닥을 찍으며 걸었다. 이 퇴비 냄새가 나는 길을 바쁘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걸을 때마다 오른손에서 짤그랑 짤그랑 소리가 났다. 투명한 봉지 안에 알루미늄캔이 부딪혔다. 봉지 안은 다양한 색깔로 알록달록했다.

한밤 중, 쓰레기가 놓인 길을 따라 걷는 사내는 잠시 멈춰서 재활용 봉지를 뒤졌다. 콜라와 사이다, 맥주캔을 골라냈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봉지로 알루미늄캔을 담았다. 봉지 목 끝까지 알루미늄캔이 차 있었다.


구도심에서 신도심까지 사내는 하루종일 산비탈을 걷는 것처럼 뒤꿈치로 동네를 걷는다. 새 신을 신은 것 같은 앞꿈치와 바람이 일면 바지통 안에서 앙상한 다리를 드러내며 걷고 또 걷는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산을 오르듯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한다.


주말 농장을 둘러싼 나무들이 이파리를 서서히 떨어뜨리는 계절, 벚나무 이파리가 너도 밤나무 이파리가 나무 밑에 납작 엎드렸다. 산비탈 도시농장에 배추 모종과 무씨가 뿌려졌다. 촘촘히 심어진 배추와 무는 김장 준비를 뜻했다. 하루가 다르게 배춧잎이 웃자라고, 무 새싹이 이랑을 따라 고개를 내밀었다. 도시농장에 사람들이 떠가고 난 후에도 배추와 무는 밤사이 쑥쑥 자랐다. 도시에서 퇴비를 먹고 자란 식물은 시장에서 파는 것처럼 실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매년 씨를 뿌리고, 계절마다 다른 식물의 새싹이 농장에 뿌리를 내렸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것들의 시간이 지나간다. 알타리 같은 무가 속이 차지 않은 배추가 김장의 시작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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